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도 안 된 일송은 영남 최초의 중등학교 협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꿈꾸는데

2. 협동 학교를 세우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때,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을사보호조약(1905년)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일본의 만행에 분해하였다. 그래서 고향의 선배이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던 이상룡선생을 찾아가서 의논을 하였다. 이상룡 선생님은

“우리가 이렇게 백주 대낮에 나라를 도둑맞은 것은 우리의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요?”

“나라의 힘을 길러야지요.”

“나라의 힘을 기른다 함은........?”

“우리나라가 잘살아야 하고, 우리 백성들이 한데 뭉쳐야 한다는 말이오.”

“백성들을 한데 뭉치자면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

“우선 배워야지요. 우리 국민이 무지 몽매해서는 일본의 손아귀에서 나라를 되찾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우리 백성을 가르쳐서 깨우치게 해야만 하오.”

이 말씀을 들은 긍식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향에 돌아온 긍식은 옛풍습에만 매달리는 이 고장의 사람들을 일깨우는데 앞장을 섰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젊은이를 교육하여서 앞으로 이 나라를 짊어질 일꾼을 길러야 겠다고 생각을 해서 학교를 세우기 위해 발을 벗고 나섰다.

그는 간곳마다 만난 사람들마다 붙들고 사정을 하였다.

“이제 우리도 후세를 길러내지 않으면 뒤지고 맙니다. 일본이 서양의 학문을 일찍 배워서 그 기술을 써서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고 덤비는데, 우리도 빨리 후세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나라를 잃게 될런지도 모른다.”

하고, 사정을 하였다. 한학의 고장 안동땅은 완고하기가 그지없는 고장이다. 그래서 좀처럼 그의 말이 먹혀들지 않았다.

“우리 고장은 서원이 많아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공부를 할 수 있는데 무슨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그러는 건가 ?”

“방금 말씀 드렸듯이 우리가 한학만을 읽고 앉아 있다가 우리는 일본의 앞선 과학 기술을 따라 갈수 없어서 결국은 일본에게 지고 맙니다. 이제라도 서양의 기술과 과학을 배워야 합니다.”

“아니 그럼? 우리글이 아닌 서양 오랑케의 글을 배우기 위해서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말인가?”

“오랑케의 글을 배우는 것도 오랑케를 바로 알고 물리치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글을 배우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앞선 기술을 배우지 않고는 우리는 그들에게 뒤져서 결국은 그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그들의 과학과 기술을 배워야 하며,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후학들에게 바르게 가르쳐서 애국정신을 길러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협동학교를 세우려는 목적입니다.”

하고 설득을 벌였지만, 완고하기 이를데 없는 이 고장에서 한학을 가르친다면 몰라도 양이의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는데 찬성을 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 주저앉을 그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렇게 완고하게 반대를 하는 한학자들이 모인 서원에 찾아가서 거기에서, 어떻게든 결말을 보려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어르신들의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이제 그들이 만든 물건을 쓰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벌써 많은 문물을 들여왔고, 그것을 써본 사람들은 그것의 편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엣것만 지키고 앉아 있겠다고 버텨보았자 지금 이처럼 나라꼴이 뒤떨어지고 어수선해 지기만 합니다.”

아무리 고집이 센 노인들과 한학자들 이었지만 어린나이에도 한학에 막힘이 없는 그가 내세운 새로운 이론을 끝까지 반대만 할 수는 없었다.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양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우리 것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잃고 나면 어떻게 우리 것을 지켜 나갈 수 있단 말입니까 ?”

 

▲ 일송이 나고 자란 내앞마을의 독립만세운동<출처 구글 이미지 캡쳐>

그가 협동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이 이루어지기 까지 약 2년이란 세월을 온 정력을 다 바쳐 열심히 노력을 하였고, 이런 정성이 인정되어 마침내 그 보다 무려 20살이나 위인 이상룡과 14년이나 위인 유인식, 김후병 같은 분들의 도움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고장에서 전통이 있는 호계서원의 재산을 기금으로 하고, 안동의 한학을 하는 유학자들의 도움으로 안동 천전에 있던 가산서당을 고치고 다듬어 드디어 문을 (1907년) 열게 되었다. 이 협동학교는 영남지방에서 맨 처음으로 생긴 중등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의 교장은 류인식선생이 맡고, 김긍식선생은 학감(교감)을 맡아서 학교의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완고한 이 고장에서 옛것만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한학만을 공부해온 선비들은 이 학교의 개교를 그렇게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을 배워서 이 나라를 지켜 나가야지, 자네들 거 지금 뭐 하는 짓들인가 ?”

하는 어른들의 꾸중도 있었고, 이들을 시기하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제까짓 게 뭘 안다고 누구 앞에서 함부로 선생이야 ?”

하고 김긍식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젊은 혈기로 세운 것이지만 저래서는 도저히 안 돼.”

하는 어른들의 반대가 점점 늘어나 이제 호계 서원에서 마져도 계속해서 지원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한학자들도 이제는 손을 떼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되자, 협동학교를 세운 사람들이나 학생들은 더욱 더 학교를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이 학교를 끝까지 계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각오가 얼마나 굳은 것인지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학교를 지키겠다는 각오를 우리 모두가 길러온 머리를 모두 깎으므로 해서 행동으로 보입시다.”

선생과 학생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버티었다. 이것은 요즘 선수들이 흔히 하는 삭발투쟁이었다. 이것을 본 당시 (개화가 되어 삭발령이 나오기도 전)의 이 고장에 사는 완고한 유림(유학자)들은 크게 노하여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손은 효지 시야(우리의 몸과 머리카락 손톱, 발톱까지도 모두 부모로 부터 받은 것이므로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는 것은 효도의 첫걸음이다)라는 가르침도 모르는 불한당 같은 놈들이로구나.”

하고, 이 행동으로 이들은 도리어 고장 사람들에게 금수처럼 여겨서 상대를 하려 하지도 않았다. 한마을에 살아온 그들을 마치 짐승이나 오랑캐를 대하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장 사람들의 반대가 그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데 데다, 신식학교를 통해서 신식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민족정신을 씻어내고, 일본의 침략정신을 깊이 심어서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생각했던 일본은 이 학교가 자기들의 도움이나 지시를 받지 않고 세워진데다가 스스로 우리 민족정신을 기르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 학교는 일본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같은 민족이면서도 우리나라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까지 미움을 사고 있었다.

이듬해인 1908년 일본은 이 협동학교가 자기들의 지시를 잘 받지 않는다고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탄압을 한 것은 신식학교의 교육과정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교과목을 정하고 시간을 운영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주장하는 학사운영의 문제란 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이 협동학교는 민족주의정신을 넣어주기 위해서, 국사를 중요한 교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특히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깊이 심어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독립운동이라고 생각을 하여, 이 학교가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불어 넣는데 힘쓰는 민족주의 색채를 띄어 일본에 반대하는 교육을 중점을 두어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자기들의 명령을 따르지도 않고, 자기들이 가장 싫어하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나, 고유 정신등의 민족주의 교육을 하는 협동학교를 가만히 두고 볼 일본이 아니었다. 더구나 일본은 이 학교 뿐 만아니라 앞으로 이러한 학교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왜병들은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 마구 쳐들어와서 공부하고 있는 교실에 무차별하게 사격을 했다. 전쟁을 하는 적군들이 있는 곳도 아닌 교실을 향하여

“저기 교실을 향해서 마구 쏴라. 저 속에 있는 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도 좋다. 마음 놓고 쏴 버려 !”

하고, 일본 군인을 몰고 온 부대장은 명령을 했다. 세상에서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만행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을 향해서 마구 쏘아대는 총소리는 온 골짜기를 울렸다.

“따당, 따다앙, 따당, 땅.”

울려 퍼지는 총소리와 함께 공부를 가르치고 서계시던 김기수 선생님이 가슴을 부등켜안고 쓰러지셨다. 그 교실에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 나와서 선생님을 에워쌌다. 그러나 무자비한 일본놈들의 총소리는 그치지 않고 울렸다. 김기수 선생님을 에워싸고 있던 학생들 중에 이종화란 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또 쓰러졌다. 이 모습을 본 학생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이 겁에 질려서 책상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총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 엉성한 흙벽으로 발라진 사무실의 벽을 뚫고 들어온 총알에 안상덕 선생님도 쓰러지고 말았다.

학교 안은 총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딍구는 사람, 부상을 입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책상 밑에 업드려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는 사람으로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왜병들은 더 이상 학교 안으로 쳐들어오지는 않고 한바탕 사격을 하고서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악독한 공격을 받은 협동학교는 김기수, 안상덕 두 선생님과 학생 이종화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상당수의 학생이 부상을 입는 등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이었다. 일본은 이런 일이 있고난 뒤에도 극악무도한 탄압을 계속하였으나, 협동학교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서 1911년에는 23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는 서른한 살이 되던 해인 1909년에 본격적으로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할일의 방향을 잡아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간 그는 양기탁선생의 집에서 당시 우리 민족지도자들의 모임인 󰡔신민회󰡕의 간부들과 만났다. 여기에서 독립운동의 방향과 군관학교의 설립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돌아왔다. 그는 우선 영남지방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였다. 박중화, 남형우, 안희재 등과 함께 영남지방 일대의 뜻있는 동지들을 한데 모아 우리 민족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온 힘을 기우렸다. 이 '대동청년회'는 1909년에 조직된 청소년을 중심으로 하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로 회원 수는 약 80여명 뿐 이었다. 그러나 전국에 고루 분포 되어서 3.1운동 당시에는 운동의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활약한 애국청년들 이었다. 그 후에도 국내외에서 비밀 지하운동을 계속하여 우리 민족이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난 8.15 해방이 되도록 까지 이어왔던 단체이었다. 일본의 감시가 이런 움직임을 모를 리 없어서, 일본의 탄압이 점차 자신들을 조여오고 있음을 눈치 채었다.

1910년에 새로 부임한 통감 데라우찌가 강력한 헌병, 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우리 동포들을 탄압하는 한편,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등의 신문을 내지 못 하게하여 국민의 눈마저 가리는 일을 시작 하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8월 29일에는 이완용을 비롯한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등 몇몇 매국노들을 시켜서 한일합방조약을 강제로 맺도록 하였다. 임금님이 끝까지 조인을 하지 않자 8월 29일 매국노 이완용은 윤덕영을 시켜 황제의 어새를 몰래 찍게 한 가짜 조약으로 우리나라를 통째로 자기의 영토로 삼겠다는 일본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순 억지조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나라를 빼앗았다. 이 때, 그렇지 않아도 감시의 눈길 속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며칠을 두문불출하고 있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서 굳은 결심을 하고 협동학교의 임원회를 열었다.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 견딜 수는 없게 되었소. 이제 내가 이 학교의 모든 운영을 유동태 동지에게 맡기고 이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 갈까 합니다.”

하고, 학교를 동지들에게 맡기고 훌훌 떨고 서울로 올라가서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애국운동의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의 간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신민회는 1907년 미국에서 활약을 하던 안창호가 귀국을 하여 겉으로는 교육사업을 내세우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민족운동을 위한 비밀 독립운동단체로 조직한 것이었다. 이 신민회에는 이갑, 양기탁, 신채호, 이동녕, 이승훈, 김동삼 등을 중심으로 400여명의 민족의식이 강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앞장을 선 단체였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대로 종노릇을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가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일본에 무력으로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비밀리에 피끓는 젊은 동지들을 모아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1)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여야 하며,

(2)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을 위해 싸울 군대를 기른다.

는 두 가지를 계획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구상 하였으나, 일본의 감시 속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감시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글 출처 : ebook 일송정 푸른솔은 1(저자: (공)저 김선태 / 원글 주소: https://books.google.co.kr/books?id=6pNBAwAAQBAJ&pg=PT1&dq=%EC%9D%BC%EC%86%A1%EC%A0%95+%ED%91%B8%EB%A5%B8+%EC%86%94%EC%9D%80+1&hl=ko&sa=X&ved=0ahUKEwjZ1tXcwfjRAhXBUrwKHY_CCzIQ6AEIGjAA#v=onepage&q=%EC%9D%BC%EC%86%A1%EC%A0%95%20%ED%91%B8%EB%A5%B8%20%EC%86%94%EC%9D%80%201&f=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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