노인은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눈빛만은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었고 말투 하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았으며 제왕의 위엄과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대를 이을 한강왕을 고르기 위해 한강변을 배회한지 몇 해가 지났으며 그러다가 한강왕의 자격을 갖춘 나를 만나게 되어 하늘에 감사한다고 했다. 나는 몰랐지만 노인은 그동안 한강을 거닐던 나를 면밀히 관찰했다는 것이다.

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이 한강왕이라면 직계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이지 왜 나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일까? 노인의 말인즉, 자신도 자식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초대한강왕이 거부하여 할 수 없이 나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위계승은 제례를 통해 초대한강왕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노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나로서도 난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노인이 나를 놀리기 위해 거짓을 꾸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노인은 자신의 말을 실제로 증명해보였다. 노인은 자신이 속해있던 글로벌제왕협회에 자신의 후임자로 나를 추천했다. 나는 소정의 심사절차를 거쳐 글로벌제왕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왕의 옥새와 함께 한강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던 것이다. 

오전에 두 시간에 걸친 글로벌제왕협회의 원격세미나를 마친 나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커피 한잔을 들고 한강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싱그러운 봄바람을 맞으며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콘서트를 즐긴다. 게다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서주곡은 언제 들어도 스릴과 쾌감을 맛보게 해준다. 왕의 기쁨이 따로 있으랴. 

오후 일정은 여유가 있다. 한가로이 한강트래킹을 하기도 하고 핫이슈의 유튜브도 들으며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오후 5시에는 국내외 정세와 주요 사건사고에 관한 정례 브리핑이 있다. 각 부처에서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줄을 섰다. 나는 대면보고를 서면 보고로 갈음하라고 지시했다. 이제 나는 각종 보고를 인터넷으로 보고받는다. 일반 백성들도 인터넷으로 그 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윤허했다. 보고서는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 전반에 걸쳐 항목별로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나는 그 옛날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유도(仙遊島)로 산책을 나섰다. 백성들이 저 멀리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왕의 주변에는 비밀경호단이 왕을 호위한다. 왕의 천 미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비밀경호단의 주시를 받기 시작하고 백 미터 가까이에 이르러서는 신분조회와 신상내역을 조사받게 된다. 물론 당사자는 전혀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된다. 이들은 외곽경호단이다.

근접경호단은 왕에게 십 미터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들의 신상은 물론 마음과 정신상태까지 점검하고 평가한다. 일종의 심리 경호단이다. 나에게 왕위를 물려준 전임 한강왕에 따르면 이들 비밀 경호단은 미국의 CIA와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정보력과 침투술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런데 외곽경호와 근접경호단을 뚫고 나에게 다가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아름다운 미모의 젊은 여성이 나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어딘지 모르게 귀족다운 기품이 있어보였고 입가에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자신을 한강왕이라 자칭하는 노인을 만나지 않으셨나요? 그리고 한강왕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제안하지 않았나요? "

정숙하고 다소곳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여인의 질문은 매우 도발적이었다.

"한강왕을 자칭하는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한강왕의 제안을 받은 건 사실이오."

나의 정중한 답변을 듣자 여인의 얼굴이 깊은 우수에 잠겼다.

"그 노인이 한강왕이라며 접근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미친 노인네 때문에 제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고 이제는 저마저 미쳐버릴 지경이랍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란 말인가. 내가 미친 노인도 못 알아볼 만큼 정신이 나갔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 여인에게 좀 더 사연을 들어봐야 할 듯싶었다.

"그 노인에게 이미 한강왕을 물려받았다오. 그런데 그 노인을 미쳤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이요? 대체 그대는 노인과 무슨 관계기에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는 거요?"

"사실 노인은 저의 아버지인데 몇 년 전부터 실성하여 자신이 왕이었다고 떠벌리고 다닌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아실 수 있을 텐데, 그걸 눈치 채지 못하셨나보군요."                                                      <계속>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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