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에 싸인 깊은 밤, 어머니 어깨에 기대 누워 처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 소리를 듣노라니 잠은 멀어져갑니다. 가을비인가? 빗소리가 행여 어머니의 잠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살며시 어머니의 뺨을 어루만져봅니다. 어머니의 눈매가 마치 내게 말을 하는 듯합니다. “가을비가 오고 나면 추위도 한 발짝 다가온단다. 추위에 상할라. 조심하고 이불 잘 덮어라” (어머니는 언어기능상실로 말을 못함)

저는 대답합니다. “엄마, 걱정 마! 엄마 체온이 나를 따뜻하게 해줘. 이불보다 좋은걸! 내년 겨울에도 얼음 같은 손발을 이불속에 넣으면 엄마가 나를 또 따뜻하게 해줄 거지? 엄마의 따뜻한 손을 만지고 있으면 정말 좋단 말이야”    

2013년 11월 어느 가을밤에-

▲ 我和阿母(엄마와 나)                          라문황 작

어머니가 병석에 눕기 전까지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효도라고 할 것도 없는 평범한 아이의 기본이었습니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니의 손을 깍지 끼고 걷거나, 또는 어머니 품에 기대어 재롱을 부린 적도 없습니다.

2006년부터 어머니의 행동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가족모임으로 약속장소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도와 차에서 내리고, 작은 올케와 언니 동생들이 휠체어에 앉히고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차를 마치고 어머니 곁으로 갔더니, 올케가 와서 어머니가 화장실에 가려는데 뒤처리를 부탁하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주차를 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여기 누구하나 왜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엄마가 나를 기다려야해”라며 못마땅하게 말했습니다.

작은 올케가 미안한 기색을 띠며 입을 엽니다. “어머니가 넷째 딸만 오기를 기다려요. 다른 사람에게 뒤처리를 못하게 하네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왜 나만을 기다렸는지. 내가 숙련된 간호사였기에 어머니는 편안하고 믿음이 갔던 것이지요. 그리고 더욱 중요했던 이유는 어머니의 존엄이 모든 자식들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로지 한사람에게만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이고 자존심을 유지하고 싶으셨지요.

의사는 어머니의 병을 파킨슨병 소뇌위측증으로 진단했습니다. 두 다리는 점점 힘을 쓸 수 없고, 걸을 수도 없어지자, 날이 밝으면 거실로 업혀 내려와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날이 어둑해지면 밖에 나가 한 바퀴 돌고, 들어와 목욕을 하고나면 피곤해합니다. 그러면 위층에 올라가 눕고 싶어 하지요.

▲ 我的母親(나의 어머니)                  라문황 작

어머니 침실은 작은 편입니다. 침대 하나에 작은 화장실이 딸려있고, 텔레비전이 놓여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침상에 누우면 저도 옆에 따라 누워야 했지요. 만약 제가 거실에 남아 앉아있게 되면 어머니는 방안에 홀로 있어야 되고, 그러면 심하게 불안해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잠이 깬 저는 어머니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다가 의식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위급하게 병원으로 이송하여 깨어난 후 어머니는 더욱 혼자 남아있는 걸 두려워하며, 제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손을 끈으로 묶어놓자고.

어느 날 저는 야채시장에 가서 돌아다니다 좀 늦게야 집에 들어왔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오랜 병에 효자 없다더니, 너도 나를 간병하느라 힘드냐. 떠나고 싶냐”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몸이 아파 홀로 누워있을 때, 문 밖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가족들의 동정과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그런 고독감, 저 역시 몸소 체험했지요. 저는 매월 극심한 생리통을 앓아야 했습니다. 16년을 괴롭혔지요. 저는 압니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지.

저 역시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점점 늘어나며 우리는 밤낮으로 서로를 종일 지켜봤습니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었던 그날 이후 병세가 악화되면서 그해는 여러 차례 병원을 찾았고, 장기 입원도 하면서 어머니와 저는 둘만 보내는 시간이 더욱 늘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세상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눴습니다. 지난 모든 일들을 끄집어내면 어머니는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을 했고, 덕분에 어렸을 적 나의 기억도 더욱 풍성하게 채워졌습니다.

하루는 “엄마, 애를 8명이나 낳았는데, 내가 다섯 번째로 태어나서, 가장 관심 밖에서 막 키웠지? 그래 안 그래?”

어머니는 듣고 웃기만 합니다. “8명 중, 큰 언니는 첫째라 귀한 보배였고, 둘째 언니는 딸로 태어났어도 여전히 사랑받았고, 세 번째는 기다리던 오빠, 고추를 달고 나왔고, 또한 장손이었으니 온 가족의 기쁨이었지. 네 번째는 셋째 언니야. 딸 셋은 복을 가져온다는 속담이 있잖아. 어려서부터 유난히 예뻐서 엄마 아빠가 얼마나 귀여워했어.

여섯 번째는 큰 남동생, 고대하던 고추가 또 나왔으니 모두가 기뻐하였지. 그래서 사랑받는 보배였고. 일곱 번째는 엄마가 마지막이라고 했지. 어린 딸, 그리고 막내에다 예쁘고 애교덩어리였으니 당연히 사랑을 받았고. 여덟 번째는 생각지도 못한 고추가 또 태어난 거야. 잘생긴 꼬마. 어려서부터 말을 잘해 할머니는 <변호사>라고 부르며 귀여워했지.

나는? 다섯 번째로 고추도 없지, 까맣고 못생긴 대다 들창코, 어디 사랑받을 구석이 없잖아. 그래 안 그래?”

제가 말을 마치자, 어머니는 “열 손가락 깨물어봐라, 모두 아프다”고 말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양 손을 당겨 열 손가락을 모두 깨물었습니다. “엄마, 다섯 번째 손가락은 안 아프지?” “그래, 안 아프다.”

어머니는 이어서 “아이들이 그렇게 많으니, 누가 울면 그 아이부터 챙기지. 너는 어려서부터 울지도 않고,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단다. 이제부터는 너도 소리 내어 <요구>해야 남이 알지”라고 말했습니다.

▲ 我的阿娘(나의 엄마)                        라문황작

당시 어머니의 숨소리는 이미 좋지 않았습니다. 언어를 상실하기 전 제게 들려준 말이었고, 제 뇌리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입니다. 만약 그 당시 몇 년간 밤낮으로 엄마와 함께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볼에 얼굴을 부비는 게 어떤 건지, 어머니와 나누는 애교스런 말투가 어떤 건지 몰랐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잠깨어 바라보니, 어머니도 잠을 못 이루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봅니다. “엄마, 잠이 안와? 엄마랑 함께 잘까?” 어머니가 눈을 깜박입니다.(어머니는 언어기능을 상실하고, 좋다는 표현을 할 때 눈을 깜박임) 저는 어머니의 작은 침대로 올라가 베개를 함께 베고, 바짝 붙어서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이며, 어머니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렸습니다. 어머니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지요. 우리 모녀의 정은 이렇게 자라났습니다.(번역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我和阿娘的情份

寂静的夜裡,我依偎在母親的肩膀上,聽著屋簷下傳来的雨滴聲,睡意顿失,這是秋雨嗎?雨聲似乎也擾亂了母親的睡眠,我撫摸着母親的臉頰,母親的眼神似乎在告訴我,一陣秋雨一陣寒,小心着凉蓋好被子。(媽媽因為做了氣切,不能說話)。

我說:老媽,别担心啦,有您的身體焐着我,比被子暖和,希望明年的冬天,我也能把冰冷的手脚伸進被窩裡,讓媽媽您幫我焐着。摸着媽媽您暖暖的手,真好。

這是在2013年11月的某個秋夜裡。

在母親卧病之前,我對母親的感情就是做孩子應有的基本孝道,在我的記憶裡,我没有拉過母親的手或依偎在母親的懷裡撒嬌過。2006年母親開始行動不方便時,有次家族聚會,到了聚會場所,母親下車,弟媳,姐妹們用輪椅推著媽媽進去飯店,當我把車停好,回到媽媽身邊時,弟媳告訴我,媽媽要上厠所,正等著我幫忙處理,我說,我停車花了那麽久時間,妳們任何一個人都可以幫忙啊,為什麽還要等我。弟媳面帶抱歉的對我說,媽媽堅持要等四姐您來再讓您處理。後來我明白了,媽媽為什麽一定要等我,因為我是護士,我的動做熟練,讓媽媽覺得有安全感,舒服。還有最重要的是~母親的尊嚴不能在每一個孩子的面前瓦解,母親只想在一個人的面前卸下她的隱私和自尊心。

醫生對母親的診断是帕金森病小腦萎縮症。雙脚漸漸無力,無法走動,白天背到樓下客廳坐。黄昏帶她出去走一圈,洗澡後累了,她就想上樓到床上躺著。母親的卧室很小,就只有一張雙人床,一個小厠所,一台電視,母親躺在床上時,我也躺在床上陪她,我如果到客廳坐椅子,留母親自己一個人在房間,她的情緖就會不穩定了。有一天清晨我睡醒要喂母親喝開水的時候,我發現母親昏迷了,送醫院搶救母親醒來後,開始害怕自己一個人,睡覺也要緊拉著我的手。我開玩笑的跟母親說,拿條繩子來把我們的手綁一起吧。

有一天,我去菜市場逛了久一點,我回到家,母親看到我就掉淚了,母親哭著說:久病無孝子,妳是不是照顧我厭倦了,想離開了。對於身體有病痛時,自己一個人躺在床上,聽著家人在房外的走動聲,大家聚集歡笑著,而自己無法参與的那種孤獨感,我是親身感受過的,我的身體每個月嚴重的生理痛,折騰了我16年,讓我很明白母親為什麽會如此的不安,慌恐。

漸漸的,我也放不下母親了,我和母親就這樣日夜的相守著。母親在那次昏迷後,病况不穩定,一年進出加護病房多次,長久住院,讓我和母親獨處的日子更多了。每天只有我們倆個人,只能天南地北的聊著聊著,把陳年往事都翻出來,母親一一的细述著,也補足了我的童年記憶。

有一天我跟母親說:您生了8個孩子,我排行第五,是最不被關心的長大的,對不對?媽媽聽了笑著,我又說:八個孩子,大姐是您第一孩子很寶貝。二姐雖是第二個女孩子,但還是很新鲜。第三個是大哥,帶來了辣椒(男生),又是長孫,舉家歡喜。第四個是三姐,俗話說第三個女兒吃命(命好會帶來福份),自幼就很漂亮,所以爸媽也疼愛著她。第六個大弟,期待中的辣椒又出現了,大家開心,又是個被疼愛的寶寶。第七個生完,媽說不生了,是小妹,老么嘛,很漂亮又會撒嬌,當然被疼愛著。第八個小弟,意外的一根辣椒,是小帥哥,從小奶奶愛叫他<辯護士>就這樣被寵愛著。

我呢?第五個,没有辣椒,又黑又醜加上朝天鼻,實在找不到疼愛的理由,對不對?我說完,媽媽說:十根手指頭,咬哪根都會痛的。我拉起媽媽的雙手,把十根手指頭都咬了。我說:第五根指頭不痛吧?媽媽說:是,不痛。媽媽又繼續說:孩子那麽多,誰哭了我就給誰吃的,妳從小就是不會哭,不會要。今後妳要懂得<要>。這是我的母親呼吸狀况不佳,在做氣切前對我說的話,也是母親最後留在我腦海里的聲音。

如果没有這幾年日夜的相處,我不懂得把臉貼在阿娘的臉上,也不懂得用撒嬌的口吻跟她說話。夜裡醒來,看到媽媽没睡覺,睁大眼睛看著我。我說:老媽,睡不着?我陪您睡好嗎?媽媽眨眨眼(媽媽氣切不能說話,用眨眨眼表示好)。我爬上媽媽的小床,共用一個枕頭,偎着媽媽,輕輕的拍着媽媽的肩膀,在媽媽的耳邊,小聲的哼著不成曲的音調,媽媽安詳的閉上眼睛,我和阿娘的情份就這樣滋長著。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라문황 주주통신원  low030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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