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뿌리를 찾아서!

노래를 지독하게 못할 뿐만 아니라 박자개념이 없는 저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부럽습니다. 천상의 목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여 듣는 이들을 무아의 경지에 빠뜨리는 사람들!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노래를 하면서 의식주가 해결이 된다면 직업으로서도 최상이 아닐까?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부와 명예를 얻는다면 정말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이 많은 분야가 있다면 그 쪽에서 일을 하면 성취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학교와 학원 집만을 순례하게 된다면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알기도 어렵고 세상을 사는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유럽에서는 어려서부터 여행을 강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천 년을 나라도 없이 떠돌면서도 적은 수의 민족으로서 아직도 역사에 뚜렷이 족적을 남기고 있는 유대인들의 지혜의 보고 ‘탈무드’에서도 자식에게 최고의 선물은 멀리 여행을 떠나보내는 거라는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여행을 통해서 다양한 경험과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유산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나봅니다.

1977년 ‘고상돈’이란 이름이 대한민국을 흥분케 하였습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한국인 최초로 등정한 소식이 전해졌지요. 당시 한국의 등산인구는 아주 소수였습니다. 등산 장비들도 조악했고요. 무거운 A형 텐트에 바닥은 열에 약해 쉽게 구멍이 뚫리고, 코펠은 한 번 다녀오면 여기 저기 찌그러지면서 종류도 많지 않았지요.

개인적으로는 중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앞 관악산 정상에 친구 둘과 더불어 올라가 잔설을 구경한 게 첫 산행이 아닐까? 그러다 중3 마치고 고입 전에 아는 형을 따라서 장비도 없이 겨울 도봉산에 올랐다가 고생 엄청 했지요. 고상돈의 등정 성공은 마치 박세리가 US Open에서 우승 트로피를 올린 후 골프 인구가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과 유사했습니다. 산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등산 장비산업도 비약적으로 커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대학시절 틈만 나면 도봉산을 혼자서 쏘다니는 버릇이 생겼고 그래서 점점 산과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1984년 겨울 처음으로 대만 타이베이에 도착했던 그 겨울 12월인가, 1월 무렵 한 달 동안 해를 3번 보았습니다. 부슬 부슬 내리는 비에 난방이 없는 실내는 외부온도 10도보다 훨씬 추웠습니다. 그래서 등산장비 판매점을 찾아가 침낭과 코펠을 샀습니다. 오리와 거위를 많이 키워서 그런지 양질의 침낭으로 추위를 견뎠습니다.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코펠은 한국제품보다 품질이 많이 낮았습니다. 텐트나 배낭 같은 장비들도 한국의 예전 수준으로 차이가 많이 나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관심 있는 분야라서 그런지 쉽게 비교가 되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석사학위를 따지 못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날 잠 못 이루며 고민한 끝에 그래도 조금 알고 좋아하는 등산 장비를 한국에서 가져다 대만을 덮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남대문 등산 판매점에 의뢰를 해서 로고와 상표를 부착하지 않은 텐트 6동을 샀습니다. 몸통 겉에 햇빛가림과 방수기능이 있는 플라이에 코끼리 문양과 ‘ELEPHANT’란 문자를 인쇄한 후 짊어지고 대만 타이베이 중심지로 갔습니다. 물어물어 그럴듯해 보이는 등산장비 판매점 ‘王子’란 곳에 들어가 사장을 찾았습니다. 40대 중 후반의 사장에게 한국에서 텐트를 만들어가지고 온 연유를 설명했습니다.

사장 왈: “어디 가서 어떻게 팔 생각이냐?”

저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샘플 하나를 주고 나가면 나중에 시장 반응을 살피고, 2-300동 나에게 오더를 주면 되는 나의 계획은 시작부터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각 도시마다 한 곳을 정하고 6개 도시에 나의 대리점을 만들어 당차게 대만 시장을 덮어보려던 무모함은 사라지고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지고 손발에 땀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 더운 날씨에 이걸 들고 다리 밑에 가서 펼치고 쪼그리고 앉아있을 그림이 순간 지나갔습니다. 제 얼굴은 포커페이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사업과는 먼 인물이지요. 저는 화투 패를 상대방에게 다 보여주고 함께 먹고 살자는 쪽입니다. 사장이 건네는 담배만 깊게 빨아대고 있는데, ‘이걸 만들 때 얼마를 받고 싶었냐.’ 며 자기가 그 돈을 다 줄 테니, 자기 무역회사에 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나를 잡고 한국 물건을 수입해서 대만시장에 팔겠다는 생각을 빠르게 한 거고, 나는 그냥 고맙기만 했습니다.

80년대 대만은 중소기업 천하였습니다. 공장을 방문하면 작은 창고에다 기계를 놓고 사장과 부인 혹은 아들딸들이 땀을 흘려가면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규모가 아주 큰 회사건 작은 회사건 어딜 가나 사장이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 사람을 맞이하지요. 한국은 큰 회사건 작은 회사건 사장 만나기가 벼슬하기보다 어렵습니다. 王子회사가 가지고 있는 무역회사는 수영용품을 여기 저기 공장에서 가져와 자기 상표로 해외 시장에 판매를 했습니다.

팩스도 없던 시절 도서관에 가서 해외 바이어 명단을 찾고, 사무실에 들어와 텔렉스로 레터를 보내고 연락이 오면 샘플과 카탈로그를 발송해서 바이어를 발굴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노력과 해외 전시장에 물건을 들고 직접 참가하는 다수의 대만 업체들 덕분에 당시 자전거나 우산 문구류 등은 세계시장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하늘에 날리는 연은 거의 독점적인 위치에 있었지요. 한국에서 제공하는 등산용품 가격이 맞지 않아서 짧게 근무를 했지만 무역에 대한 개념과 적극성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이 되었지요.

王子 사장인 리지엔숑(李建雄,이건웅)이 대만 스키협회 총간사(총무)를 맡던 89년인가 90년 겨울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대만 스키협회와 한국 스키장 한 곳을 섭외해서 자매결연을 하자고. 서울 근교의 베어스 타운에 처음 가서 이야기를 했는데 스키인구가 많이 늘어 내국인도 줄을 서는 형편이라 대만 쪽에 혜택을 주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강원도 알프스 스키장과는 이야기가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대만 스키협회 임원들과 선수들이 모두 들어오고 강릉 MBC에서도 스포츠 뉴스 시간에 보도를 했습니다. 대만 스키 협회에서 스키 장비를 알프스 스키장에 보관을 시키고, 대만 스키협회에서는 스키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 및 관광객을 모집하여 겨우 내내 한국 동계스키체험단을 알프스로 보냈습니다. 알프스 스키장이 애석하게도 지금은 폐허가 되었던데 격세지감입니다.

중국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2008년 북경 올림픽, 2010년 상해 박람회를 전후로 급격히 성장하여 G2가 되었지요.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중국은 우리나라 60년대, 경제개발 전과 비슷한 수준이었지요. 등소평 최고 권력자가 개혁개방을 주창한 게 78년도입니다. 79년도에야 대만 대신 중국이 안전보장 상임이사국으로 대체가 되지요.

중국의 영향력이 대만과는 비교가 안 되게 커졌지만, 전 세계 화교 네트워크를 통한 대만의 전파력은 지금도 무시를 못합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크던 작던 차이나타운이 있고 그들의 결속력은 대단합니다. 한국인들은 해외에 나갈 때 제일 먼저 ‘한국사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고 나갑니다. 반대로 화교들은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모여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지요. 중화민국 건국 기념일인 쌍십절(10월 10일)에는 많은 화교권에서 기념행사를 하고 각 지역 화교교민회(상인회) 회장단은 타이베이에 초청되어 대만에 들어옵니다. 그런 연유들로 대만의 소식은 전 세계 화교사회로 빠르게 전파가 됩니다.

▲ 2004년 1월 호주 브리스번에 모인 화교 상인회 모임에 준화교 자격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좌측이 필자. 좌측 두 번째가 당시 부회장인 조셉 꿔, 매년 10월이면 대만 정부 초청으로 입국합니다. 사업상 많은 조언이 오고가고 제게도 모두가 호의적이었습니다.

알프스 스키장으로 겨울 관광을 오기 시작하면서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인들로부터 겨울 스키 관광은 사랑을 받게 되지요.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앞서있었던 그들에게 한국에서의 색다른 겨울 체험은 커다란 뉴스거리였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중국이나 일본의 도시쯤으로 여기던 서울을 세계인에게 알린 이정표와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 해 처음으로 대만에 등산장비를 수출한 이후 89년도부터 직접 회사를 설립하여 무역을 하게 됩니다. 시기도 좋았고 좋은 파트너도 만나 어렵지 않게 지속적인 성장을 했지요.

대책 없이 무모했던 텐트 6동이 등산장비 수출로 이어졌고, 그런 인연으로 대만 스키협회와 연결이 되고, 스키 관광을 통해 한국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 많은 교류가 파생이 됩니다. 어찌 보면 이런 일들은 내가 아니어도 이루어지고, 더 좋은 결과가 생길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인연도 변화의 씨앗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한류를 태동하게 한 많은 요인 중 하나는 한국사회에서 활동한 화교들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적대국인 중국과 한국의 정치적인 관계로 화교들은 과거에는 근본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맺을 수 없었고,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 수도 없었기에 모두가 대만 국적을 보유합니다. 동남아 경제권이 화교 상인들에게 넘어가는 걸 본 박정희 정부에서 화교들을 심하게 탄압을 했다고 합니다.

타이베이에서 우연히 만난 화교 한 분이 울먹이며 서울에서 중국집을 했는데 50만원을 벌었는데 세금은 100만원 내라고 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자기는 나이도 먹고 편하게 살려고 대만으로 왔지만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지로 많이 떠났다고.

▲ 타이난 썬농졔(神農街)의 오래된 거리. 과거의 추억을 간직한 옛 모습은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안과 여백을 제공하는 듯합니다. 해방촌 판잣집의 기억을 갖고 있는 저에겐 이 거리도 호사롭기만 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렸을 적 고향의 기억은 그리울 수밖에 없지만 이들에게는 그립고도 아픈 추억들이 많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속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가족을 따라 이민을 갔다가 남자친구와 함께 대만으로 유학을 온 한 여자 분이 나를 집에 초대해 밥상을 내놓는 모습이 그리운 혈육을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반면에 타의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은 한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좀 더 이해하고 배려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부끄럽고 지우고 싶은 고향이라면 모두가 불행할 테니까요.

다음 이야기는 한류의 기원에 대하여 쓰겠습니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동호 주주통신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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