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은퇴한 지도 거의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은퇴 이후의 삶이 어떠했는지 되돌아본다. 은퇴하기 전에는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은퇴 이후 지난 십여 년간 별 탈 없이 안착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여긴다. 가사 분담도 아내와 적정선에서 타협이 되었고 경제적 사회적 관계도 나의 상황에 맞게 대략 적응을 마친 상태이다. 은퇴 이후의 남자는 굳이 '가장'이라기보다는 아내와 같이 가정을 꾸려가는 '공동 가장'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이제 건강 관리가 최선의 과제가 되었다. 더 나아가 정신적 정서적 균형과 안정감을 유지하며 사는 것도 주요 과제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자녀가 결혼하여 출산을 하게 되자 자연스레 할베가 되는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생은 그런 와중에 불현듯 다가왔다.
환생이란 것이 별게 아니다. 마음이 젊어지면 환생하는 게 아니겠는가. 나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부부가 같이 환생하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별안간 그런 기회가 다가왔다. 시집간 딸이 결혼한 지 4년 만에 출산한지도 어언 1년이 다 되어간다. 딸이 1년간 출산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해야 할 즈음에 어린이집이 마침 4일간 휴가라고 한다. 그리하여 딸이 친정인 우리 집에 묶으며 출퇴근을 하고, 우리 부부는 4일간 손녀의 육아를 떠맡게 되었다. 딸이 출산한 뒤에 손녀를 데리고 종종 찾아오긴 했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맞이한 것이지 전적으로 우리가 떠맡은 게 아니라서 기분이 남달랐던 게 사실이다. 돌이 다 되어가는 손녀를 하루 종일 본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잘 돌봐주면 되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그저 손녀가 우리 부부에게 잘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돌봐주었다. 주로 아내가 돌보고 내가 아내를 보조하여 틈틈이 아이를 돌보는 방식이었다. 조부모가 손주를 잘 돌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도 읽었다. 세상에나, 그런 책이 다 있다니. 자녀 교육 서적이 아니라 손주 돌보기용 서적이다. 그런 책이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에 부모를 대신해서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많다는 실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사흘째 되는 날 백화점 키즈 카페에 갔다. 세 살 미만의 아이들이 노는 곳이다. 보호자는 입장료가 3천 원이고 돌이 안된 아이는 무료입장이다. 백화점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육칠십 대의 여인들이 타고 있더니 아이를 보며 아는 체를 한다. 그중에 어떤 이가 말한다." 요즘에는 아이가 귀해서 마을에 아이가 태어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아이를 돌본다고 하잖아." 그 말이 귀에 꽂혔다. 도시에서는 온 집안이 아이를 돌봐야 한다. 맞벌이 부부를 위해 조부모들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게 어느새 사회적 트렌드가 되었다.
아내는 손녀를 돌보며 얼굴이 환해지고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젊은 엄마가 된 기분인가 보다. 나도 아내의 표정을 보며 덩달아 젊은 아빠 같은 기분이 든다. '아이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노라면 나 또한 잠시나마 그 순수한 세계를 맛보게 된다. 아이의 순수한 눈동자와 몸짓 발짓을 보며 아이와 교감할수록 마음은 더욱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 세상에 어디가서 이런 순수한 마음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아기들은 이 세상 부모가 돌보기도 하지만 천계에서 3층천 천사들이 아기들 주위를 감싸고 있다고 한다. 아기를 대하다 보면 천상의 세계를 맛보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4일째 되는 날, 딸과 사위 부부가 아이를 데려갔다. 딸 부부는 아이를 돌봐준 우리에게 감사하다며 고마워했지만 우리는 그 덕분에 젊은 부부로 돌아가 동심을 맛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서운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했다. 4일간의 손녀 육아를 마치고 나니 온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빠지는 듯하다. 내가 그러니 아내야 오죽하겠는가. 손녀를 위해 거실과 이 방 저 방에 깔아 놓았던 이부자리와 베게, 놀이용 설치물들을 치우던 아내가 괜히 나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아마도 손녀를 보낸 허탈과 상실감이 작용한 것이리라. 순간 나는 홀연히 깨달았다. 젊은 부부로의 4일간 환생 여행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환생 여행을 통해 나는 젊은 부부로의 환생을 즐기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이의 순수한 세계를 맛보기도 했다.
니체가 말한 3단계 정신 변화의 마지막 단계가 '아이 정신'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인내하고 견디는 '낙타 정신'에서, 자유롭게 저항하는 '사자 정신'을 거쳐 궁극적으로 새로운 창조를 위해 순수한 동심과 놀이의 세계인 '아이 정신'으로의 정신적 변화가 필요함을 니체는 역설한 바 있다. 젊은 부부가 되어 '아이 정신'의 세계를 맛보며 환생 여행을 마치고 오늘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본격적인 무더위가 나를 맞이한다. 언젠가 불현듯 다시 올지도 모를 젊은 부부로의 환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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