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노는 것 밖에 몰랐다. 숙제도 학교에서 대충 후딱 해놓고 방과 후엔 무조건 놀았다. 학교도 순전히 놀기 위해서 일찍 갔다. 일찍 가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줄이 긴 그네를 실컷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학교에 너무 일찍 가서 엄마가 좀 있다 학교에 뒤따라 가봤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에서 혼자 그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보았다고 하셨다. 이렇게 노는 것은 어린 시절 내 삶의 전부였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걱정이 되었던지 인천교대 남자 대학생을 과외선생님으로 붙여주셨다. 선생님의 자취방에서 하는 과외 첫 날, 얼마나 내가 산만하게 굴었는지 선생님은 화를 내며 내 뺨을 때렸다. 난생 처음 뺨을 맞아봤기 때문에 엉엉 울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다 일러바치러 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억지로 앉혀놓고 우는 아이에게 산수 문제를 풀게 하셨다. 그 다음날부터 과외를 안 간다고 버텼다. 며칠 후 선생님이 나를 꼬이려고 야광 목걸이를 선물로 사들고 찾아왔는데 나는 선물만 전달받고 인사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엄마도 포기했다.

4학년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공부를 안 하면 ‘거지’가 된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었던 나는 틀림없이 거지가 될 것이라고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집에 가서 엄마를 원망하며 “왜 공부를 안 하면 거지가 된다고 알려주지 않았냐?”고 따졌다. 엄마는 “이제부터라도 하면 거지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공부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뉴욕에서 살 때였다. 6세가 된 아들도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다. 미국에서 2년을 지내다 귀국을 하게 되면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한글을 떼고 가야했다. 하지만 아들은 한글공부를 하자고 하면 막 돌아다녔다. 꼭 어릴 때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도 4학년 선생님처럼 협박을 하기로 했다. “너 그렇게 공부 안하면 커서 거지된다.” 그랬더니 아들은 거지가 되면 일 안하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며 거지가 되겠다고 했다.

나는 단 한 번에 먹혔는데 아들은 몇 번을 해도 협박이 먹히지 않았다. 거지가 얼마나 춥고 배고픈 존재인지 설명해줘도 믿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아들은 자신이 스스로 체험해서 확신하지 않고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여하튼 내가 자꾸 거지타령을 하니 아들은 거지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거지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거지’가 있는 곳을 찾아 갔다. 뉴욕 브롱스의 제이콥스 병원 후문엔 항상 거지가 있었다. 아들은 30분 넘어 1시간 가까이 거지를 꼼짝 않고 지켜봤다. 그 거지는 거의 움직임이 없이 앉아 있었고 돈을 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거지’가 편하긴 하겠지만 재미는 없을 것 같다며 거지가 되지는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한글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귀국 후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시작했으니...

이후 '거지'를 넘어선 아들의 미래 직업은 참으로 소박했다. 청소부, 아파트 경비원, 택배기사를 지나 태권도사범으로까지 진화를 했다. 아들에게 미래 직업의 키워드는 공부를 많이 안 해도 선택할 수 있는 소위 귀천 없는 직업이었다. 어린 아이도 욕심을 내는 높은 위치, 명예, 돈,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속마음을 알려주었는데 중학생 때였다. 커서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지만 불가능한 꿈이라고 했다. 항공대학에 가려면 공부를 굉장히 잘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싫어하는 자신은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난시까지 낀 시력도 너무 나빠 포기한다고 했다. 시력과 공부 때문에 조종사는 좀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지 항공관제나 정비 쪽에 관심도 보였다.

뉴질랜드에 간지 얼마 안 돼 아들은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도 가고 직업도 갖고 살겠다고 했다. 뉴질랜드에 간 지 얼마나 됐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뉴질랜드에서 산다고 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꿈 때문이다. 아들과 대화를 많이 나눈 국제학생 담당선생님은 아들의 꿈을 알고는, 뉴질랜드에 아주 좋은 항공학교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또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꿈을 포기한 아들에게 꿈을 살려준 것이다.

그런 아들이 6개월 정도 뉴질랜드 교육을 받더니, 좀 더 넓고 큰 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공부도 더 해야 할 것 같고, 도시에 살았던 아이라서 그런지 시골학교에서 3년 6개월을 더 있는 것이 너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미국은 여러모로 아이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갈 수 있는 미국 사립학교는 비용도 엄청났다. 한국아이들과의 쓰라린 인간관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아들이 항상 요구하는 것은 한국학생이 없는 학교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보접근이 가능한 학교는 한국학생들이 늘 있었다. 영어실력 때문에 받아줄 수 있을 지 없을 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비해 학비도 1/2 정도 싸고, 한국학생이 없는 캐나다 소도시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보다 인간적 냄새가 느껴지는 캐나다가 경쟁적 상황을 힘들어 하는 아이의 성격이나 현재 실력과도 더 맞는다고 생각했다.

캐나다는 미국과 달리 사립학교가 거의 없다. OECD 국가 중에서 공교육에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자하는 나라이고, 전체 학교의 95%가 공립학교로 공교육 위주다. 각 지역의 일부 교육청에서 외국 학생들을 국제학생으로 받는다. 교육청의 관리 하에 캐나다인 집에서 홈스테이 하면서 공립학교를 다닌다. 외국학생들을 받는 학교는 ESL(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을 위한 영어수업) 5단계 코스가 있어 영어가 부족한 아이들도 적응이 가능하다. 또 대학을 진학할 때도 미국 같이 SAT를 치르지 않고 내신만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아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들은 2008년 9월에 다시 한국을 떠나 캐나다 시골 도시의 고등학교에 10학년으로 진학을 했다. 그곳에서 10학년, 11학년을 마치고 2010년 9월에는 토론토와 가까운 도시로 옮겨 졸업학년인 12학년으로 진학했다.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에 이름난 교육청이 있는 '교육 도시'에 있는 학교를 옮겼다.

캐나다 소도시에서 10학년 11학년, 아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갑자기 공부를 쑥쑥 잘 할 수 있겠는가? 學力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닌데... 하지만 2년 동안 D 이하 과목이 하나도 없었다. 이는 캐나다 교육이기 때문에 이루어낼 수 있었는 성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학생이 학업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학생이 하고자 하는 열의만 있다면 학교차원에서 도움을 주는 시스템이다. 즉 학생의 부족한 면을 부모의 주머니를 털어서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세금으로 채워준다.

캐나다는 한 학년을 4번 평가한다. 아들은 처음, 캐나다에 갔을 때 10학년으로 들어갔는데 과학점수를 1텀에서 32점 받았다. 과락 수준이다. 2텀에서는 64점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둘 다 똑같이 70점 이하니까 기합을 받거나 매 맞을 깜이다. 하지만 캐나다 선생님이 보는 관점은 달랐다. 성적이 두 배 올랐기 때문에 아주 놀랄만한 일이라고 하시며 모든 아이들 앞에 나오게 해서 박수를 쳐주셨다.

10학년 때 배운 캐나다 지리도 무척 어려워해서 1텀에서 34점을 받았다. 하지만 4텀에서는 81점을 받았다. 이는 지리 선생님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에게는 시험 시간을 1시간 더 주셨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시험을 보려 하는 학생에게 시간되었다고 ‘그만’ 하지 않은 것이다. 국제학생이라서 그런 특별 배려를 해주실 수 있었겠지만 그런 배려가 가능한 교육체제인 것이다.

11학년 때도 공부가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캐나다는 숙제가 은근히 많다. 이 숙제를 무료로 도와주는 방과 후 교실도 만들어주어 도움을 받았다. 11학년에서 물리를 수강했는데 앞으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인 항공관련 학교에 가려면 물리를 꼭 패스해야했기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아들은 교무실에 가서 무료선생을 붙여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다. 학교에서는 상급학년 선배 중에 물리에서 뛰어난 학생을 무료선생으로 연결해주었다.

이렇게 학생 개개인의 부족함에 맞추어 배려해주니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선생님을 존경한다. 선생님과 잦은 접촉을 하게 되니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 놓아 문제도 예방되고 장래도 미리미리 준비할 수 있다. 아들은 ESL 선생님과 가까워 진로에 대한 상담도 많이 했는데 고교를 마치고 지망하고 싶은 항공학교도 골라놓았다. 5년(3년 학업+2년 인턴) 과정의 컬리지다.

또 다른 캐나다 교육의 좋은 점은 신체적 건강을 배려하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캐나다의 많은 아이들이 체육 필수학점을 따고도 추가 체육수업을 선택해서 듣는다. 아들도 마찬가지로 필수학점 이외에 체육과목을 계속 신청해서 들었다. 일주일에 3-4일을 1시간씩 체육수업을 하다 보니 기초체력이 상당해진다. 우리 시절에는 체력장이란 것이 있었다. 이 체력장 점수가 대학입학예비고사에 합산이 되었기 때문에 입시와중에도 틈틈이 공부에 지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체육 수업 절대량이 선진국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학교가 책상이라는 고문도구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꽁꽁 묶어 놓은 꼴이지 뭔가? 입시감옥이란 말이 왜 나왔겠나?

예전의 울 아들, 얼마나 여리여리했나? 키도 작고, 뼈도 가늘고, 바스러질 듯 바짝 말라서 누가 툭 치면 그냥 쓰러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아래 사진은 11학년을 마치고 2010년 7월 귀국했을 때의 모습이다. 한국으로 치면 고 3 여름방학 때다. 2년 동안 키도 쑥쑥 커서 178cm, 몸무게는 62kg의 건강한 청소년으로 변모했다. 이젠 장난으로 내 팔을 꽉 쥐면 팔이 다 저린다. 중학교 때 아들보다 컸던 친구들을 거의 다 넘어섰다. 아들 말로는 친구들은 공부하느라 잠을 못자서 크지 못했고, 자신은 하루 9시간씩 충분히 자고 매일 운동을 해서 무럭무럭 자랐다고... 허약한 체구를 운동으로 극복한 인간승리라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11학년을 마치고 한국에 왔을 때 아들의 팔뚝자랑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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