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태어나서 딩굴딩굴 4세까지

예전에 곽노현씨가 교육감이 되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회 균등이다. 공교육은 한 명도 포기해선 안 된다. 설령 가정과 부모가 포기했어도 공교육은  학생을 포기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총체적 돌봄의 학교가 돼야 한다.”

정말 이런 교육이 실현될 수 있을까?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나는 곽노현씨를 ‘나라를 구한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공교육은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따라서 많은 아이들이 스스로 또는 강압에 의해 공교육 현장을 떠났거나 학교에 남아있는 상당수 아이들도 공교육을 빈껍데기로 여겼다.

아들도 중 3 때 한국의 공교육현장을 떠났다. 고등학교 진학을 강력히 거부했기에 대안을 찾아야만 했다. 그 당시 실패할 수도 있는 큰 모험을 택했지만 다행히 아들은 자신을 ‘수렁에서 건진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새 환경에서 살아남았다.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 이야기를 풀어가자면. 어린 시절부터 아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다. 좋게 말해 남들과 다른 아들, 늦게 틔는 아들, 좀 박하게 말하면 다른 아이보다 처지는 아들, '돌아이'라는 소리도 들은 아이다.

순둥이 아들 세상 살아남기 1

아들은 느렸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느렸다. 파르륵하는 성질을 가진 제 누나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리 불쑥 저리 불쑥 활발하게 움직였다. 힘도 좋아서 배가 불쑥 튀어나오게 발을 뻗은 적도 있다. 하지만 아들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고 조심스러웠다. 의사 선생님이 딸이라는 암시 비슷한 말을 해주어 아주 얌전한 여자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뱃속에서 나올 때도 느렸다. 딸은 의사선생님이 아직 멀었다고 좀 진통을 겪으면서 분만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 선생님 식사 하러 간 사이를 못 참고 나왔다. 분만대기실에서 내가 간호사 부르고 치다꺼리 해가면서 낳았는데 어찌나 힘차게 밀고 나오는지 의사도 오기 전에 혼자 낳을 뻔 했었다. 아이 낳는 것이 뭐가 힘들다고 그러지?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할 정도로 아주 쉽게 낳았다.

아들은 금방 나올 것 같다고 대기실에서 분만실로 급히 옮겼건만, 30분 끌다가 내 힘 다 빼고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얼굴에 핏줄 다 터지게 만들어 놓고 나왔다. 뱃속이 너무 좋아 나오기 싫었던 걸까? 아님 세월아 네월아 하는 성격 때문일까?

이렇게 세상을 천천히 구경 나온 아들은 잘 울지도 않고 별 요구사항도 없었다. 2시간 간격으로 우유를 달라고 빽빽거려 우유병을 물려주면 조금 먹고는 톡 뱉어놓아 밤잠을 날려버리는 제 누나에 비해, 저녁에 우유 한 병을 깨끗이 쭉 먹으면 아침까지 잤다. 칭얼대는 것도 없었다.

3-4개월 시절, 놀 때를 생각해 보면, 딸과 아들의 차이는 극명했다. 그 정도 개월 때는 누어서 손을 움직이고 눈이 그 손을 따라가면서 논다. 딸은 누워서 손을 움직이는데, 주먹에 힘을 꽉 주고 빠르고 강하게 움직이면서 눈도 집요하게 손을 따라 갔다. 반면에 아들은 손에 힘도 없이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움직였고, 눈도 따라 가는 건지 마는 건지 힘이 하나도 없이 놀았다. 기기 시작할 때도 딸은 온 방이며 마루를 비호같이 쓸고 다니며 기었다. 마치 전투를 하는 아이처럼 결사적으로 기어 다녔다. 아들은? 그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다는 듯 슬렁슬렁 기어 다녔다. 별로 기고 싶은 욕구가 없는 아이처럼 거북이 기어가듯 꿈틀꿈틀 거렸다고나 할까?

좀 더 커서도 마찬가지다. 딸은 포르륵 포르륵,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요리조리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나가곤 해서 많이 넘어져 꿰맨 곳도 제법 있고 얼굴에 상처도 많다. 자기주장도 강했고 요구 사항이 많았다. 늘 같이 놀자고 나를 달달 볶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졸음이 쏟아져도 책 몇 권씩을 읽어줘야 잠이 들었다. 그림 맞추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시합을 해서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 궁금한 것이 많아 늘 대화를 했기에 언어발달도 빨랐다. 말로 따지기도 명수여서 4-5살 때도 제 삼촌이 말로는 못 당한다는 소리까지 했다.

아들은 정 반대였다. 그저 배고프지 않고, 졸리지만 않으면 해달라는 것이 없었다. 주로 혼자 딩굴딩굴 하면서 노는데, 하루 종일 말 몇 마디 안했다. 내가 누워 책을 보면 내 몸 위에 저도 누워 말보다는 몸으로 치대면서 놀았다. 하도 말을 안 해서 걱정이 되어 붙잡아 놓고 이런 저런 말을 걸어 보면 금방 딴청을 하곤 또 혼자 놀았다.

▲ 11개월 때. 아들을 키워주신 아주머니가 찍어 주심

이렇게 느린 아들은 성격도 순했다. 그래서 아들의 별명은 ‘순둥이’였다. 나는 늘 아들을 ‘우리 순둥이’라고 불렀다. 직장을 다녔던 나는 아들이 세 살 될 때까지 동네 아주머니에게 맡겼는데, 그 아줌마도 울 아들을 ‘순하고 잘 웃는다.’고 많이 예뻐해 주셨다. 아들은 그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엄마, 아빠만큼이나 무척 좋아했다.

그렇게 세 살까지 개별보육을 끝내고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고, 어린이집에서 받아주어 갔다. 보육비를 아끼기 위해 첫 집단생활을 시작한 거다. 아침이면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었는데 아들은 한동안 헤어질 때마다 서럽게 울어 애를 먹었다. 원래 겁이 많은 아이라서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했겠지만 이때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다. 자신을 길러준 아줌마, 아저씨와의 이별에 대한 슬픔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가 받았을 정서적 충격을 눈치를 채고도,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방패삼아 모른 척 한 것이다. 나는 직장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우는 아이를 냉정하게 떼어놓고 일터로 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고 엄마 자질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한 달 정도 지나자 아들은 적응을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침마다 우는 아들을 특별히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가면 아들과 선생님은 다정하게 나란히 앉아 손을 꼭 잡고는 TV를 보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얼굴에서 아들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아들의 별명이 ‘천사’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해주셨다. 요새 아이들 같지 않게 악착같지도 않고, 요구사항도 없고, 친구들이 달라면 놀던 장난감도 다 주고, 아이들이 건드려도 그냥 눈만 껌북껌북 할 뿐 대응하지 않는다고 ‘천사’라고 했다. 천사.... 과연 좋은 별명일까?

▲ 어린이집 졸업사진. 오른편이 늘 아들의 손을 잡아주고 계셨던 선생님

 

<계속>

편집 : 이동구 에디터

김미경 부에디터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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