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 빈소가 마련되어 있는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면 노란색 포장마차가 보인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로 ‘희망포장마차’ 앞에 모인 사람들이다.

'소나무'(실명 오영애, 57세)라는 분이 있다. 소나무는 노사모 아이디다. 이 분은 ‘희망 포장마차’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무현 전대통령 후보시절, 경선과 대선 후원금을 모았다. 이후 아프고 힘없는 약자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소나무님의 ‘희망포장마차’가 뜬다. 약자들과 연대하는 배고픈 이들에게 간편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 희망포장마차

그녀는 지난 25일,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그 날, ‘희망포장마차’를 끌고 왔다.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신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밥을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라면이라도 끓여줄 겸 갖고 있던 돈으로 라면을 마련해 왔다. 라면은 하루 만에 동이 났다. 대책위에서 음식을 마련해준다고 했는데 마련해주기도 전에 음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매일 라면 20박스씩 나가고 있는데도 라면도 쌓이고, 햇반도 쌓이고, 물도 쌓이고... 그 날 하루 컵라면 끓여주려고 왔는데 현재까지 만 6일째 천막에서 생활하며 집에 가질 못하고 있다.

▲ 쏟아지는 후원 물품들

그녀는 자신과 함께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몇 시간씩 도와주는 봉사자들은 많지만 저녁이 되면 다 집에 가요. 새벽에도 한끼를 부탁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침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장시간 서서 일하는 중노동이라서 누구에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어요. 저 많은 음식을 다 풀어서 먹여야 하는데.... 집에 가서 딸도 밥해줘야 하는데.. 아주 죽겠어요.”라고 했다. 그녀는 인터뷰 도중 음식 배달 차량이 들어오니까 “저 봐라. 또 온다. 또 와.”라고 반은 반기듯 반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비록 몸은 고되지만 저렇게 음식을 보내주는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아직 살아갈 만한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후원 물품을 나르는 자원봉사자, 배달차량이 1시간 동안 3대나 왔다

한겨레와의 인연

그녀와 한겨레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녀는 창간 시 부산 영주동에 있는 부산지사(당시 지사장 문재인)에서 1년 간 일했다.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고 9시면 지사에 와서 일을 도왔다. 당시 친구가 지국장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와 둘이 새벽에 배달했다. 그 친구지국에서 배달일로 월급 40만원을 받았다. 부산지사에서는 가족의 일원처럼 자원봉사로 일을 한 것이다.

그 당시 한겨레신문이 창간했을 때 ‘우리신문’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동아투위 등 해직기자들이나 언론인들이 말을 할 공간이 없었는데 그럴 공간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만든 신문이라 생각했고, 한글쓰기, 가로쓰기 등 획기적으로 변화를 준 신문이기에 자랑스러웠다.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그렇게 자원봉사로 1년 일한 것이다.

▲ 소나무님과 세월호 유민아빠

1년간 일하면서 재미랄까? 인상에 남는 일이 세 가지 있다.

첫째로 부산에 이수윤(약 3년 전 사망)기자가 있었는데 차도 없어서 버스 타고 다니면서 취재를 했다. 이기자가 취재 내용을 전화로 불러주면 사무실에 있던 소나무님이나 직원이 받아 적어 한겨레에 팩스로 보냈다. 그 당시 한겨레는 윤전기가 없었다. 남의 윤전기를 빌려 써야했기 때문에 4시(?)까지 기사를 보내야했다. 오타가 나면 막 오타를 줄로 긋고 글도 개발새발 써가지고 기사를 보내곤 했다. 또 수요일 마다 금강산 사진이 실렸는데 금강산 화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영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도 기억이 난다. 그 당시 한겨레는 ‘주식장’ 소식을 올리냐 마냐로도 회의를 했다고 한다. 평기자와 데스크 간에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로 소통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서 참민주주의 언론이 구현되는 것 같아 참 흐믓했다.

한겨레에 대한 생각

한겨레가 그동안 많은 일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맘에 들 때도 있고 맘에 안들 때도 있었다. 가장 맘에 안든 기사라면 참여정부 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좀 지나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 것들에 섭섭함이 있다.

한겨레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독자가 원하는 신문이기 보다는 팩트를 중심으로 가는 언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일화가 있다. 예전에 어떤 정치인에 관해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수언론들이 공격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한겨레기자와 그 정치인이 함께 인터뷰하는 자리에 같이 있게 되었다. 기자는 그 문제를 계속 묻고 또 물었다. 정치인은 사실이 아님을 밝혀도 계속 반복된 질문을 했다. 나중에 기자와 단둘이 있을 때 “아니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묻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아닌 것은 아는데 독자가 아닌 것이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에 혹 뭐라도 건질까 해서 물었다”고 답했다. 기자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지 대중이 원하는 기사를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겨레만이라도 이 정신을 꿋꿋이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

또 한 가지는 한겨레는 부수를 확장하거나 유지하는 것에 좀 소홀하지 않았나 싶다. 부산지사에서 일할 때 식당에 다니면서 한 달에 30-50부 정도 확장을 했다. 가는 곳마다 조선일보 보고 있으면 한겨레도 하나 봐 달라고 사정하면서 구독확보를 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는 신문을 끊으려고 하면 좀 더 봐달라고 애원을 하면서 신문을 계속 넣는다. 하지만 한겨레는 아주 쿨하게 '예’하고 끊어주었다. 그것이 맞긴 맞게 하는 것이지만 한 부를 확장할 때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한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을 들여서 한 건데 쉽게 끊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많이 아쉽고 섭섭했다. 한겨레는 독자를 애써서 잡고 관리하려는 그런 노력이 좀 부족한 거 아닌가 생각한다.

인터뷰 중 어떤 이가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니 소나무님은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죄지요.”

덧붙여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저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국민이 잘못이지요. 젊은이들은 투표를 안 합니다,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없다고 뭐라고 하지만 젊은이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사회시스템이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학자금 대출 받아서라도 모두 대학 가는 분위기 만들어 놓고, 졸업하면 빚쟁이 되지 않으려고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따질 것도 없이 100만 원짜리 일자리라도 잡고 일하게 합니다. 젊은이들이 장시간 값싼 노동으로 삶을 꾸려가니 사회에 눈을 돌릴 틈이 없는 겁니다. 이거 다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런 정치인들이 판을 치게 한 것은 국민이 동의를 했건 무관심을 했건 우리 국민들 어른들 잘못입니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그런 시스템을 뜯어 고쳐야 젊은이들도 사회에 관심을 갖고 이 사회가 변화를 하게 되는 겁니다.”

백남기님은 쌀 수입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나왔다가 죽임을 당했다. 농민을 위한 박근혜 대통령의 쌀 수매가 약속을 지켜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나왔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 죽음에 애통해 하고, 경찰의 살인진압과 정부의 부검 사인조작시도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나무님은 ‘희망포장마차’를 끌고 나왔다. 그들에게 따뜻한 한끼 식사라도 먹여서 '힘'을 주기 위해서다. 시민들간의 살아있는 연대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 ‘밥심’이 이 사회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이라고 나아가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 세월호 가족협의회 차도 자원봉사차 왔다.

* 혹 ‘희망포장마차’를 후원하실 분은 햇반, 컵라면, 김치, 김, 생수, 종이컵 등을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28번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밥차 백남기농민 지킴이 앞으로 보내시면 된다.

* 수정 : 후원물품은 다 소비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혹시 후원해주실 분은 농협 023-01-495121 가톨릭농민회로 후원하시면 된다.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김미경 주주통신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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