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꿨던 김광철의 혁신학교 이야기1

▲ 2012년 신은초에서 3학년 담임을 하면서 옥상텃밭에 고구마를 심고 가꾼 다음 가을에 수확을 하여 큰 고구마 한 개씩을 들고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꿨던 김광철의 혁신학교 이야기1

나는 서울형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하고 학교 일선에서 물러났다. 참교육을 외치며 결성된 전교조 활동의 결실도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에서 대미를 장식할 수 있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30년 가까운 참교육 운동을 맘껏 펼쳐보고 싶었고,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굉장한 성과를 내고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 서울신은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학부모, 후배들과 함께 일구었던 혁신학교 이야기를 카페 등에 기록해 놓은 글과 사진, 생각을 더듬어서 ‘김광철의 한국 교육의 혁신 이야기’연재를 통하여 정리하려고 한다. 몇 회에 걸쳐 연재를 해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써 볼 참이다.

한국 교육은 어디를 향해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1주일에 2편 정도의 글을 통하여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혁신학교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나갈 것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외국 교육 이야기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혁신에 관심을 갖는 많은 분들의 성원과 질책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 서울신은초가 열리던 날 전교 각 학급은 나름대로 걸개그림들을 협동작품으로 그려 들고 학교 밖으로 나가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학교가 열림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때 필자가 맡고 있는 3학년 5반 아이들이 들고 있는 걸개그림은 'NO핵발전, YES 태양과 바람'이다. 가는 날부터 초록교육운동은 시작된 것이다.

한국 혁신학교 운동의 태동

경기도 200여 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경기희망교육연대의 단일 후보로 제14대 경기도 교육감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한국 교육은 혁신의 물꼬를 텄다. 진보진영이 내세운 김상곤 한신대 교수가 2009년 5월 제14대 경기도 교육감에 당선되면서 한국 교육은 이때부터 혁신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주요 선거운동 공약으로 당시 이명박 식 특권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공약인 것이다. 일제고사, 자립형사립고 확대 등 이른바 'MB 식 특권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공약을 내걸어 당선된 것이다. 무상 급식의 도입과 더불어 김상곤 교육감은 ‘혁신학교’ 운동의 톨풍을 일으키면서 한국 교육은 이때부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경기도의 김상곤 교육감에 이어 2010년 서울교육감에 선출된 곽노현 교육감의 ‘서울형 혁신학교’가 혁신학교 운동에 불을 지폈다. 그와 동시에 강원도의 ‘행복더하기학교’, 광주의 ‘빛고을혁신학교, 전남의 ’무지개학교‘, 전북의 ’전북혁신학교‘ 등 진보교육감들은 저마다 지역의 특성을 살려 혁신학교 운동을 발전시켜 나간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13개 시도에 진보교육감들이 진출하면서 혁신학교 운동은 저마다의 색깔을 내뿜으며 전국적인 교육 혁신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 2013뇬 1헉년을 담임할 때, 옥상 텃밭에 감자를 심고 하지에 아이들과 함께 수확하여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장면이다.

혁신학교 운동의 모태가 된 남한산초등학교

남한산초등학교는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도립공원 안에 있는 자그마한 학교다. 남한산초등학교는 2001년 학생 수 26명으로 폐교 위기를 맞았다. 당시 전교조 경기지부 정책실장으로 있던 서길원 선생에게 성남시 빈민가에서 공부방 운동을 하는 정채진 씨가 전화를 해 왔다. “남한산초등학교가 폐교 직전인데, 남한산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성남에서 전학을 오면 받아주겠다고 한다.” 콩나물시루 같은 도시 학교에 염증을 느끼던 도시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남한산초등학교로 전학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문제는 “좋은 선생님들을 추천해 주시고 함께 와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추진위원회는 신청자 가운데 남한산초등학교와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전입생을 선정했다. 2000년 12월과 2001년 2월 두 번에 걸쳐서 50여 명의 학생을 전학하게 하고, 3월에는 20명의 신입생을 입학하게 했다. 이 아이들 중에는 기존 학교에서 부적응 아이가 20%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은 서길원 선생이 쓴 글 중 일부이다.

『이들은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에 이르기까지 이십여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전학생 선정 기준과 방법, 새로운 학교의 프로그램, 새 학교에서 학부모의 역할과 위상, 적임 교사 초빙, 통학버스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밖에도 이들은 이 학교에 새로 부임하게 될 교사들과 함께 새로운 학교 만들기 공동 연수를 진행하고, 교육활동 우수학교를 견학하기도 하였으며, 2001년 2월에는 교사들과 함께 그동안 방치되어있었던 학교 시설과 환경을 다시 정비하였다. 당시 학교 준비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안순억 선생은 그 때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아직도 선명히 회상한다. 2000년 11월 19일 스산한 늦가을의 일요일, 그날은 입학 예정 학부모 전원에게 우리 학교의 향후 교육방향에 대해 내가 발제를 하던 날이었다. 학습관을 꽉 메운 학부모들은 숨을 죽이며 내 어설픈 그림을 경청했고, 이어진 토론에서는 학교교육 전반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새 학교에 대한 기대가 거침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막연히 머릿속에만 있던 교육주체들의 새로운 교육에 대한 갈망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서둘러 함께 할 교사들을 찾아 나섰다. 동화를 쓰는 김영주 선생님이 흔쾌히 동참해주었고, 최지혜 선생님이 합류해주었으며, 전교조 경기지부 정책실장으로 근무 중이던 서길원 선생님이 2001년 1월 1일 자로 근무가 만료되어 우리 학교에 먼저 부임하게 되었다. 남한산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선생님 세 분 중 한 분은 전근을 가셨지만, 나머지 두 분은 우리보다 더 깊은 교육적 열정과 힘을 지닌 분들이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남한산초등학교에서는 그 동안의 준비 과정, 추구하는 학교상, 학교 운영 방안, 인사 및 시설 개선 요구 사항을 담은 “새로운 학교, 남한산초등학교를 만들기 위한 기초 계획서”를 광주시 교육청에 공문으로 발송하고, 여러 교육계 인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교육청으로부터 유치원 교사를 포함하여 남한산에 지원했던 교사 네 명이 순조롭게 발령을 받고 교감, 행정실장과 교사 한 명을 추가로 배정받았다. 이렇게 해서 남한산초등학교는 2001년 3월에 6개 학년 6학급 학생 103명, 교사 7명, 교장과 교감 각 1명, 유치원 교사 1명, 행정실장 1명, 기사 1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줄세우기 교육에 지친 학부모와 교사들의 노력으로 학교 개혁 운동의 상징으로 다시 섰다. 경쟁과 효율 우선의 과밀 학교가 싫은 학부모들, 관료주의적인 학교 문화에 고립된 교사들, 행복하지 않은 기존 학교의 틀에 문제점을 느낀 교육의 주체들이 스스로 뜻을 모으고 팔을 걷었다. 이 책은 2000년부터 지금까지, 초등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고민의 기록이자, 오늘도 진행 중인 참교육에 대한 성찰의 현장이다.

▲ 2013년 어린이날을 전후하여 열렸던 민속놀이 한마당 행사

초등 공교육의 새 길을 모색하다

입시 중심 경쟁과 대학 서열화로 인한 공교육의 파행이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너머 초등교육까지 점령한 지 오래다. 성적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사회와 학교 환경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아파한다. 현란한 사교육이 아이들의 시간을 점령하고, 수많은 학부모와 아이들이 더 나은 교육을 찾아 대안학교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대안학교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다. 공교육의 정상화는 교육 수요자 모두의 열망이자, 사회 문제 전반의 저변을 아우르는 시급한 과제이다.

천천히 한 자씩, 남한산이 써 내려간 한 편의 이야기

책 속에는 동화작가이자 남한산초등학교 교장인 김영주와 함께 학교를 일구어 온 교사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80분 수업 30분 휴식이라는 파격적인 형식을 도입하고, 교과 수업 이외의 생태, 체험 교육 들을 학교 안으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가시적인 성과도 여럿 있었지만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의 순간도 있었다. 교사들의 이야기는 이 모든 과정에 대한 남한산 내부의 평가와 성찰, 이어지는 고민의 방향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어지러운 발자국이기에, 그 걸음으로 다져진 길이 더욱 단단하다. 』

폐교 직전까지 몰렸던 남한산초등학교가 경기도 혁신학교로 지정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 학교에서 했던 교육이 경기도를 넘어 전국 초등학교의 롤모델이 되어 이후 서울 등 전국 각지의 진보교육감이 당선된 지역에서는 남한산초등학교 교육을 벤치마킹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후 서길원 선생은 성남의 보평초등학교 초빙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혁신학교로 지정을 받고, 더욱 혁신학교 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조현초등학교는 이중현 전교조 전 경기지부장을 초빙교장으로 맞이해서 조현초 혁신학교를 열었고,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장곡중학교와 용인의 흥덕고등학교가 경기도에서는 널리 알려진 혁신학교들이다.

경쟁 없는 학교, 두려움 없는 아이들, 남한산 너른 품에서 배우고 또 자라다

남한산초등학교는 2009년 경기도교육청에 의해 혁신학교로 지정되었다. 혁신학교 정책은 자발성, 공공성, 지역성, 창의성을 지향하며 교과과정 편성과 학교 운영의 자율권을 확대하여 공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도입된 제도이다. 학부모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어서 작은 학교에 신입생이 몰려들고, 혁신학교 주변 지역의 전세 값이 갑자기 치솟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문제의식이 이토록 심각함을 방증한다.

상장 없는 학교, 벌점 없는 학교, 운동장 조회와 일제식 시험이 없고 숫자로 아이들을 부르지 않는 학교. 그동안 이런저런 매체에 비친 남한산초등학교의 모습은 과연 이상적으로 보인다. 여전히 작은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로부터 전입과 입학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교육의 틀 안에서 길을 찾으며, 학교와 교사, 학부모와 학생 모두가 건강하게 소통할 수 있기까지의 과정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남한산초등학교의 행보가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교육의 주체 스스로가 자신의 경험과 우리 교육의 현실 속에서 답을 찾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교육 실험과 시행착오, 관계로부터 오는 갈등과 극복. 멈춤과 진일보의 순간은 오늘도 교차하며 쌓여 간다.

▲ 2014년 봄, 필자가 서울신은초에서 1학년 담임을 할 때 아이들과 함께 진달래 화전을 부쳐 먹는 모습, 몇몇 어머니들의 도움을 받고 화전만들기를 진행하였다. 혁신학교에서는 이와 같이 주변 모든 자연이 학습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진보의 깃발을 단 서울 곽노현 교육감호가 출범하다

1910년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교육감에 당선된 곽노현 서울 교육감은 ‘서울형 혁신학교’ 정책을 펴면서 2011년 3월부터 서울형 혁신학교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서울 초등에서는 서울강명초등학교, 서울은빛초등학교 등 막 입주가 시작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에 있는 학교들이 지정이 되었다. 그 외에도 서울 초등에서는 유일하게 공모교장으로 선정된 서울상원초등학교도 그들 중의 하나이고 도봉산 밑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학교 서울도봉초도 혁신학교였다.

그런가 하면 2011년 하반기에 개교를 하는 서울 양천구에 있는 이피엔 하우스 단지 내의 서울신은초등학교와 구로구 천왕동 신축 아파트 단지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천왕초등학교는 9월 1일 자로 교직원들을 받아서 혁신학교 개교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당시 양천구에 있는 ‘서울서정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전교조 서울강서초등지회 소속이었다. 나는 해직교사 출신으로 전교조 서울초등지회장과 전교조 전국초등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던 터라, 서울지역 전교조의 유명 활동가들은 대부분 나를 알고 있었다. 이미 전교조 서울지부장 선거에 나가기도 했기 때문에 소위 지명도가 조금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형 혁신학교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이기 때문에 첫 단추를 잘 꿰고, 혁신학교 바람을 일으켜야 하는 혁신학교 운동의 진앙지 같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기존 교육을 크게 흔들어 놓고, 혁신학교 운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갈 때 해방 이후 60여 년 동안 굳을 대로 굳어 있는 학교 현장에 혁신의 강한 지진을 일으켜야 한다는 열망이 진보 교육운동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신학교에 들어가 혁신학교 운동의 키를 잡고 키잡이 노릇을 잘 해야 할 유능한 조타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서울상원초등학교야 전교조 정책실장을 역임했던 이용환 교장이 있고, 서울강명초에는 이부영 선생이 있고, 서울은빛초에는 전교조 초등위원장을 역임했던 정기훈 선생 등이 있어서 나름대로 다들 한 역할을 할 교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 2016년 7월 어느날, 필자가 정년을 앞두고 마지막 과학수업을 하고 학생들과 함께 과학실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서울신은초에도 그런 교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곽노현 교육감 인수위에서 활동을 했던 이모 선생한테서 연락이 왔다. “김광철 선생이 강서지역 후배들을 모아서 혁신 신은초로 가서 신은초를 이끄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신은초로 가면 그곳에서 정년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고, 전국적으로 혁신학교 바람이 불어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고, 교직의 마지막을 혁신학교에서 불꽃을 피우고 마무리하고자 하는 의욕 또한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 길을 가기로 작정을 하고 길을 찾기 시작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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