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감시를 피해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 준비를 하다

서른세 살(1911년)이 되는 해에 서울에서 뜻을 같이 했던 피 끓는 청년들과 함께 만주로 옮겨가서 뜻을 펼 계획을 하였다. 그가 만주로 가게 된 데는 일 년 전(1910년)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기던 이웃에 사시던 족숙이 되시는 김대락이라는 분이 65세나 되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피신을 한 것을 보고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미 이 고장은 1860년대부터 우리 민족이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었으며, 1905년 일본이 나라를 빼앗으려는 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 일본에게 잃은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독립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디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설립(1908년)하여 우리 농토를 강제로 사들여서 우리 동포들을 소작인으로 만들어서, 일본국민의 식량을 생산하는 노예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과 조국의 광복을 찾겠다는 우국지사들은 낯선 만주 땅으로 들 떠나고 있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리리가 났네. 문전옥답은 어디다 두고 북간도 행차가 웬 말인가?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리리가 났네........”

하는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아리랑의 곡조에 실어 고향을 떠나는 슬픔을 노래하면서 괴나리봇짐과 살림도구를 등에 진채, 아이들을 업고 걸리고 정든 고향을 등지던 우리 민족 이었다.

“잘들 가! 어디에 가더라도 몸이나 성해야 혀! 목숨만 살아 있으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여. 어여 가! 으흐흐흐....”

“잘들 계셔요. 우리야 어디 가서라도 젊으니까 살아 갈 수야 있겠죠 뭐. 노인들이 어디로 가시지도 못하고 이렇게 고생을 하시는데 저희들만 잘살자고 떠나는 것 같아서 면목 없습니다.”

떠나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눈물을 주체치 못하고 마을 어귀는 눈물바다가 되곤 하던 모습을 이 시절의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더구나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라는 것을 강제로 맺게 만들어서 합법적이라는 주장으로 우리나라를 자기들의 영토로 만들어 버린 뒤로는 우리 동포들이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만주로 온 그는 유하현 삼원보라는 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 여기에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는 고향의 선배이면서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던 이상용 선생이 먼저 와서 이곳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왕족이면서 마지막까지 왕을 모시고 있었던 신하인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해방후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을 지내신분)등 6형제와 이동녕 등 많은 선배와 동지들도 먼저 와서 있었다. 서울에서 양기탁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면 우리 동지들이 있는 삼원보로 가시오. 거기에는 나의 동지들인 이상룡선생과 이시영선생 등이 김동지를 따뜻이 맞아줄 것이오. 김동지의 활약을 기다리고 있겠소.”

하며, 그를 신민회가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고 있는 이곳으로 갈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그는 주저 없이 이곳 만주 땅에 먼저 와있는 동지들이 자리 잡은 이곳 삼원보를 향하게 된 것이었다.

먼저 온 이분들은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상당한 자금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이끌고 왔었다. 그들이 이렇게 깊은 산골인 이곳 삼원보에 이민을 와서 자리를 잡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이 심심산골의 임자 없이 버려져 있는 울창한 숲과 황무지를 빌려 개간 사업을 해서 많은 교포를 이곳으로 이민을 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끝없이 너른 만주 벌판이라고 하지만, 자기들의 땅에 우리 민족운동가들이 살 수 있는 땅을 따로 마련해 주려 고는 하지 않았다. 버려진 땅이라도 우리 동포들이 개간을 하여 농사를 짓는 것을 보면 배 아파 하고, 자기들의 몫을 빼앗긴 것처럼 시기를 하는 그들 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깊은 산골에 버려진 땅을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 갈 계획이었다.

그는 만주에 오자 본명인 긍식을 동삼으로 고쳤다. 이름을 동삼(東三), 자를 성지(省之), 호를 일송(一松)이라고 한 것은 한자를 연결하여 동삼성지일송(東三省之一松)이 되고 이 뜻은 <만주 동쪽의 세 성(길림성,봉천성, 흑룡강성)에 우뚝 선 한 그루의 소나무>라는 뜻 이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 동쪽의 세 성에서 가장 뛰어나고 우뚝 선 으뜸이 되겠다는 각오를 한 것이다. 선생이 이렇게 이름까지 바꾼 것은 자신의 결심을 나타내고,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다.

이곳에 온 후 일송은 통화현에서 이시영, 이동녕등과 함께 교포의 생활이 안정되게 할 수 있는 방법과 교육문제를 등을 여러 가지로 의논 하였다.

“굶주림에 허덕이고, 마적들의 습격으로 나날이 불안에 쫓기는 그들을 어떻게든 한데 모아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해 주어야 할 게 아닙니까?”

선생이 이상룡 선배님께 의논을 드렸다. 의논 끝에 이곳에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동포들이 우선 만주 사람들과 말이 통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시급한 것이 중국말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중국어 강습을 시작하였다.

▲ 만주의 독립군 모임<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다가 그는 만주로 와서 해야 할 목표였던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용과 이회영, 이동녕의 후원을 얻어서 '경학사'라는 단체를 조직 하게 된다. '경학사(耕<밭갈경>學<배울학>社<모일사>'는 말 그대로 밭 갈고 공부하는 모임 이었다. 고향을 떠나 멀리 피난을 온 동포들의 모든 일용품과 식량 등을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게하고, 독립운동의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낮에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스스로 살아갈 식량을 생산 해내고, 독립운동을 하려면 군자금과 군량미도 필요로 하였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깊은 산골에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서 이 모든 것을 해결 해가려고 마음먹은 것 이었다. 밤에는 민족정신을 길러주기 위하여 민족의 우수성과 우리 민족이 지녀온 자랑스러운 고유문화를 일깨워 주고

“이 너른 벌판을 호령하던 우리 조상들을 생각하여 우리는 고구려의 강인한 무사정신을 이어 받아야 합니다. 지금 비록 우리가 남의 땅에 빌붙어 살지만 이곳은 우리 조상들이 말달리며 호령하던 우리의 영토였습니다. 우리가 힘을 길러서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본을 몰아내고, 더 나아가 이 만주 벌판도 차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린 지금 정든 고향땅을 등지고 낯선 땅에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신을 이어 받읍시다.”

하고 가르쳤다. 또 독립 투쟁을 하기 위한 군사학을 강의를 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신흥무관학교'로 바뀌게 되는 신흥강습소를 열어서 여기에서는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독립군의 지휘자가 될 사람들에게 민족교육과 아울러 독립운동을 할 군관으로써 할일을 가르쳐서 중견간부를 양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이미 1909년 서울에서 양기탁의 집에 모인 신민회 간부들과의 비밀 집회에서 결의한 것이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서 독립운동을 꾸준하게 계속시키려면 만주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겨 설치하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양기탁, 안태국, 김구, 이승훈은 국내에 남아서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계속하여 조달하기로 하고, 이회영, 이동녕, 주진수, 강유순 등은 만주에 가서 독립기지 건설에 알맞은 곳을 찾기로 하였었다. 여기에 만주에 있던 이시영, 이상룡이 협력을 하여 이곳이 일본군의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여 우리 동포들이 만주에서 맨 처음 봉천성 유하현에서 민간단체로 조직이 된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첫째가 독립운동이요,

둘째는 군관의 양성이었고,

셋째는 만주에 사는 동포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호하고 권익을 지키며,

넷째로 후세들에게 올바른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후세교육 이었다.

대표로는 이철영이 사장을 맡고, 일송 선생은 조직과 관리를 맡아서 실제적인 책임자로 모든 일을 책임지고 처리 하였다. 맨 먼저 경학사가 개간할 땅을 찾아 농토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젊은이들을 작업에 동원하여 실제로 논밭으로 만드는 일을 맡아 하였다. 또, 저녁이 되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일깨우는 학습을 하도록 준비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때 그의 일을 돕고 있던 사람으로 그의 동생인 김동만이 동지 이원일과 함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만주 사람들에게는 황무지로 쓸모가 없던 땅을 우리 동포들이 피땀을 흘려서 우거진 숲을 베고 땅을 파서 농토로 일구어 논과 밭으로 가꾸어낸 것이다. 이러한 일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동포들을 이끌고 나가는 지도자들은 남다른 노력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김동삼 선생은 이 고장에 와 있는 동포들을 하나로 뭉쳐 함께 독립운동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 온 만주 벌판을 돌아다니면서 외치고 그들을 설득하였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동포들이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라를 되찾겠다고 나서면서도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하나마나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헐뜯고 믿지 못하여 남북으로 노소로 갈려서 당파 싸움만 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게 아닙니까? 우리 힘을 한데 모읍시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설득도 하고, 애걸을 하였다. 이 무렵의 선생이 이런 일을 하는 동안에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든 생활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넓은 만주 땅 일대를 거의 편답하여 매일 도보로 백리 길을 걸었다. 어깨에 낡은 담요 한 장을 메고, 겨울에도 「싸이혜」라는 만주사람들이 여름에 신는 신발을 신고서 발가락이 얼어 동상이라도 걸릴까 염려하여 마냥 뜀박질로 길을 갔다. 한 푼짜리 좁쌀떡 한 개를 사서 얼어붙은 떡 한 조각으로 점심과 저녁 두 끼를 때웠으나, 동포나 동지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애를 쓰며 뛰어 다녔으나, 경학사의 일은 선생의 뜻대로만 움직여 지지 않아서 동포들은 무서운 향토병에 시달리고, 거기다가 계속되는 가뭄으로 황토 땅은 돌멩이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만 갔다. 애써 개간한 농토에서 곡식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비실비실 말라만 갔다. 이곳에서 농토를 일구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려던 동포들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이 경학사를 만들어 동포들을 잘 살게 하려고 했던 지도자들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이 우리를 버리는구나. 이렇게 착하고 오직 나라를 위해 일 하겠다는 우리들이 하늘로 부터 복을 받지는 못할망정, 우리가 무슨 죄업을 지었기에 이렇게도 혹독한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하였지만 차마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메마른 벌판에서 먹을 것이 없는 동포들을 더 이상 붙잡아둘 아무런 이유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한 해 농사를 마친 1912년에 마침내 경학사를 해산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새로운 터전으로 가꾸려던 지도자들의 첫 번째 꿈은 가뭄과 흉년이라는 하늘이 내린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여러분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 민족의 앞날을 걸고 이곳에 우리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만주지방에 온 우리 동포들에게 독립의 꿈을 키우는 곳으로 가꾸어갈 계획이었는데 하늘이 우릴 돕지 않는가 봅니다. 어찌하여 날씨가 이렇게 가물어 여러 동지들이 땀 흘린 만큼의 보람도 없이 이 넓은 농토는 다시 황무지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동지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일송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아프고, 그렇게도 기대를 걸었던 이곳에서 실패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앞날이 영영 막히는 것만큼이나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러나 하늘을 원망 한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출처 : 전자책 [일송정 푸른 솔은] 원본 파일 /http://www.upaper.net/ksuntae/107814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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