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에서 보스니아 국경으로 들어와 90여Km를 내륙으로 달리면 작은 마을 BLAGAJ에 도착합니다.

30대 초반인 현지 여성 가이드는 내전의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포탄이 날고 총소리가 나면 지하실로 대피하여 숨던 기억들. 다행스럽게도 영국으로 피난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보스니아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블라가즈에는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자연 속에 500년을 이어온 그림 같은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스만트루크제국이 지배하던 1520년에 지중해풍으로 지어진 중세기 건축물 TEKKE 이슬람 수도원입니다. 수도원 우측의 동굴에서 시작되는 BUNA RIVER는 유럽에서 강물이 가장 빠르게 흐른다고 합니다.

▲ 자연과 수도원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TEKKE 이슬람 수도원. 수도원 우측 동굴이 BUNA RIVER 발원지.
▲ 눈이 녹기 시작하는 4월. 비도 자주 내려 수량이 가장 풍부한 시기. 우측에 보이는 주변 상가의 일부가 물에 잠겼다.

블라가즈에서 13Km를 더 가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헤르체고비나 네레트바 주의 주도인 모스타르가 나옵니다. 보스니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는 이곳은 인구 12만여 명이 사는 보스니아의 5번째 큰 도시입니다.

▲ 구 시가지는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영향으로 터키의 시가지와 똑같다고 한다.

MOSTAR는 ‘다리의 파수꾼’을 의미하고, MOST는 ‘다리’를 뜻합니다. STARI MOST(Old Bridge)와 구 시가지를 2005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 오스만제국 당시의 공중목욕탕.

STARI MOST는 오스만제국 치하 1566년 네레트바강을 가로질러 완공되어 427년을 버텨온 아치형 다리였습니다. 총 길이 29m에 폭 4m인 이 다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993년 11월 내전 중에 크로아티아 포병의 포격으로 파괴됩니다.

▲ 1992년 폭파되기 전의 STARI MOST. 남자들이 성인이 되어 자기의 용맹을 보이기 위해 다이빙을 했다고 한다.(기념관에 걸린 사진 촬영)
▲ 2004년 원형을 복원한 STARI MOST.
▲ STARI MOST에서 바라보는 네레트바강과 구시가지. 이슬람 사원과 경치가 마치 중세로 온 듯. 비가 내려 옥색 강과 파란 하늘을 놓쳤지만 충분히 아름답다.

현지 가이드의 친절한 친구 덕분에 당시의 자료화면을 VTR로 볼 수 있었습니다. 양쪽 기둥은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주저앉았습니다. 1995년 전쟁이 끝나고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원형 그대로 2004년 다시 복원하였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DON’T FORGET 1993’이라는 문구가 자주 눈에 띄었는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지, 다리를 부순 크로아티아군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의미라고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에 좋은 전쟁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실제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가 크게 증오하는 관계는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고연방의 주축이었던 세르비아에 대한 미움이 크다고 알려졌습니다.

▲ 지금은 보스니아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 교각 위의 건물 지붕을 보면 교과서에서 배우고 실제로 처음 보는 돌 지붕. 위의 상가 사진이나 TEKKE 사원의 왼쪽 건물도 돌로 된 지붕이다. 약 5Cm 두께의 자연석이라고 한다.

보스니아라는 국명보다 수도 사라예보의 이름이 우리에겐 훨씬 익숙합니다.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과 이에리사의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사라예보를 기억하지요.

보스니아의 정확한 이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로 EU회원국은 아닙니다. 국토 중앙의 보스니아 지역과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합쳐서 국명으로 사용합니다. 국토의 51%를 차지하며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살고 있습니다. 국토의 북쪽과 동남쪽으로 스릅스카 공화국이 있는데 전체 인구의 37%인 세르비아계가 국토의 약 4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015년 기준 3백 8십여만 명의 많지 않은 인구가 남한의 약 절반인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48%의 보스니아계와 로마 가톨릭을 믿는 14%의 크로아티아계가 연방을 이루고, 동방정교를 믿는 37%의 세르비아계가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자치를 하며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확실한 배후 세력을 등에 지고 있기에 불만 붙이면 언제든지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인당 국민소득도 USD6,800 정도로 높지 않습니다.

1943년부터 발칸반도의 슬라브족이 하나로 뭉쳤던 시기가 있습니다. 유고 연방이 출현하였지요. 유고 연방은 세르비아가 장악하고 주축이 되어 1992년까지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독립을 주장하는 위구르나 티베트 지역에 한족(漢族) 우대정책을 펴며 마구 이주시키듯, 세르비아인들이 각 지역으로 이주를 합니다.

유고 연방이 느슨해진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이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쟁은 오래된 증오심과 탐욕이 만나면 일어납니다. 한 집안에서도 종교가 다르면 뒤에 대부분 싸움이 일어나지요. 크고 작은 분란이 켜켜이 쌓였다가 누군가 혹은 어떤 기회가 되면 증오심에 불을 붙입니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국한해서 보면 1992년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계는 반발합니다. 그들은 스릅스카 공화국을 선포하고 신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 아래 전쟁을 시작합니다. 세르비아계는 자기들이 다수 점하고 있는 지역 내의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를 축출합니다. 1991년 한 해 먼저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계 보호를 명분으로 보스니아 내전에 참여합니다. 실은 크로아티아계가 많이 사는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전쟁은 세르비아계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우위를 점했지만, 미국과 영국, NATO 회원국들의 지원으로 전세가 역전이 됩니다. 결국 1995년 12월 미국 오하이오 주의 데이튼에서 협정을 맺고 내전은 종결합니다. 이 협정의 결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독립하게 되지요.

전쟁동안 인구의 40%가 난민이 되었고, 40%의 집들이 초토화 되었으며, 25만~3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전투에 의한 사망자보다 상당수가 인종청소로 집단학살을 당했는데, 특히 이슬람을 믿는 사람의 희생이 컸다고 합니다. 이 인종청소에는 내전을 핑계로 이슬람세력의 학살을 방조 내지는 묵인했던 서방 세력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 자동차 불빛. 왼쪽은 가톨릭신자, 오른쪽은 이슬람신자가 거주한다고.

내전 중에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를 탈출하여 세르비아로 이주를 했지만 오히려 천대를 받았다고 알려졌습니다. 마치 파견 나갔던 직원이 본사로 돌아오면 자리 없으니 퇴사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과 유사합니다. 따라서 스릅스카 공화국을 이룬 세르비아계도 보스니아 영토 내에서 목숨을 걸고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처지입니다.

▲ 높이 치솟은 저 첨탑이 사랑의 등불이 되고 평화의 길잡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 수천 년의 역사를 보면, 인류가 생각해낸 어떤 법이나 제도, 숱한 성인들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모든 종교도 야만과 파괴의 잔혹한 전쟁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미움이 자라고 증오심이 커지면 전쟁은 그만큼 가까이 다가옵니다. 전쟁이란 내 아들과 딸, 손주 손녀가 인생의 꽃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야만의 폭력 앞에 비참하게 꺾인다는 의미입니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