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8년 제주도에서 누님 첫돌 기념사진. 먼저 천국으로 가신 아버지는 누님을 무척 사랑하셨다.(출처 : 조옥희)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 모두 죽는다. 죽음은 이별의 가장 확실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나는 누님을 떠나보내지 못한다. 마음속엔 항상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누님의 부재를 의식할 때마다 가슴엔 슬픔이 고이고 멍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은 호수공원에 가서 한동안 앉아 있다 오고 또 어느 날엔 숲길을 걸으며 조용히 누님을 생각하기도 한다. 어제도 어스름 내리는 숲길을 걸으며 누님을 생각했다. 나뭇잎 가지 사이로 푸르르 날아오르는 새가 나를 반기는 누님 같고 풀벌레 소리들이 나를 위로하는 누님의 소리 같다.

나와 누님은 두 살 터울이다. 아직 천상으로 떠날 나이가 아니다. 슬픔은 그런 이유이리라. 아니, 그리움은 그런 이유이리라! 이민을 떠난 뒤 누님과 전화 통화를 몇 번하고 문자를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직접 만난 적은 두세 번 정도인 것 같다. 누님이 어쩌다 한국에 들어오셨을 때 잠깐 얼굴을 뵙곤 했으니까.

내가 슬프고 그립다고 할 때마다 아내는 “누님이 미국에 살아계신다고 믿고 살아가라”고 위로한다. 그 말이 더러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쑥불쑥 돋는 그리움과 슬픔은 어찌할 수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누님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대학생이 되어 커서도 엄마 대신 누님이 나를 뒷바라지 해주셨다. 내가 결혼하기 전 청년 시절에도 누님 신혼집에 함께 살았다. 내가 서른이 다 돼 갈 때까지 누님이 해준 밥을 먹고 어린 조카들이 자라는 걸 보면서 함께 살았다.

80년대 말 결혼을 하고 누님 집 가까운 곳으로 독립해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도 아내와 함께 어린 아이들이 하나둘 생겨 사랑스런 가정을 이루었다. 우리 가족은 가끔씩 누님네 가족과 만났다. 그럴 때마다 어린 자녀들은 조카들과 놀이터에서 웃으며 놀곤 했다. 그 정겨운 풍경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오래 남아 있다.

89년 전교조 해직교사가 되어 출근투쟁을 하던 어느 날 나는 굳게 잠긴 학교 교문 앞에서 동료 해직교사들과 연좌 농성을 하고 있었다. 극성스러운 부모들이 그때마다 와서 설득 반 위협 반 겁을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엔 경찰차에 강제로 태워져 경찰서로 연행된 적도 있었다.

그런 날들의 연속이던 어느 날 나는 극성스러운 학부모들로부터 옷이 찢기고 할퀴면서 강제로 또다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찰서 유치장엔 <폭력>이라고 적혀 있었다. 맞기는 내가 맞았는데 <폭력>혐의라니... 일방적으로 할퀴고 때리며 입었던 겉옷마저 찢어졌는데 내가 폭행범이 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풀려나 울면서 길을 걸었다. 누님 집까지 오는 내내 울었던 것 같다.

누님 집에 도착해서 찢긴 옷을 보고 내 얼굴 표정을 보신 누님이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동생을 지지한다는 힘찬 응원도 잊지 않으셨다. 그날 누님의 따뜻함과 위로를 잊지 못한다.

누님은 지방 국립대 사범대에서 불어교육을 공부했다. 당시 제2외국어는 발령 적체였는데 89년 전교조 해직교사가 1,500명 넘게 나오자 기다렸던 불어교사 발령이 났다. 누님은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부산 영도 부모님 집으로 내려왔다. 그 당시 누님은 매우 미안해 하셨다. 쫓겨난 전교조 해직교사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 90년대 초 영도여고 교사 시절 천사같던 누님의 모습(출처 : 이혜승, 이희승)
전교조 교사였던 동생보다 학생들을 더욱더 사랑했고 어린 영혼들을 순전한 마음으로 돌보았다.

누님은 영도여고에 다니면서 진심으로 학생들을 사랑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앙인으로서 이웃사랑과 봉사를 몸소 실천했다. 어린 큰 조카가 91년 동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일이다.

학급 아이들 가운데 아빠가 버스기사였던 아이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으로 그 아이는 아침을 먹고 오질 못했다. 누님은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고 하셨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초등학교에 보냈다. 둘째 조카 역시 92년 동삼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도시락을 네 개씩 싸서 초등학교에 보내주었다. 그리곤 후다닥 아침을 드시고 영도여고로 출근을 하셨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나고 누님은 서울로 이사 오셨다. 경기도 광명북고로 발령이 났다. 당시 누님은 광명시에서 가까운 목동에 사셨는데 목동성당을 다니셨다. 90년대 중반 누님은 재활용 분리수거를 생활화하며 환경운동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였다. 목동성당 청소년 환경동아리를 지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명상고(광명 경영정보고) 재직 시엔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점심시간에 아버지를 만난다고 담임교사인 누님에게 외출을 허락받으러 찾아왔다. 누님은 "잠깐 얼굴만 보지 말고 아빠하고 점심도 같이하고 천천히 들어오라"고 넉넉히 허락했다.

누님의 그 자그마한 배려가 그 아이에겐 굉장히 크게 다가온 듯했다. 그 아이는 이혼한 아빠 얼굴을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것 같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아이는 학급생활에서 어두운 기색이 사라지고 밝게 생활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아이는 나중에 유명 항공사를 홍보하는 모델로 성장했고 연예인이 되어 유명 탤런트와 2003년 결혼했다. 누님이 미국 이민을 떠나던 그 해 누님은 연예인이 된 그 제자의 결혼식 초대를 받았다. 누님은 결혼식을 보고 며칠 뒤로 미룬 미국 이민을 떠났다. 결혼식에 꼭 와달라는 그 제자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이민 생활 도중 그 제자가 미국으로 찾아와 반갑게 누님과 해후했다고 전해 들었다. 누님은 매사에 배려심과 이해심이 깊었다. 교사로서도 소외된 아이들에 대해 항상 인자하고 너그럽게 품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채...

올해 설날 연휴 기간 미국 누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설날 형제들이 부산 영도 어머니 집에 모두 모였기에 매년 미국에선 전화가 오곤 했다. 그러나 이날 전화는 특별했다. 누님은 어머니를 비롯해 한 사람씩 통화를 했다. 지상에서 마지막을 예고하는 통화였다.

누님이 나에겐 “동생이 지고 있는 고통을 다 품에 안고 가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안 그래도 투병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잠을 두세 시간도 주무시지 못했을 텐데 투병 와중에 동생이 안고 있는 고통을 모두 짊어지고 가시겠다니... 그리곤 두 달도 채 안 되어 누님은 천국으로 떠났다. 동생의 고통조차 다 떠안고 떠난 누님께 해드린 것 하나 없는데 그저 한없이 미안했다.

누님이 세상과 이별한 직후 막내 조카는 엄마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논쟁의 와중에 대부분 나의 처지에서 나를 지지해 주셨어요. 엄마는 투병 중에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결코 쉬지 않았고 열심히 사셨어요. 엄마는 나에게 태양이었어요.”

▲ 올해 3월 초 세상과 작별하기 10일 전 호스피스병동에서 누님네 가족이 함께한 모습(출처 : 이정임)

누님이 천국에 가시고 며칠 뒤 둘째 조카의 꿈속에 누님이 환한 얼굴로 그리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전해 들었다. 문득문득 누님의 부재에서 오는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의 감정들로 힘든 시간들이었는데 둘째 조카의 꿈 이야기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하면 누님은 죽은 게 아니다. 둘째 조카의 기도에 응답하셨듯이 누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영원히 살아 계시는데 내가 현상의 부재를, 누님의 부재에 너무 집착한 탓이다. 집착은 고통을 낳는 법! 누님이 못 다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다시 만나는 그날에 누님께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살아서 못 다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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