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기질은 떼어낼 수 없다!

전 세계 곳곳에 중국인이 없는 곳이 거의 없지요. 핵전쟁이 일어나 이 지구상에 최후의 일인이 남는다면 아마도 중국인일 것이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중국인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요. 요사이 경제적으로 G2가 되면서 어느 나라 관광지나 중국인들로 북적입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곳에 꼭 들어가고, 수천 년 문화유산에 낙서를 하고, 길거리에서 침 뱉고, 방뇨하고.

예전에 박지성 선수에게 관중이 칭크(Cnink)라고 말했다가 문제가 됐었지요. 바로 ‘중국 놈’이란 어원을 가진 욕설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인을 욕할 때 쓰는 말은 까오리빵즈(高麗棒子, 고려봉자)입니다. ‘빵즈‘는 몽둥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비속어로 쓰일 때는 예전 관아에서 심부름하는 방자의 의미라는 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중국인들이 한국 고전에나 나오는 방자를 알아서 쓰는 거 같지는 않고, 중국 역전이나 시장에서 물건 나르는 사람들, 한국에서는 지게꾼이라고 하지요. 지게 대신 중국에서는 약간 긴 막대기 하나를 한 쪽 어깨에 올리고 물건을 양쪽에 매달아 옮겨줍니다. 그 막대기를 ’빵즈’라고 부르지요. 그러므로 까오리빵즈(高麗棒子, 고려봉자)는 고려지게꾼이란 의미겠지요.

이번 글은 중국인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대만인과 한국인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조선시대나 동학을 경험한 세대는 없지만 일제의 지배를 경험한 70대 이상은 아직도 존재하지요.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회주의자가 되거나 피를 흘려가며 저항을 해야 했지요. 같은 민족끼리 더 분열하고 갈등하는 환경에서 생존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갈등과 분열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중국은 더하지요. 만주족인 청나라의 지배를 300여년 받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만주를 내주고 상해 남경 등에서 엄청난 학살을 당했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마음 편하게 산 날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국공내전으로 전쟁을 치렀던 세대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습니다.

이어서 60대의 중국인들, 현재도 영향력을 행세하는 이들이 태어나 자랐을 시기에는 바로 대약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천하를 잡은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은 계획경제를 통하여 미국의 부를 능가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오의 주도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농공업대증산정책’을 폅니다. 이른바 ‘대약진운동’이지요. 주요 정책이 집단농장화와 농촌지역의 공업화, 다시 말해 농촌에서 수요가 급증하는 철강을 생산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기계 한 대보다는 200명의 노동자가 집단생산을 통해 의식을 해결하고, 각 농촌에 고로를 설치하여 철강을 생산해 공업화를 이루어 미국을 앞지르겠다는 개념이 마오의 생각이었습니다.

▲ 사시사철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는 마오쩌둥의 초상. 아직도 일부 노인들 사이에서는 신처럼 추앙을 받고 있지만, 유사이래 가장 많은 백성을 죽게 한 지도자.

결론은 유사 이래 최악의 참사, 5년 동안 약 4천만 명이 굶어죽었습니다. 집단농장에 공산당원이 시찰을 오면 눈에 보이는 곳에서만 하는 척하고 다 놀지요. 당시 농장에서 일했던 사람 말에 의하면 제일 뺀질뺀질 일을 안 하던 사람이 1978년 덩샤오핑(登小平, 등소평)이 사유지와 농기구를 농민에게 주는 정책을 펴자 제일 열심히 일을 해서 수확을 하더랍니다.

마을마다 쇠를 생산한다고 재래식 고로를 설치해서 철강을 생산하는데 할당량을 채우려고 대충 시커먼 거를 생산하니 품질이 형편없어 사용할 수도 없었고, 애먼 나무만 마구 잘라 산사태와 홍수로 그나마 심었던 농산물도 다 쓸려갔습니다.

1958년 대약진 운동을 개시하면서 우상화된 마오가 한 마디 합니다. “저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그 한 마디에 참새잡기 광풍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참새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더니 그 해 해충이 창궐하여 대 흉년이 듭니다.

현재의 60대는 4,000만 명이 굶어죽는 시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고통스런 일중의 하나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일이 아닐까요?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처와 자식이 일주일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는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남의 입 속에 들어가는 것도 빼앗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철칙이 생겼습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는 명목상 당주석의 직위를 유지하고 국가주석은 류샤오치, 당총서기는 덩샤오핑이 맡아 실용적인 정책으로 전환합니다. 시행은 성공을 거두고 전국은 다시 안정을 찾아갑니다. 권력을 맛본 자 절대로 그냥 물러나지 않지요. 마오는 1963년부터 어린애들에게 “공산주의교육운동”을 시켜 점차 지지자로 만든 후 홍위병으로 성장을 시키지요.

▲ 문화혁명 10년간 마오쩌둥과 문혁 4인방의 비호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홍위병들! 무임승차로 철도가 마비되기도 했다.(사진출처:위키피디아)

지금 4-50대가 태어나 성장하던 1966년에서 76년 10년 동안 기존의 모든 것들을 파괴한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시기입니다. 권력에서 밀려난 마오가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창출을 이념으로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학생폭력운동을 동원하여 다시 권력을 잡으려고 일으킨 운동입니다.

고등학생들을 주축으로 만든 홍위병들을 격려하며, 자기의 반대세력은 무조건 ‘자본주의자’로 몰아 지지자들까지 함께 실각을 시키거나 처형을 했습니다. 홍위병들에게는 국가가 무상으로 북경에 오면 먹고 재워줬습니다. 뒤에서 은근히 홍위병들을 북경으로 오게 하여 종종 그들 앞에 나타나 홍위병들을 부추기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숭배의 대상이었던 마오는 드디어 신이 되었습니다. 마오의 어록은 성서가 되었고, 무려 3억 5천만권이 인쇄되어 소장해야할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타파해야 한다는 이 문화혁명 운동으로 수천 년의 문화유산이 파괴되었고, 대학교육도 정지되었습니다. 교수들은 어린애들 손에 끌려 하방(농촌에 내려가 직접 노동체험)을 당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나 스승까지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고 처단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홍위병들은 빨간 완장만 차면 기차건 뭐건 무임승차에 먹고 자는 것도 공짜였습니다. 무소불위 안하무인! 세상 무서울 게 없었지요. 이들은 마오를 신으로 여겼고, 그들의 정신은 성서인 마오의 어록으로 무장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칭크들입니다. 잔디에 들어가지 말라면 꼭 들어갑니다. 제지를 하면 그러지요.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네가 뭐야? 어쩔 건데!” 문화유산? 꼭 기어 올라가 자기 이름을 새기고 내려옵니다. 말리면 더하지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60대 이상의 세대, 아직도 마오를 신처럼 숭상하면서 기존의 모든 질서를 파괴했던 경험을 가진 그들은 민족주의의 강한 결집력을 가졌지요. 지금도 노인들 중에는 마오의 초상을 집에 모시고 향을 올립니다. 바로 관우를 모시는 것과 같습니다. 재물 신으로 재복을 준다고 믿지요.

하지만 덩샤오핑이 집권한 78년 이후, 80년대, 90년대 출생들은 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제나라 환공때 재상을 지낸 관중(대만이야기 2화)은 곳간이 차면 예의와 절도를 안다고 하였지요. 중국도 점점 의식이 풍족해지면서 변하고 있습니다. 60대 50대들이 변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8-90년대 생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가 되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대만 사람들은 50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전에도 덴마크나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었고, 청나라의 통치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 대한 반발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섬나라 기질에서 유사성이 많아서 그런지 친일본적인 성향이 많지요.

제가 본 대만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선하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자기들을 좋게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야기를 합니다.

사철 따듯하고 강우량도 풍부하여 쌀도 넘치게 생산이 되고 여러 가지 과일도 풍부합니다. 역시 곳간이 비지 않아서 그런지 크게 왜곡되지 않은 기질을 보여줍니다. 또한 태풍과 지진이 많아서 그런지 절과 사당이 아주 많습니다.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는 지전을 태우며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아도 지진의 공포와 태풍의 엄청난 위력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가 흔히 중국인들이 만만디(천천히)란 말을 많이 쓴다고 말하지요. 제 생각에 대만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메이꽌시(沒關系, 괜찮아!)’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원 재학 중 친구네 집에 가서 구정을 보낼 때, 공원에 가족들과 함께 놀러갔습니다. 친구 형수가 돈이 든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친구 어머니가 가장 많이 쓰며 며느리를 위로하던 말이 ‘메이꽌시’였지요.

일이 약간 꼬이거나 내가 잘못을 해도 항상 웃으며 하는 말이 ‘메이꽌시‘입니다. 대만에도 폭력과 범죄, 사기꾼들이 분명 없는 거는 아닙니다. 그들도 스스로 해적의 후예라고 말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보편적으로 살기 좋은 곳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떤가요?

다는 아니겠지만 일제하에 눈치를 보면서 기회주의자들이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권력자가 됐었고, 일본 순사들은 또다시 변신을 하여 한국 경찰이 되었던 세상. 힘없는 백성들은 입에 풀칠이 급선무였지요.

▲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하여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사진설명 : 위키백과 / 사진출처 : 노컷뉴스(친일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이 '자랑스런 울산인'?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40702112706715 ))

그러다 동족이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전쟁으로 낮에는 국군에게 죽고 밤에는 인민군에게 처형을 당하는 기막힌 체험을 한 세대가 60, 70대입니다.

지난 수십 수백 년을 양반에게 아니면 일본에게 착취를 당하며 힘든 춘궁기를 경험해야했던 민족, 양심과 정의보다는 내 배를 채우기 급급했었지요. 또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끔직한 경험도 해야 했습니다. 여유보다는 뭐든지 빨리빨리 해서 살아남아야만 했지요.

그러다 몇 백 년 만에 보릿고개를 해결한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대통령이 몸소 농부들과 함께 벼를 베고, 농주를 시원하게 마셨습니다.

왜군 장교에서 공산주의자로 그리고 또 대한민국 장교로 변신을 거듭해도 아무런 문제도 흠도 아닙니다. 자신을 반대하면 마오쩌둥이 ‘자본주의자‘ 혹은 ’주자파‘ 한마디로 제거하였듯이 ’빨갱이‘ 한마디면 만사형통인 나라가 되었지요. 숙명처럼 이어져 내려오던 죽음의 공포, 보릿고개를 없앤 영웅의 추억은 60대 70대에겐 진위를 논할 가치도 없는 그 어떤 기억보다 우선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50대들은 유신교육을 받은 세대입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학교에서는 군사훈련을 받은 세대들이지요. 현재 권력의 상층부를 형성한 세대들입니다. 이들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편을 나눠야 편안합니다.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매사를 이기고 지는 승부로 봅니다.

의식이 풍족하지 못하던 시대에,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세대에게 변화를 바라는 건 불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 분명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마오쩌둥 시대에 금기어였던 자본주의는 덩샤오핑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한 마디에 공산의 개념은 사라지고 시장경제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유신세대가 물러나고 8-90년대 세대가 주류가 되면 지금과는 다른 사회가 될 것입니다. 적이냐 동지냐 구분보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성숙한 사회가 오겠지요.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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