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 6. 초인(超人)의 기억(2)

안지애 객원편집위원l승인2020.06.14l수정2020.07.3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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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초인(超人)의 기억 :  초순진 회상 두번째 이야기

문지방을 넘었다.

서재 바닥에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문을 잠글 새도 없이 다급하게 나가야 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렸을 때는 자주 들어와 책도 읽고 아버지와 대화도 하고 이런저런 놀이를 했던 방인데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누구든 서재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고 조심했다. 나는 굳이 아버지의 예민한 장소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고,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으니까.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가니 그 모든 어린 시절의 기억이 돌아오는 듯했다. 서재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나무 놀이판을 보니 9살의 봄 아버지가 그 놀이를 알려준 날이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그 놀이판은 아버지가 직접 나무판을 깎아 만들 퍼즐판이었다. 판은 아시아 모양이었고, 게임의 규칙은 간단했다. 그냥 퍼즐을 맞추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면 하나의 퍼즐 조각을 집은 순간 그 퍼즐판은 한 시기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 세계사를 배우면서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그저 맞는 퍼즐을 이리저리 끼어 넣으면 되는 것이었고, 퍼즐을 완성했을 때 너무 많은 피스가 남아 ‘왜 그렇지?’ 고민을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며 한 피스를 집는 순간 이 놀이판에 쓰일 피스 세트가 고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세계사를 배우면서 그 피스 하나하나의 모양이 바로 시대에 따라 달라진 각 나라의 경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구려 피스를 집는 순간 난 삼국시대의 퍼즐을 맞춰야 했고, 통일 신라 시대에는 통일신라와 당나라 피스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매일같이 하던 게임이라 난 어느 시대든 손쉽게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퍼즐판에는 예전부터 내 흥미를 끄는 피스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海東盛國(해동성국)’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었고 하나는 ‘고(高)’라는 한자가 쓰여 있었는데 그 두 피스의 색깔만 밝은 자주색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알고보니 ‘高’피스는 고구려를 의미하는 조각이었다. 

자주색 ‘高’피스는 몇 개의 다른 ‘高’피스들과 달리 현재의 대한민국 서울 한 가운데 기다랗게 뻥 뚫린 한강유역에 딱 맞았다. 이 퍼즐판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각 나라의 경계를 표시한 거라면 그 마지막 ‘高’피스는 잘못 만들어진 피스임이 분명했다. 현대의 서울에 고구려를 의미하는 ‘高’피스가 들어갈 리 없지 않은가. 아버지는 그 잘못된 피스를 고민했던 것이 분명했다.

▲ 현재의 한강유역 지도

놀이판 옆으로는 서울시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지도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몇 개의 지역에 형광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선유도역 주변과 강남고속터미널, 서빙고, 아차산 지역은 노란 형광펜으로 올림픽공원, 암사 지역에는 파란색 형광펜으로 몇 번씩 그어놓은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여섯 지점을 펜으로 연결해 놓으셨다. 그런데 그 모양이 마치 자주색 ‘高’피스 모양과 흡사했다.

그때 지도 옆으로 ‘한강왕’이라고 써져있는 종이가 눈에 띄었다. 무의식중에 빨간 볼펜으로 얼마나 밑줄을 그었는지 종이가 찢어져있었다. 저렇게까지 아버지를 고민하게 만든 저 ‘한강왕’이라는 게 뭘까.

“순진아!”

아버지다. 지도와 종이들을 보느라 아버지가 문을 열고 집을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 일부러 들어오려고 한 건 아닌데, 문이 열려 들어왔어요. 찾아볼 책도 있었고요. 오늘 친구가 저를 초인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이 니체라는 철학자래요. 혹시 집에 니체에 관한 책 있어요?”

나는 재빨리 화두를 만들어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쏟아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살짝 언짢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눈치였지만 내 자연스러운 질문에 책 한 권을 꺼내 건네주었다. 아마 오늘 이전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공간을 허락 없이 침범하지 않아준 딸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너를 초인이라고 불렀다고? 철학적 별명이군. 이 책을 읽다 보면 니체가 말한 초인을 조금은 알게 될 거다.”

아버지가 준 책 표지에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쓰여있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책상으로 갔다. 내가 나가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방을 나가려다 용기를 내어 물었다.

“우리나라에 한강왕이라는 왕이 있었나요? 한강왕이 뭐예요?”

아버지는 내 질문에 알 수 없는 의미의 웃음을 지었다.

“이런 때이군. 네가 정확한 질문을 했고, 내가 정확한 답을 해야 하는 때 말이다. 글로벌제왕협회법(3조2항)에 의하면, 자식이 만 15세 이상이 되고 한강왕을 비롯한 글로벌제왕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에 대해 가감없이 모든 것을 말하게 되어있지.”

나는 혼잣말 같은 아버지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글로벌제왕협회법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한강왕이라는 것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인가.

“순진아, 학교에서 한국사는 어디까지 배웠냐?

“이제 현대사 나가니까 거의 다 나갔어요.”

▲ 옛날의 한성부 지도

“네가 모르는 숨겨진 역사가 있다. 처음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었을 때 아주 많은 수의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중국 역사책 <구당서>에 의하면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인 2만 8200호를 끌고 가 당나라 여러 지역에 분산시켜 정착시켰다는 기록이 있지. 그들 중 당나라에 가서 고위직까지 오른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고구려 유민들은 다시 세력을 모아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분명히 밝혔지. 여기까지가 네가 아는 역사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발해가 멸망한 후 많은 고구려 후손들이 다시 고려로 넘어와 비밀리에 조직을 만들고 한강 유역을 점유한 후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지. 또한,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인도 고려로 넘어와 우리와 힘을 같이 했단다."

아버지는 잠시 한 숨을 돌린 후 나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어갔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 조직은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지. 저 지도를 봤다면 대충 한강 유역 어디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글로벌제왕협회 본원은 아차산에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선유도 지역과 서빙고, 강남 고속터미널 부근이 고구려 후손이 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 지역이고, 암사와 올림픽공원은 백제의 후손이 머물도록 했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부족장을 뽑아 한강왕이라 불렀다. 초대 한강왕에 고주몽의 직계 후손이 추대되었고, 나는 그의 직계손인 78대 한강왕이다. 그리고 너는 79대 한강왕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듣자 공상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혹시 아버지가 미친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망상임이 분명할 것이다.

“순진아. 네가 지금 믿기 힘든 거 잘 알고 있다. 나도 처음 한강왕에 대해 들었을 때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생각했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어 할아버지 아래서 자랐지 않느냐. 처음 할아버지께 한강왕에 대해 질문을 했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정신과에 가서 할아버지가 미친거 같다고 의사선생님과 상담을 했을 정도지. 네가 얼마나 이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지 다 알고도 남는다. 내일 다시 이야기 하자꾸나. 된장찌개 끓여놨으니 먹고 일찍 쉬어라.”

나는 물어볼 것이 많았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무얼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뭐라고 대답을 하고 방을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그 날 난 아버지의 큰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아니,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큰 비밀을 알게 되었다.

* (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심창식 편집위원과 안지애 객원편집위원의 릴레이 글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안지애 객원편집위원  phoenic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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