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이웃한 대만도 우리 못지않게 많은 어려움이 있지요. 이웃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소개하는 한 인물을 주목해 주십시오.

한나라의 지도자가 국가와 국민의 생활에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을 하는지 앞으로 4년, 혹은 8년을 함께 지켜봐주시길 부탁합니다.

▲ 사진(天下잡지 : 黃明堂)

56년생으로 미혼인 대만의 차기 여성 총통! 5월 20일 취임하는 차이잉원! 다소 어눌해 보이고 수수한 모습의 그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현재 대만의 모든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이 독립성향의 민주진보당(민진당)인 그녀를 몹시 싫어합니다. 하나의 중국임을 받아들이라는 중국의 집요한 공격에,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현상유지와 대만의 자유와 민주를 지키겠다는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지도자.

1995년 국민당 집권 시절 중국이 미사일 훈련을 명분으로 대만 해협을 봉쇄하자 대만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부유층은 캐나다나 호주 등으로 대거 이민을 떠났고, 매월 한 컨테이너씩 수출물량을 대만으로 보내던 저는 수출이 뚝 끊기는 그야말로 절벽을 느꼈습니다.

무력과 국제적인 영향력이 당시보다 훨씬 커진 중국이 그녀의 총선 승리를 막으려고, 현 총통 국민당 마잉주(馬英九,마영구)와 시진핑 주석이 싱가포르에서 화기애애한 면담을 성사시켰지만 대만인들은 굴하지 않고 그녀를 총통으로 선출했습니다.

민진당의 승리로 선거가 끝난 후 곧장 눈에 띄는 현상은 어딜 가나 바글거리던 중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겁니다. 혹자는 1/5 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쨌든 공항에 길게 줄을 섰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줄어들면서 공항이 한산해진 걸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인구는 1. 원주민(高山族)과 2. 정청꽁(鄭成功,정성공)을 따라 400여 년 전 이주한 본성인(臺灣省에 살던 대만인)과 3.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과 함께 이주한 외성인(外省人)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정치 분야나 군, 경 쪽은 외성인들이 차지했고, 수도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한 북쪽에 주로 거주합니다.

차이잉원의 부모는 모두 본성인출신이고, 친할머니는 원주민입니다. 사업을 하는 부모의 막내딸로 타이베이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랍니다.

항상 일 이등을 다투는 언니 오빠들에 비해서 워낙 내성적인 차이잉원은 책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역사서를 좋아했지만 공부는 잘하지 못했습니다. 고양이와 노는 거 외에는 누구와 어울리지도 못하는 부끄럼 많은 아이였습니다.

아버지는 대학입시에 시달리지 말고 아예 실업계고등학교에 가라고 권했지요.

고1때 58명중 51등을 했던 차이잉원은 주입식으로는 절대 입력이 되지 않는 두뇌의 소유자였습니다. 자기 방식으로 공부 방법을 터득한 후 일취월장, 마지막 졸업 시험에서는 일등을 합니다.

대만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 로스쿨에 입학하여 석사를 마치고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불공정 무역과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에 대한 연구를 통해 법학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지면상 자세한 이야기는 쓸 수 없고, 법을 전공하면서 당시 첨단 경제 분야를 공부하였습니다.

차이잉원의 자서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법이란 정의와 선량한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 갈고 닦아야할 학문인데, 똑같은 법을 공부하고서 누구는 권력자의 하수인이 되어 장기집권의 틀을 만들고, 어떤 이는 목숨을 내놓고 그 불의함에 항거를 할까?

아마도 출세와 돈벌이의 수단으로 법을 공부한 사람과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공부한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요?

지극히 내성적이고 평범한 차이잉원이 드라마틱한 대만의 현대사에 항상 함께 했던 요인은 본인의 호기심,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진보에 대한 가치 그리고 가장 큰 요인은 대만과 국민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합니다.

27살에 귀국하여 대만정치대 교수로 임용이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제무역국의 요청으로 WTO가입 협상에 참여합니다. 그녀의 다양한 학문적 지식과 깊이 있는 사고, 인내심 그리고 관찰력과 공감능력은 탁월한 영어실력과 어울려 대만이 최초로 경험하는 다자간 무역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냅니다. 나중에는 모든 협상을 총괄하는 총고문이 되어 140개국과의 협의를 이끌어내고 WTO에 가입합니다. 대만의 이익과 관련 산업의 보호를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소고기 협상은 심지어 10년을 끌었더군요.

2000년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은 당원도 아닌 40대의 젊은 차이잉원을 대륙위원회 주임으로 임명을 합니다. 중국과 껄끄러운 천총통 정부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총괄하는 대륙위원회는 또 하나의 작은 정부입니다. 50년 이상 기득권을 유지하며 모든 중국과의 협상을 비밀리에 주도하던 부서의 책임자로 들어가 새로운 틀을 만들어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을 반대하는 국민당은 중국과의 '3불'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유학중이던 저도 이의를 제기했던 '3불' 정책. 통상(通商,비지니스), 통운(通運,왕래), 통우(通郵,서신)를 불허하는 정책이지요. 민주진보당 천총통은 '3통'을 허용하겠다고 천명을 하고, 15년 동안 국제협상을 해온 차이잉원을 책임자로 앉혔습니다.

차이잉원은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매달려봐야 서로 긴장만 고조되고 누구에게도 이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가능한 분야를 찾아내고, 이해당사자들을 접촉하여 협상을 풀어나가 '소3통'을 실현시킵니다.

전체를 개방하기 전에 중국과 가까운 3개의 섬, '진먼', '마주', '펑후'에 세관을 설치하고, 시험적으로 이 지역에 통상(通商, 비지니스), 통운(通運,왕래), 통우(通郵,서신)의 '3통'을 개방한 것을 '소3통'이라 합니다.

대만이 국시로 내거는 본토 회복도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대만을 중국의 일부 성으로 흡수시키는 문제도 받아들일 수 없고요. 그렇게 서로를 비방하다 무력충돌이라도 일어나면 어느 누군가는 흡족한 미소를 짓겠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잿더미로 변한 참화 속에서 무엇을 얻나요?

차이잉원의 생각은 “가능한 많은 민간 교류를 통해서 정치 군사적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줄이자, 그 대신 속도를 조절하여 관련분야가 적응하고 대응할 시간을 갖자“이었습니다.

대중국 업무를 총괄하던 차이잉원 주임은 이틀에 한 번 꼴로 국회에 나가 다수당인 국민당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맞받아치는 날선 공방을 벌이기도 하고, 그들의 협조도 구하며 항상 뉴스의 초점이 됩니다. 어떤 의원은 일부러 방송에 나오려고 차이잉원을 몰아붙이기도 하다가 오히려 망신을 당하기도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인신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차이잉원의 생각대로 많은 사업가들이 중국에 진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폭넓은 교류가 이루어지는 발판을 만들고 4년 임기를 마칩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서 서로간의 적대감이 많이 희석이 되었더군요.

이번에 차이잉원을 지지한 사람들 몇몇에게 물어봤더니 대부분 장기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2004년 총통선거 바로 전날 저녁, 갑자기 전 매스컴이 요란해집니다. 민진당 후보자 천총통이 권총으로 저격을 당했는데 뱃살에 총알이 지나가며 상처를 입은 사진 한 장. 약간 열세인 듯 하던 천총통은 개표결과 연임에 성공을 하지만, 임기 말에 연이은 비리로 민주진보당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선거에서 참패를 당해서 국민당 마잉저우(馬英九,마영구)총통으로 권력이 넘어가고, 지지율도 30%아래로 곤두박질을 칩니다. 천총통은 부인이 선거자금 일부를 해외로 빼돌린 것을 시인하고 사죄를 하지만 지지자들의 마음은 깊은 슬픔과 좌절 그리고 분노에 떨어야했습니다.

당시 부행정원장(부총리)이었던 차이잉원은 여러 사람들의 끈질긴 요청에 민진당의 구원투수로 주석직에 오릅니다.

차이잉원은 뛰어난 관찰력, 공감능력, 깊은 지식, 협상력 등 장점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많은 당원과 지지자들이 집권여당을 강하게 비판해서 잃었던 자신감과 의지를 되찾자고 주장해도 기다립니다. 과거의 투사가 물렁이가 되었다고 비난을 해도 묵묵히 기다립니다. 당 재정은 많은 빚으로 직원들 월급도 못주는 실정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일당독재는 막아야 된다는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국민당 지지자들마저 민진당이 없어지면 안 된다는 기류가 형성이 되자 차이잉원은 서서히 움직입니다.

우선 소액기부를 통해 당의 재정을 정상화시키고, 전패를 하던 보궐선거에 전력을 쏟아 부어 2년 만에 처음으로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마정부가 대중국 저자세 외교로 대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자 직접 거리투쟁에 나섭니다. 80만의 시위대 최전방에 섭니다.

여러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 되고, 2010년 국민당의 아성인 신베이(新北)시장 선거에 직접 후보로 나섭니다. 여론조사에서도 앞서며 마음을 놓던 투표전야에, 대규모의 유세를 앞두고, 전 총리에 국민당 주석을 역임한 유명 정치인 롄잔의 아들이 국민당 지지 유세 도중 얼굴에 총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날아듭니다.

차이잉원은 상대방의 조작극이라며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었지만 분노한 군중들로 인해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사회를 안정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유세를 마칩니다.

결과는 아쉽게 패배를 합니다. 2012년 민진당 총통 후보로 나서, 연임에 도전하던 총통 마잉저우에게 또 집니다. 드디어 2016년 두 번째 도전에서 60%에 가까운 지지를 받으며 당선이 되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다수당이 되면서 차기 정부를 이끌 총통이 되었습니다.

제가 차이잉원이 가장 적합한 총통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코넬대 유학중 한 교수가 차이잉원에게 질문을 합니다. “앞으로 중국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녀는 이 화두를 40여년 안고 살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주석을 바라지도, 총통이 되겠다는 꿈도 갖지 않은, 그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남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하는 내성적인 평범한 여자입니다.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러하기에 그녀는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대만의 자존심을 생각하고, 국민의 이익을 지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기다릴 줄 압니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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