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든 연인이든 사람이지요? 그리고 가장 두려운 거 또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만의 국민소득은 우리와 비슷하고 물가는 전반적으로 쌉니다. 대만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 중의 하나이지요. 특히 타이난은 제가 좋아하는 운동 중의 하나인 골프를 치기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카트, 캐디 비용을 모두 포함해서 약 8만 원 정도입니다. 수영장도 곳곳에 있고 역시 저렴하지요.
대한민국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 하는 운동 중에서 등산이 가장 사랑을 받지 않나 합니다. 심지어 해외 여행지에서 등산복 입은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할 정도고요.
중화권에서 가장 사랑받는 운동은 태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 일찍 공원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각자 자기에게 맞는 운동을 합니다.
어떤 이가 전설적인 3대 무술인의 한 사람으로 그를 꼽았고,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인으로 활동한 사람이 있습니다. 최영의, 혹은 최배달(1922~1994)로 일본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입니다.
한국에는 바람의 파이터로 알려진 실존 인물이죠. 1947년 전일본 가라테 선수권에서 우승을 하면서 주목을 받는데 조선인으로 알려지면서 파란만장한 무인의 길을 걷습니다. 두 번이나 입산을 하면서 극강의 실전 무예를 수련하고, 검도, 유도 가리지 않고 고수들을 찾아 대결을 펼칩니다.
편협한 일본의 무술계에서 최고수에 오르자 일본의 자존심을 찾겠다고 도전해오지만 모두 물리쳤고, 나중에는 30여명의 각계 최고수를 동원하여 최영의를 제거하려고 하지만 1대 다수의 처절한 혈투를 벌이며 또한 살아 돌아옵니다. 맨손으로 소의 정수리를 내려쳐서 죽였던 가공할 실력의 최영의가 일본을 벗어나 전 세계로 대결의 장을 넓힙니다.
결국 120여 개국에 극진 가라테를 보급했고, 나중에는 한국의 태권도를 국제화 하는데 음으로 양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대적할 자가 없던 그가 패한 기록이 있습니다. 홍콩에서 한 왜소한 노인과 대결을 했는데 옷깃 한 벗 스치지 못했다고 하기도 하고, 그 노인과 부딪힌 순간 튕겨나가 쓰러졌다고 하기도 하는데 일본인들의 자존심에 일본 기록에는 무승부로 기술하지만 최영의 본인은 졌다고 했다지요.
홍콩의 그 노인이 진 씨였답니다.
태극권의 원조는 진씨 집안 대대로 전해져온 가전무예였습니다. 그 무예를 흠모했던 양씨(楊氏)가 종으로 들어가 몰래 배웁니다. 후에 발각이 되어 죽을 처지였는데 가주가 죽이기 전에 제자들과 대련을 시켜봅니다. 워낙 출중한 능력에 정식 제자로 받아 무술을 전수해줬고, 나중에 중국 무림의 최고 자리에 오릅니다.
현재 중국에서 대부분 하고 있는 태극권의 틀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양가태극권(楊家太極拳)이라고 하지요. 중국 심천에서 2년 정도 24식 양가 태극권과 태극검을 매일 아침마다 따라 했는데, 신경 협착증으로 허리아파 고생하면서 그만 두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대했던 효과는 전혀 없고 그저 무슨 춤사위 하듯 무미건조했지요. 차라리 요가나 근력운동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은 1960-70년대 십여 년간 문화대혁명으로 전통이 거의 다 말살이 됩니다. 당시 고수들이 홍콩이나 대만 등으로 피해서 이주를 합니다. 그래서 3대 전설의 한 축을 이루는 이소룡도 홍콩에서 나옵니다.
사진 앞쪽에 있는 분이 고수입니다. 이 고수의 가르침을 옮기자면, "태극권은 내공을 수련하는 것입니다. 유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원리이지요. 소림 무술이나 한국의 태권도는 외공을 연마하는 것이고요. 기를 아래로 내리고, 다른 표현으로 무게중심을 허리 아래로 두고 움직이되, 허리 위는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힘을 다 빼고 따라가라고 합니다." 입니다.
이 분이 하는 태극권은 37식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본 32식 54식과도 다르더군요. 잠시 뒤에서 따라 해봤는데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고, 잠시 나를 잊는 무아의 경지에 들어선 듯 했습니다.
대만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도 배타적이라는 느낌은 없습니다. 아니 너무 친절하지요. 혹시 어울리고 싶으면 꾸준히 그 시간에 매일 나가서 뒤에서 그저 따라하면 됩니다.
대만에 처음 와서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오토바이입니다.
알버트 차이, 50년생으로 저보다 8년 연상의 66세, 미국 국적입니다. 제가 형님이라고 부르지요. 드라이버 비거리가 저보다 멀리 나가고, 보통 82타에서 86타로 항상 저보다 잘 칩니다.
미국 동부 뉴저지에서 살았습니다. 15,000평의 저택에는 숲과 수영장 농구장 테니스장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자기는 매일 잔디 깎고, 나무 가지 치고, 물청소하는 고용인이더랍니다.
어쩌다 필드에 나가는데 동년배와 골프를 치면 실력차이가 너무 나서 갑갑하고, 잘 치는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자기를 꺼려하고, 대만이 낙원이라며 미국에 갈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미국인과 결혼한 두 딸과 부인은 미국에 살기를 원해 혼자서 대만에 들어왔습니다. 國立虎尾科技대학 항공공정학과(Aeronautic Engineering Department) 교수로 강의를 나갑니다.
초창기 제가 세 들어 살던 곳과 가까이 살았는데 한 번은 초청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한국김치를 구해서 자기 식으로 김치찌개를 끓였다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먹기를 권유하더군요.
냄비 뚜껑을 여는 순간, 아뿔싸~~ 웬 커다란 생선 머리가 두 눈을 뜨고 나를 보는 것이야~~~
혹시 어두육미(魚頭肉尾), 들어보셨나요? 생선은 머리 쪽이 맛있고, 고기는 꼬리 쪽이 좋다고. 소꼬리 값이 비싼 이유입니다. 이 형님이 크게 생각해서 손님 접대로 거금을 투자하였지만 입이 짧은 저는 무척 곤욕스러웠지요.
일본에서 유학시절 한국학생에게서 배웠다며 무김치(깍두기라고 말하기 어려운 길게 몇 토막 내고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 뿌린) 만들어서 초대를 해줬던 양명학 전공의 林교수! 오래토록 깊은 감동을 줍니다.
추신: 카메라 모드가 바뀐 줄 모르고 그냥 찍어왔습니다. 널리 해량하소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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