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액 - 서하와 실크로드

2. 장액 - 서하와 실크로드

서녕을 떠나 동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해발 3790여 미터에 이르는 높은 터널을 통과한다. 기련산맥의 일부를 이루는 대판산(大板山) 터널이다. 터널을 넘어가면 100리에 걸쳐 유채꽃이 바다를 이루고 있다는 백리유채화해(百里油菜花海)를 지나게 된다. 아쉽게도 우리가 이곳은 지나던 8월 3일은 이미 유채꽃의 전성기가 지난 때라 황금빛 들판을 볼 수는 없었다.

기련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가면 하서주랑이 펼쳐진다. 하서주랑(河西走廊)이란 ‘황하 서쪽의 긴 복도’라는 뜻인데, 실제로 달려보면 왜 복도라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련산맥 동쪽 기슭을 따라 청해성과 감숙성 사이를 달리는데 폭이 5~10킬로미터에 이르기 때문이다. 서남쪽으로는 험준한 기련산맥이 여름에도 눈 쌓인 산정이 보일 정도의 위용을 자랑하고 그 기슭에서는 양떼와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노닌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북쪽으로 저 멀리 고비사막이 나타나는데, 그 사막 너머가 옛날에 막북(漠北)이라 불리던 몽골이다. ‘고비’는 몽골어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라는 뜻으로, 아예 모래로 뒤덮인 ‘사막’과는 구별해서 쓰인다고 한다. 그러니까 몽골인에게 호양나무, 홍류나무 따위 키 작은 초목이라도 드문드문 나 있는 거친 초원은 사막이 아니라 고비인 셈이다.

중국의 팔을 뻗다 

▲ 장액 가는 길

하서주랑은 난주와 무위 사이에 있는 오초령이라는 해발 3500미터 고갯길부터 돈황의 옥문관에 이르는 900킬로미터의 길이다. 돈황부터 시작되는 사막 길이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본편이라면, 하서주랑은 실크로드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이 이 길을 따라 영토를 넓히고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 한 무제 때의 일이며 그 선두에는 곽거병이 있었다.

중국의 영토가 황하를 중심으로 한 중원에 국한되어 있던 시기에 곽거병이 하서주랑을 따라 서북쪽으로 깊숙이 진출한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장액이다. 장액이라는 지명은 ‘장국지액 이통서역(张國臂掖, 以通西域)’이라는 당시의 말에서 유래했다. ‘나라의 팔을 뻗어 서역과 통하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한나라 때의 역사 지도를 보면 중원에 웅거한 한이 하서주랑 쪽으로 팔을 쭉 뻗은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편안하게 뻗은 팔이 아니었다. 하서주랑을 향해 뻗쳐 있던 흉노의 팔을 잘라내고서야 겨우 뻗을 수 있었던 팔이다. 이후 한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팔을 뻗어 타림 분지 일대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장액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해 ‘금장액(金張掖)’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훗날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이곳을 ‘칸피추’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소개했다. 그런 이유로 장액의 구식가(欧式街)에는 마르코 폴로의 동상이 서 있다.

칠채산

▲ 칠채산

서녕의 장의약문화박물관에서 탕카의 장황함에 취해 지체한 탓일까? 서녕에서 장액까지 가는 300킬로미터 길이 너무 멀었다. 한국 같으면 고속도로를 따라 세 시간이면 주파하겠지만 중국의 관광버스는 시속 60킬로미터를 넘지 않는 ‘거북이걸음’이다.

본래 일정대로라면 장액 시내에 있는 대불사에 들렀다가 호텔에 들어가서 짐을 다 풀어 놓은 뒤 홀가분하게 칠채산 감상에 나설 터였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대불사 관람을 다음 날로 미루고 칠채산으로 바로 달려도 7시 30분이라는 폐장 시간 전에 닿기가 빠듯했다. 돈황 이전의 최대 기대주가 칠채산이었기 때문에 여차해서 그곳을 놓치기라도 하면 이번 답사여행은 초장부터 망치는 분위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석양에 비치는 모습을 보아야 했으므로 다시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는’이라는 말은 ‘평생’이라는 말과 같다고 해도 무방하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칠채산 구내를 돌며 관람 포인트에 관광객들을 내려 주는 셔틀버스에 가까스로 몸을 실어 평생에 한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칠채산은 사진작가들이 ‘조작’한 영상에는 미치지 못해도 절대로 기대에 어긋나는 곳은 아니었다. 햇살을 받아 일곱 빛깔을 내뿜는다는 구릉들이 510평방킬로미터의 광활한 대지에 펼쳐져 있는 칠채산. 정식 명칭은 장액단하국가지질공원(張掖丹霞國家地質公園)의 채색구릉경구였다. ‘단하’란 여러 가지 침식 작용과 퇴적 작용을 거쳐 깎아지를듯한 절벽, 공룡의 등딱지 같은 구릉 따위 기기묘묘한 형상을 갖게 된 지형을 말한다. 이 같은 단하 지형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도 있지만 중국에 압도적으로 많다. 그중에서도 이곳 칠채산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장액단하지질공원은 숙남현에 있는 얼음 골짜기와 임택현에 있는 이곳 칠채산으로 나뉘어 있다. 2005년 11월 중국 지리 잡지와 전국 34개 매체가 합동으로 선정한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장액단하지질공원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7대 단하’의 하나로 꼽혔다. 2015년에는 여러 웹사이트에서 ‘세계25대 몽환적 여행지’로 꼽히기도 했다.

그렇게 눈이 호사를 했기 때문일까? 아홉 시 넘어 외딴 식당에서 우리 때문에 퇴근이 늦어진 여종업원들의 눈칫밥을 먹고, 열 시 넘어 옥타곤처럼 가운데가 뻥 뚫린 정화국제호텔(鼎和国际大酒店)에서 눈을 붙이게 됐어도 본전 생각은 나지 않는 밤이었다.

실크로드의 새로운 강자 서하

▲ 장액 대불사

나흘째 일정은 전날 포기했던 대불사(大佛寺)에서 시작했다. 대불사는 이름 그대로 거대한 불상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불상이 누워 있는 와불이기 때문에 수불사(睡佛寺)라고도 한다. 2만 3000평방미터에 달하는 이 절은 서하(西夏)라는 나라의 불교 사원이었다.

서하는 하서주랑을 놓고 경쟁하던 당과 토번이 모두 멸망하고 난 뒤 1세기 가량 지나 이 지역에 세워진 나라였다. 건국 주체 세력은 토번과 같은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었다. 881년 탕구트족 출신인 탁발사공(拓跋思恭)이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하주(夏州, 지금의 섬서성 횡산현)에서 하국공(夏国公)으로 책봉되고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하주란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가 그곳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세월은 흘러 당이 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을 겪은 중원은 960년 송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몽골고원에서 일어난 거란족의 요가 남쪽으로 압박을 가해 왔기 때문에 송은 이전의 당과 같은 제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그러자 1038년 탁발사공의 후손인 이원호(李元昊)가 황제를 칭하고 대하(大夏)를 창건했다. 서하라는 이름은 당시 송나라 사람들이 자기네 서쪽에 있다는 뜻에서 부른 것이다.

서하의 등장으로 동아시아는 송, 요, 서하가 세 솥발처럼 우뚝 선 세력균형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동시대의 고려도 그 속에 끼워 넣어 ‘사국 분립’이라 말하면 좋겠지만, 고려는 송에 이어 요의 연호를 쓰고 이 나라들에 사대의 예를 갖췄기 때문에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들과 동렬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서하는 이미 150년 넘게 중원의 제후국으로 존립해 온 전통 때문에 유학과 한문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그러면서 대불사와 같은 절을 짓고 불교를 신봉했다는 점에서 당대의 고려와 비슷한 사회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송, 요와 때로는 친교를 나누고 때로는 전쟁을 하며 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서하는 실크로드의 동쪽 세계를 관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하의 전성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1114년 송의 동관(童貫)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면서였다. 그때 서하는 송에 신하의 예를 갖추기로 하면서 국격과 국력이 모두 추락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 만주에서 여진족이 굴기해 금을 세우자 동아시아의 정세는 아연 돌변했다. 금은 자신의 상전이었던 요를 멸망시키고 개봉에 도읍했던 송도 정복했다. 요의 황족인 야율대석은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 그곳에서 나라의 명맥을 이으니 이를 서요라 한다. 송 흠종의 동생 조구는 남쪽으로 쫓겨 가 남경에서 나라의 명맥을 이으니 이를 남송이라 한다. 금은 서하를 정복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이 나라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금의 천하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금의 지배를 받던 몽골족이 순식간에 세력을 키워 금과 남송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서역 원정의 일환으로 서하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서하는 집요하게 저항했으나 1227년 결국 무릎을 꿇었다. 서하의 끈질긴 저항에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칭기즈칸은 서하 원정을 지휘하다 병에 걸려 죽었는데, 서하의 왕족을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로써 200년 가까이 실크로드의 중심 국가였던 서하는 멸망하고, 세계 제국인 몽골에 의해 육지와 해상의 동서교역로가 하나로 통합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대불사는 서하 건국 60년째인 1098년 가섭여래사(迦葉如來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명나라 때인 1411년에는 보각사(寶覺寺), 청나라 때인 1678년에는 굉인사(宏仁寺)로 개칭되기도 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대불전이 가장 먼저 나타나고 그 뒤로 장경각과 탑이 이어진다. 대불전 안에 누워 있는 부처의 길이는 무려 34.5미터. 중국에 현존하는 와불 가운데 가장 큰 키를 자랑한다. 장경각 뒤에 솟아 있는 탑의 높이가 33.37미터라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긴 대불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불사는 실크로드의 주요 명승고적으로 관광 도시 장액의 상징인 고건축물이다. 그곳을 나서면서 우리는 장액과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근세 초기 실크로드의 지배자였던 서하와도 이별을 고했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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