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가기로 결정하다

낮잠을 자고 나서, 자는 아들을 내려다보며 선생님 말씀을 곱씹어 보았다. 아들이 어느 정도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발달장애’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머리속이 좀 어수선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끝도 없이 돌고 돌았다.

젊은 선생이 아직 아이들 경험이 없어서 섣부르게 생각한 것일 거야. 정신과에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되면 계속 들여놓게 된다는데 아들은 정신과에 갈 정도는 아니지. 지금 유치원 교육과정과 잘 맞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들에게 특수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 건가? 아니면 아들 하나로 인해 수업진행이 힘드니까 다른 유치원으로 전학하길 원하는 건가? 아침마다 아들이 유치원 앞에서 우는 것이 오후에 무서운 형과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수업시간이 정말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혹시 그런 아들을 선생님이 은근히 눈치주고 구박한 것은 아닌가?

엄마가 하루 종일 옆에 있어 그저 행복한 아들에게 유치원에서의 일을 한마디도 묻지 못했다. 왜 묻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들의 그런 모습이 다 내 잘못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랬지 않았나 싶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아이들을 거의 방임하다시피 양육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가벼운 '아동학대'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남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남편도 속으로는 좀 놀랐을 테지만, 언제나 여유만만 무심고수인지라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들의 그런 특성을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아들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좀 다른 것 아니냐고 했다. 어린 선생이 경험이 부족해서 아직 뭘 몰라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수업시간에 막 돌아다닌 행동은 처음 있는 행동이니까 엄마가 와서 흥분해서 그럴 수 있는 거고, ‘안헬로~’에 대해서는 수업방해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다. “울 아들이 은근히 웃기는 재주가 있네.”라고 했다. 재미있다고 몇 번을 다시 말해보라고 하며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 이 참에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에 한 1-2년 나가보자고 했다.

당시 남편은 교환연구원으로 미국에 1~2년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었다. 그러려면 나는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나는 내 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14년 만에 재개한 공부도 2년 안에 마무리해야할 처지였다. 나는 절대로 갈 수 없으니 혼자 다녀오라고 했고, 남편은 혼자는 절대로 못 간다고 하며 서로 팽팽히 대립하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마침 뉴욕의 모 대학에서 굉장히 선도적인 연구를 하는 교수가 자신의 교환연구원 신청을 받아들였다며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라서 꼭 가고 싶다고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시간을 충분히 갖고 아들을 더 자세히 지켜보고, 정말 문제가 있는지 판단하자고 했다. 남들은 영어 때문에라도 가고 싶어서 난리인데, 내가 일과 공부에 욕심이 많아, 아이들에게 다른 교육 기회를 주지 않는 것처럼 몰고 갔다. 현재 우리 아이들이 정말 제대로 보호 받으며 자라고 있는 건지 의문을 가져 보자고 했다.

사실 이 점에서 나는 찔리는 것이 많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딸에게 방과 후 혼자 있도록 한 것을 넘어서 ‘동생을 유치원에 데려다 줘라.’ ‘엄마가 늦으니까 데리고 와서 돌보고 있어라.’ 등 엄마의 역할까지 떠맡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딸의 일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동생

혼자 동생을 돌봤다. 배고프다고 잉잉 울면 달래주면서 우유를 주었다. 내가 숙제를 하면 숙제하지 말라고 잉잉 울었다. 점점 화가 나서 동생을 때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 동생이 하나뿐인데 어떻게 때릴 수 있나? 꾹 참고 달래줬다. 아빠가 오셨다. 아빠가 계셔서 편한 걸 알았다.(1995년 11월 1일)

나의 마음

친구와 같이 놀았다. 많이 놀다보니 동생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더 놀고 싶고 친구도 우리 집에서 더 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을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일이 안 끝났다. 할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왔다. 동생을 데리고 와서 생각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안 데리고 오면 동생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내 동생이 말을 잘 안 들어도 나는 동생을 귀여워해줄 거다. 사랑해줄 거다. 나는 동생이 크면 더 잘해주고 동생이 잘한 게 있으면 칭찬해주고 안 좋은 일을 하면 타일러 줄 거다.(1996년 5월 1일)

욱아 울지 마

오늘 욱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줘야 해서 아침 8시에 집에서 떠났다. 욱이가 엄마가 데려다 달라고 울자 나는 화가 났다. 욱이는 내가 학교에 늦게 가면 안 되는 데도 계속 엄마 보고 싶어 울었다. 나는 화가 나 고함을 질렀다. 욱이는 울면서 나를 따라왔다. 욱이를 잘 타이르면서 가니 울지 않았다. 웃는 욱이가 너무 귀여웠다. 나는 “욱아 사랑한다.”고 마음속으로 외쳤다.(1996년 9월 12일)

엄마가 늦게 옴

엄마가 늦게 왔다. 나는 욱이랑 같이 엄마를 기다렸다.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보니 엄마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엄마에게 왜 늦게 왔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엄마가 다 말해주었다.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엄마 제가 소리를 질러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엄마 이제 마음 놓고 공부하세요. 제가 있잖아요.(1996년 11월 22일)

엄마 가지 마

내일 일요일인데도 엄마는 회사에 가야했다. 엄마에게 내일 어디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장롱에 들어가서 엉엉 울었다. 엄마는 나를 꺼내어 안아주었다. 너무 좋았지만 내일 회사에 안 나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아서 내 입이 찢어질 텐데...(1997년 4월 12일)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인 1995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무려 2년 반 동안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를 맡겼다. 이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내 일에 정신이 팔려 애써 모른 척했다. 친정엄마 등 주변 사람들은 과도한 내 욕심을 지적하며 이렇게 아이들을 내버려두면 안된다고 했지만, 내 아이들은 그래도 잘 클 거라고 오만하게 생각했다. 아들의 문제가 불거지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인정하면서도 아끼는 직장과 다시 시작한 공부를 내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한 달간의 고민 끝에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 해 7월 남편은 자리를 잡는다며 먼저 미국으로 떠났고, 8월 나는 어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들이, 아직은 한국어도 썩 잘하지 못하는 아들이, 영어라곤 헬로 밖에 모르는 아들이 과연 생소한 교육에 적응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도 자폐증 운운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나는 내 아들을 믿어 보련다.' 라는 배짱으로 케네디 공항에 불안한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나중 이야기 : 유치원에서 그 일이 있은 후 18년이 지나서야 수업방해 행동에 대해 아들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은 그 일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평소에 유치원 선생님에게 상당한 제지를 당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 엄마가 왔고 큰 빽이 있으니 선생님이 자신을 제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하고 싶은 대로 했을 거라고 했다. 마지막 말은 이랬다. “한마디로 선생님에게 복수한 거지.” 하하하.. 순둥인 줄만 알았는데.....

<다음에 계속>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부에디터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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