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선생님이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물으셨을 때 대다수 여자아이들은 ‘승무원’, ‘발레리나’, ‘피아노 선생님’, ‘미술 선생님’ 등등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 또한 발레리나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기에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했고 부모님께 발레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아버지 대답은 “안 돼”였다. 그러시곤 “태권도를 배우면 발레 학원 보내는 걸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외모에 조금씩 신경을 쓰던 나이라 땀나고 냄새나는 남자아이들이 가득한 태권도장에서 도복을 입고 ‘태권’을 외친다는 거 자체가 창피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게 느껴져 기겁하며 싫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견은 확고하셨고, 결국 나는 마지못해 태권도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아직도 처음 태권도 학원에 들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녀 가릴 거 없이 크게 ‘태권’을 외치며 발차기와 손동작을 땀 흘려가며 하던 모습, 매섭게 살아있는 눈빛, 땀 냄새와 더불어 열기가 가득 차있던 공기,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 나는 태권소녀라 불릴 만큼 열심히 태권도를 했다. 남들은 공부에 머리 싸맬 고등학교 1학년 때, 공인 3단을 따기 위해 방과 후 많은 시간을 태권도장에서 보냈다. ‘겨루기’ 테스트를 위해 사범님들과 발차기 훈련을 하느라 다리에 멍이 울긋불긋 들었어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태권도는 내 삶의 일부였다.

운동하는 것에 습관이 들어서였을까. 그 뒤로 대학, 대학원, 석사 후 연구원 시절에도 운동을 꾸준히 했고 지금까지도 수시로 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왠지 몸에 좀이 쑤셨고 나태해진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럴까. 대학원, 직장 그리고 현재까지도 나는 감기에 걸리는 일, 아픈 일이 거의 없다. 다들 강철 체력이라며 부러워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주 어쩌다 아파 연구실에 못나갈 때면 “아이구~ 우리 딸 아파서 어떡하나” 하시지 않고 “그러게 체력 관리를 잘했어야지” 하시며 나를 꾸중하셨다. 다행히 나는 아픈 일이 거의 없어 아버지의 그런 말씀에 서운할 일도 별로 없었다.

▲ 내가 뭔 잘못을 했는지 재밌게 나를 괴롭히는 아버지

석사를 마치고 연구실에 3년 다녔는데, 아버지 차를 타고 출근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운전을 하시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졸거나, 카톡을 보내거나, 멍 때리거나, 분주히 화장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갑자기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정신이 번쩍 들게 하셨다. 내가 왜 놀라게 하냐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으면 아버지는 동요하지 않으시고 점잖은 말투로 “연구하는 사람에게 아침 시간은 머리가 맑은 시간이다. 출근시간이 하루 30분, 5일이면 2시간이 넘는다. 그 맑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1년 지나면 크게 달라져 있을 거다”라고 하셨다. 그 당시엔 그런 엄격한 아버지 말씀이 너무 지나치다 생각해서, 한동안 아버지와 나가길 멀리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아버지 이런 말씀이 은근 나에게 스며든 것일까? 이제 나는 30분이라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 노력하고 있고, 시간 분배에 엄격한 기준도 세워놓는다. 최근 친구에게도 출근길에 영어회화를 해보라며 권유했다. 아버지가 하셨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출근길에 30분씩만 영어를 해도 1년 지나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거라며 응원해주었다.

한국에서 석사과정 다니던 시절, 가끔 평일에 술 한 잔 하고 늦게 들어오면 아버지는 마루에 불을 켜놓고 앉아 계시곤 했다. 나는 반쯤 취해서 “아버지 왜 안주무세요?” 하면 아버지는 경직된 표정으로 “평일에 이렇게 늦게 들어오면 내일이 망가지고 또 그 다음날이 망가진다. 그러면 일주일을 버리게 된다. 이런 것도 다 자기관리다.” 하시며 나를 한번 휙 노려보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밤 늦게까지 일하고 있는 날엔, 일도 마라톤과 같아 일찍일찍 자야 내일 또 다시 시작한다며 늦게 일하는 것도 싫어하셨다.

대학을 외국에서 다닐지 한국에서 다닐지 고민할 때 아버지는 영어는 전 세계 언어이기에 능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외국대학 진학을 적극 권유하셨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마친 후 바로 석사과정을 진학할까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이상하게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너무 떨어져 살면 가족 간 끈끈함이 없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석사 마치고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박사과정을 한국이냐 외국이냐로 고민할 때 아버지는 또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셨다. 엄마는 나와 다시 헤어지기 싫다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가족이 떨어져 살아야 하냐 하셨지만 아버지는 단호하셨다.

맥길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후 아버지의 말씀과 철학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나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운동, 영어,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오셨다. 아버지의 큰 그림에 익숙하고 세뇌된 것일까. 이제는 아버지가 하셨던 말들이 내 삶에 저절로 적용되고 있다. 덕분에 힘들지만 힘들지 않게 잘 버티면서 즐겁게 박사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도 나처럼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과학자다. 예전에 아버지와 등산을 하던 중 잠깐 그늘에 앉아 쉬며 이런저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과학자가 될 수 있어요?” 돌아온 대답은 단 한 단어였다. “뒷심”. 나는 “그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하며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세 번의 반복된 ‘뒷심’ 답변 끝에 ”지금은 알 수 없고 나중에 알게 될 거다.”고 하셨다.

석사부터 현재까지 연구생활 6년이 된 지금에서야 아버지가 말씀하신 ‘뒷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씩 깨닫는다.  ‘믿음을 갖고 끝까지 끈기 있게 무언가를 하는 길’은 과학자의 길이 아닌가 싶다. 그 길을 위해선 자기관리가 필수다. 단단한 체력으로 지치지 않고 뒷심을 갖고 연구하는 것이 키포인트이기에, 그런 삶을 잘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조언해주셨던 것이다.

항상 나에게 엄격하고 냉정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고 아꼈는지 문득문득 깨닫는다. 이제야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걸까?

▲ 아버지와 내가 가는 길은 같다. 그래서 참 좋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이지산 주주통신원  elmo_part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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