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자가 직면하게 될 세상은 현직에 있을 때 보던 세상과는 사뭇 다르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한 발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한결 여유롭다. 그렇다고 모든 욕망이나 갈등에서 벗어난 건 아니지만 세상을 관조하는 입장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모든 게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은퇴자 앞에는 거대한 산맥이 놓여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동산 정도로 여거지던 것이 나중에 보니 훨씬 더 크고 거친 산으로 다가오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세상이라는 큰 세계를 뒤로 하고 이제 여유좀 부려볼까 하는 순간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은퇴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 다크호스는 바로 배우자라는 존재다.

은퇴자에게 있어 아내와의 관계는 넘어야 할 산이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은퇴 후 1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해가 갈수록 아내의 존재는 더욱 커져만 간다. 가장으로서 은퇴자의 존재감이 작아져서일 수도 있다. 아내는 본격적인 평등 관계를 생활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데 은퇴자는 아직 적응이 안되서 일 수도 있다. 가장이라는 의식 자체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은퇴자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다양하지만 아내와의 관계에 비견될 수 없다. 아내와의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특이하며 고유한 관계이다. 지인이나 친척관계와도 다르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나 형제 남매간의 관계와도 다르다. 그것은 아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아내와의 관계가 은퇴자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정서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 부부 - 공간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는 정비례하기도 하고 반비례하기도 한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은퇴자가 유의해야 할 것들은 사실 두세 가지 정도밖에 안 된다. 그 중에 가사분담도 있고 아내와 함께 시간 보내기 등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갈등의 원천이 되고, 심지어 은퇴자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퇴하는 순간 짐작이나 했을까.

가사 분담에서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청소나 세탁 혹은 설거지나 주방일 중 일부를 떠맡게 되었다고 해서 그게 끝이 아니다. 그 때부터 새로운 갈등이 시작된다. 그 원인은 바로 아내의 지적질에서 비롯된다. 설거지를 더럽게 했다느니, 빨래를 탁탁 잘 털어서 널지 않았다느니 아내의 지적질은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된다.

아내의 가차 없는 지적 앞에 은퇴자의 자존심은 찢어지고 구겨지며 어느 순간 너덜너덜 해지기 십상이다. 마치 철부지 어린 시절에 모친에게 꾸중을 듣고 야단을 맞을 때와 같은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내는 왜 칭찬에 인색한 걸까.

가사 분담을 하는 과정에서 혹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상황에서 부부관계가 틀어져 황혼이혼이나 별거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남편의 자존심, 남자의 자존심은 과연 합당하고 어떤 순간에도 지켜져야만 하는 절대 지존의 가치일까. 그런 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다.

 

▲ 별거 이혼

아내 앞에서 상처받은 은퇴자의 자존심은 어디 가서 보상을 받아야 할까. 그 상처는 치유 가능한 걸까.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지적질과 잔소리에 얼마나 자존심을 구기고 상처를 받는지 짐작이나 할까. 은퇴자의 생활은 아내에게 고스란히 노출되고 아내의 따발총 같은 잔소리는 은퇴자의 생활 전반에 걸쳐 전 방위적으로 발사된다. 은퇴자의 쉴 곳은 어디인가.

부부관계만큼이나 신묘하고 기묘한 관계는 세상 천지에 어디에도 없다. 천당과 지옥을 번갈아 오가기 일쑤이다. 은퇴한 후에 자신과 배우자를 잘 성찰하지 않으면 서로에 대한 이해부족과 분노로 부부관계가 극도로 악화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은퇴자에게는 바로 인생의 실패나 진배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인생의 실패자라든가 인생의 낙오자라는 말은 현직에 있을 때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세상에서의 생존경쟁보다 더 치열하고 긴장을 유발하는 관계가 바로 부부관계이다. 이런 사실을 왜 미리 몰랐으며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걸까. 기껏 현직에서 갖은 고생 끝에 은퇴를 하고 제2의 인생을 잘 살아보려 했는데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졸혼이 왠 말이며 황혼이혼이 왠 말인가. 

이렇게 은퇴자의 남은 여생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바로 아내라는 존재이다. 이제 아내가 작은 동산이 아니라 큰 산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는가. 그렇지만 은퇴자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 큰 산은 다시 아담한 동산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 비결을 깨닫기 전까지 은퇴자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계속>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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