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절하와 절상의 간극!

                                                                                            필명   김  자현

60년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았던 언니가 대입시를 앞두고의 일이다. 서울 명문고를 다녔던 언니는 프라이드가 하늘을 찔렀다. 어린 꼬마인 나도 집 안 분위기에 의해 서울대 아닌 곳은 학교도 아닌 줄 알고 자라는 중이었다. 인간에게도 우생학을 적용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발설을 마구 하던 날들이었으니 지금도 간담이 서늘하다.

1940년대 8.15 해방 전에 결혼식을 올리신 필자의 부모 . 
1940년대 8.15 해방 전에 결혼식을 올리신 필자의 부모 .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일억 환 정도의 예치금을 갖고 계시던 아버지는 아이디어가 속출하는 분이었다. 지금 환산하면 대체 얼마나 되는 돈일까. 가히 50억은 넘는 액수라던데 잘은 모르겠다. 자본금이 넉넉하다는 생각에 사업을 시작하셨으나 공직에만 계시던 분이라 손을 대는 것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세계정세에 대한 분석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었으니 그의 머리에 뭔가 번뜩이고 나면 사업을 벌이곤 하셨다. 앞서가는 아이디어였으나 이것이 회자 되고 경제로 환원되는 데는 일정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과 같은 광속의 시대에도 시의적절이라는 말이 있다. 속공이 날아올 때 안타를 쳐야 하는데 아버지의 뱃트는 늘 먼저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사업으로 마카로니 기계를 이태리에서 직수입해 공장 가동이 내일로 다가왔다.

실패만을 구경하고 있었던 나는 아버지보다 더 불안한 나날 속에서 불안심리 기제로 뭉쳐진 인간으로 자랐다. 거리를 지나다 신장개업이라고 써 붙인 가게나 상점, 영업장을 만나면 나는 지금도 불안이 치민다. 생판 모르는 남의 사업장이라도 실패하면 어쩌나 잠이 안 오는 지경이라 주로 이런 집들을 애용한다.

 

다음 날 오후에 들어오신 아버지의 안색은 거의 시체와 다름없었다. 공장 한쪽이 뜯겨져 나가고 공장장으로 지목했던 사람은 소식이 끊기고 가동을 기다리고 있던 마카로니 기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마지막 모든 자금, 그리고 빚도 얻어 수입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빚만을 떠안은 채 우리는 거리로 나앉을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 시작한 사업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중에 언니에게 들은 얘기로는 처음 사업을 시작하셨을 때는 날마다 현금을 사과 궤짝으로 들여오시던 날도 있었지만 아버님은 늘 사기와 권모술수에 넘어가는 분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거짓을 말한다거나 사기를 칠 수도 있다는 것 자체가 아예 사전에 없었던 분이다.

일제 강점기 때 모두 빼앗기고 한국동란으로 발가벗긴 국민은 염치도 체면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 눈이 새빨갛던 시기다. 등치며 배만지고, 눈 감으면 코도 베간다는 문장이 세간에 쇄도하던 시기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설마가 사람 잡고 등잔 밑이 어둡던 시절, 어느 날이었다. 사장실에서 들으니 사무실이 시끄럽더라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나가보니 웬 건장한 헌병 하나가 직원 한 명을 붙들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멱살 잡힌 놈이 한 고향 친구인데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보니 친구 놈이 자신의 아내를 겁탈했더라는 것이다. 몇 년이고 전국을 뒤져 수소문 끝에 놈을 잡아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라였던 것이다, 아버님은 역시 기지를 발휘하셔서 이왕 지나간 일, 살인자라는 오명으로 살아가기보다 내가 보상을 할 것이니 우리 직원을 살려달라! 천만 환이면 되겠느냐! 억만금인들 분이 풀릴까마는 어쩌겠는가! 결국은 2,500만 환으로 낙착이 되어 헌병은 그를 놔주고 떠나갔다.

그런데 2,500만 환으로 살아난 그자는 그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회삿돈을 모조리 가로채어 도주해버렸다, 는 것이다. 몇 년 후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가 시내를 지나다 우연히 그 사람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버지를 알아보고는 인사도 없이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현대사에 획을 그을만한 재벌로 컸다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가 세간에 회자 될 때마다 주무시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셨다.

평가 절상은 쉽지만 대개의 경우 평가절하는 쉽지 않다. 평가절하를 절대 하지 못하시던 아버지로 인해 그때부터 극심한 가난이 시작되었다. 소문을 들은 예전의 지인들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들어 왔지만 아버지는 끝내 응하지 않으셨다.

‘오늘이 중요한 것이지 않은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돈이 없으면 아이들을 공장에나 보내지 무슨 양광스럽게 교육이고 학교냐.’

가세가 번창할 때는 우리 집에 와 기거하고 조석을 해결하던 친인척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던 날들이다. 떨어진 가죽신을 신고 아버지는 백방으로 일거리를 찾아 헤매었으나 산업화 이전이라서 그에게 맞는 일터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등록금을 도저히 구하지 못한 언니와 아버지, 두 부녀가 부둥켜안고 우는 것을 보았다.

어제는 지하철역 근처 개울가를 지나는데 길게 늘어놓은 좌판이 보인다. 억신풀로 짠 동그란 둥우리에는 약재들이 들어있다. 당귀, 녹각, 헛개열매, 구기자 오미자 등! 길가에 늘어서 있는 열 개도 넘는 장사진을 보며 걷는데 한 둥우리에는 말린 국화가 수북하게 들어있다. ‘이거 차 끓여 먹는 그 소국이에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기다란 얼굴이 모자 속에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저녁때도 여기 계시죠? 이따 돌아오다가 들를게요.’

언덕을 올라오자 지나다니는 행인들도 부쩍 줄어든 코로나 시대를, 그는 다리 난간에도 옷을 걸고 우울한 세기를 건너고 있었다. 그에게는 몇 남매나 되는 아이들이 자라고 있을까. 다리를 건너는데 울컥울컥 가슴에 뜨거운 것이 넘어가 간신히 참고 지하철을 탄다.

그 옛날 도저히 평가절하를 못하여 많지도 않은 가족을 판판히 굶기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와중에도 참기름 바른 굴비가 없으면 조석을 건너뛰던 우리 집 조모도 떠올랐다. 이 황량한 겨울에 제 가게도 없어 남루한 좌판을 벌이고 소국을 팔고 있는 저 건강한 아비를 둔 아이들은 내가 자라던 날들, 우리 남매들보다는 희망을 말하며 살고 있겠지!

이런저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조선일보 앞에서 조동 폐간을 외치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화려한 롯데 본점 앞에서 사진을 박는다. 수천수만 개 꼬마전구들이 가로수니 정원수에 몸을 휘감고 사라져 가는 경자년에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우울을 덜어서 좋기는 하나 도심 곳곳이 불야성이니 전기를 이렇게 낭비해도 되나. 발전할 기름도 없다는 우리 북녘은 이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을까.

사치스럽다 못해 요사스러운 서울 거리와 건강한 아비가 벌인 좌판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뇌리를 스친다. 부지런히 귀가해야지. 말린 국화를 팔려고 그 쓸쓸한 좌판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못 다 팔은 그 묵직한 근심을 한 근이라도 덜어줘야지. 우리 집에 오시면 올겨울은 누구든 따끈한 국화차 한 잔으로 손님을 맞아야지!!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김승원 주주통신원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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