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잊혀졌지만, 예전에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게 있었다.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 어려서는 어버이에게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 조선시대에 있던 일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떤가? 아내들이 조선시대의 삼종지도를 무참히(?) 내팽개친 지는 벌써 까마득히 먼 옛날이 되었다. 이제 그 삼종지도는 언제부터인가 남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은퇴자를 옭아매는 '현대판 삼종지도'가 그것이다.

남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 어려서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공부 열심히 해야 하고, 장가들어서는 아내의 말을 들어 가정의 평화를 이룰 것이며, 차를 타면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도 아니고 개인차이도 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여자들이 삼종지도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 무려 오백년이 걸렸다. 은퇴자들이 현대판 삼종지도를 벗어나려면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할까?

첫째 것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고, 둘째 것은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여권이 신장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되돌리기 어려울 듯 하며, 셋째 것은 GPS발달과 도시개발로 인해 의존도가 심화될 것이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먹는다는데, 이 자식아! 얼른, 엄마 말 들어!"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반항하기도 했다. 아들을 자신의 뜻에 따르게 하려는 어머니와의 마찰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보다 집요하다.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는지 내가 자신의 무리한(?) 요구에 따르지 않을 때마다 주문 외우듯이 그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다가 떡을 먹으면 체하지 않을까?

어머니의 반복학습 덕분(?)인지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와 의견을 달리할 때면 어머니의 말에 따르게 되었다. 사실은 어머니와 다투는 게 거북하고 마음에 갈등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후 어머니는 별로 잘해드린 것도 없는 아들을 효자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이유는 단 하나. 아들이 자신의 뜻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  마법의 손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나니 어머니의 주문을 어느새 아내가 되풀이하고 있는게 아닌가? 직장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어쩌다가 한 번씩 하더니 은퇴 후에는 상습적으로(?) 아내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먹는데요."

시어머니에게 노하우라도 전수받은 걸까? 처음에 나는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냐'며 일축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내의 세뇌교육(?)이 시작되었다. 자신과 의견이 안맞을 때마다 아내가 주문을 외웠다. 

애나 어른이나 지기 싫어하는 건 똑같다. 아내는 남편에게 이기기 위해 떡을 미끼로 쓸 뿐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여자들은 자다가 떡을 먹는 걸 왜 그렇게 좋아할까? 여지껏 살면서 자다가 일어나 떡을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내의 '떡'은 거의 주술(?)에 가까웠다. 아내의 주술이 나에게 먹힐 때까지 거의 삼십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제 주술에 걸린 나는 아내와 의견을 달리할 때 웬만하면 아내의 의견에 따른다. 물론 경제적 판단을 내리거나 할 경우 아내는 주술을 걸지 않는다. 그럴 때면 아내는 기꺼이 남편의 의사를 존중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이제까지의 긴 사설은 은퇴자의 가사분담으로 귀결된다. 퇴직하기 전부터 가사를 분담해온 착한(?) 남편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퇴직 이후 가사를 분담하라는 아내의 요구는 시간 문제일 뿐 피할 수 없는 은퇴자의 운명이다.

처음부터 많은 가사를 분담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타협점이 생긴다. 아내와의 '밀당'이 진행될 것이다. 빨래와 설거지와 청소 중에서 아내가 특히 떠맡기고 싶어하는 것을 맡으면 될 일이다. 요리와 주방일을 덤으로 떠맡는 경우도 있다.

가사를 분담하다보면 주부 마인드가 생긴다. 비록 '주부초보'이긴 하지만 주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아내가 삼십 년동안 나를 위해 봉사했으니 나머지 삼십년은 내가 아내를 위해 멸사봉공하리라'고 마음먹는 순정파(?) 은퇴자도 간혹 있다. 가상한 생각이지만, 나중에 후회할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게 신상에 좋다.  가사분담은 은퇴 후 아내와 마음을 맞춰가는 하나의 과정이요 시작일 뿐,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모든 일에는 적응기간이라는 게 있다. 이제 겨우 심리적 적응과 마음 준비를 마쳤을 뿐이다. 신체적 적응은 그와는 별개이다. 이제부터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말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은퇴자의 앞 날에 평강이 있을진저!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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