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 맘 ≻ 몸,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네요.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지요(不二 而 不一). 둘이 아니라는 관점은 본체(本體), 하나도 아니라는 것은 작용(作用)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지요. 이것은 체(몸)와 용(몸짓)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무슨 공부를 하건 알아 두면 ‘철학적 사유’의 단초가 되지요(연재물 24, 37회).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현실, 역사’에 깨어있고,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려있는 문제의식이지요.

마음은 생각이고, 생각은 마음이고, 곧 뇌의 작용을 말하겠지요. 생각(生覺)은 몸과 함께 하고 있는 마음의 바탕에서 일어나는 앎(識) 곧 ‘깨달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네요. 마음은 실체가 없는데 작용은 생생하게 하지요. 불교 팔만대장경을 한 마디로 말하면 ‘心(마음)’ 공부라 하지요.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하고 있으니까요.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지어낸다’고 보는 것이지요. 바로 심법(心法)을 말하는 것이지요.

▲ 달마도-김명국

그런데 불교철학에서는 마음과 생각을 구별해서 접근을 하고 있네요. ‘마음’은 순수한 본 마음(本性), 양심, 영혼(9식)을 말하고, ‘생각’이라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번뇌 망상 등 총체적 생각을 말하네요(6,7,8식). 이 생각을 논리적 합리적으로, 일관성 지속성 다양성 있게 하는 것을 ‘철학적(哲學的) 사유(思惟)’를 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람의 본 마음(性品)에 대해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말씀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불교철학에서는 이 둘도 아닌 성공설(性空說)을 말하네요. 본 마음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허공 같은 마음을 바탕으로 착한 생각을 일으키면 성선이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 성악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6조 혜능 대사는 <육조단경>에서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요(不思善 不思惡).

달마 대사는 ‘마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네요.

心心難可尋(심심난가심)
寬是徧法界(관시변법계)
窄是不用針(착시불용침)
 
 
마음 마음하지만 가히 찾기 어렵구나!
넓기로 말하자면 천지에 두루하고
좁기로 말하자면 바늘 끝마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6조 혜능 선사는 이렇게 말씀했네요.

不是風動(불시풍동)
不是幡動(불시번동)
仁者心動(인자심동)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서산대사께서는 아래와 같이 깨달음을 노래했네요.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
從本以來(종본이래)
昭昭靈靈(소소영영)
不曾生 不曾滅(부증생 부증멸)
名不得 狀不得(명부득 상부득)

一物者 何物?(일물자 하물?)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 또한 그릴 수 없다.

이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 선사들은 이런 의문과 질문을 통해 불변하는 본 마음(9식)과 변하는 생각(6,7,8식)에 대해 탐구를 해 놓았네요(연재물 31회). 하여 그 본 마음 자리를 증득한 그 결과물들을 ‘깨달음의 노래’라고 하는 게송(偈頌), 오도송(悟道頌), 열반송(涅槃頌) 등으로 토해 놓은 것이지요. 물론 그 깨달음의 경지(도 진리)는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모순(矛盾)을 저지르면서 말이지요.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노자 1장)
開口卽錯. 以心傳心. 不立文字. 敎外別傳. 言語道斷(불교철학)
書不盡言 言不盡意(주역 계사상 12)
글로는 말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는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상학 주주통신원  saram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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