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길 아버지 길, 그리고

“박 서방, 왔나?”

하시며 반가이 손잡아 주시던 아버지! 가타부타 말이 없이 천장만 보고 누워 계신다. 배가 등에 들러붙은 형국이다. 눈은 퀭하니 들어가고 입을 벌린 채 눈 감고 가쁜 숨 몰아쉬다가 가끔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한다. 오른손은 가슴에 얹고 왼손은 아까부터 아내가 잡고 주물러 준다. 뭔가를 여쭈어보면 들릴락 말락 겨우 ‘으응’ 하거나 띄엄띄엄 고개를 끄덕이신다. 때로는 웃거나 찡그린 표정을 짓는다. 처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 둘만 남았다.

결혼 전, 석 달 동안 처가에서 살았다. 자취하고 있었는데 마침 작은처남이 입대하는 바람에 방이 비었다고 오라고 하셨다. 넉살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상도동 장승배기 처가에서 서교동까지 출퇴근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퇴근할 무렵 노량진수산시장에서 회를 떠놓고 기다리셨다. 그때껏 회 맛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고백하면서, 그때가 정말 행복했다, 만나는 친구들한테마다 아버지 자랑을 하고 다녔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내가 아무리 해도 술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말씀드렸다. 살며시 웃음이 번진다. 이제 비로소 아버지를 이길 자신이 있다, 통영 나가서 금방 회 한 접시 떠올 테니 한잔만 하시겠느냐고 물었다. 힘들게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곁눈질하더니 이내 손을 꽉 잡으신다. 내 손보다 두 배는 크다. 아직도 아귀힘을 당하기가 어렵다. 지난 12월에 시집간 진이한테 웬 축의금을 그렇게 많이 보내주셨느냐, 그런데 고놈이 할아버지가 오지 않으셨다고 투덜거렸다, 그런 소리 듣기 싫으면 4월에 한성이 결혼할 땐 꼭 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요구르트 한 모금, 그리고 토마토 주스 서너 방울로 목을 축여 드렸다. 손끝 마디마디 거스러미 깊게 갈라지고 손톱은 이미 성장을 멈춘 지 오래다. 손톱이 겹으로 보인다. 죽은 손톱 밑으로 새 손톱이 보인다! 아부지, 손톱이 새로 나요. 아부지….

아내가 들어온다.

"아부지, 뭣 좀 드실래요? 아니면 링거라도 한 대 놔 드릴까? "

잠자코 계시던 아버지가 한사코 손사래를 치신다. 아까부터 두 다리를 주무르던 아내는

"다음 주에 올게, 싫어도 억지로 드시고 기운 내세요. 참, 아부지 좋아하는 노래가 뭐지?"

하더니 핸드폰을 열고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을 들려준다.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서러운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나요…….”

사흘 만에 부고장을 냈다.

워낙 먼 데다가 불과 두 달 전에 딸이 시집가고, 다시 두 달 뒤에 아들 장가보내려니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보냈다.

“둘째 사위, 박춘근이가 삼가 알려드립니다.

6•25와 월남전에 두루 참전하고 해군상사로 전역하신 저희 장인어르신(金斗元님)께서 2019년 2월 19일 20시 30분에 노환으로 운명하셨습니다.”

• 빈소 : 산청장례식장(055-974-4500) 201호실

• 발인일시 : 2019. 2. 22.(금) 10시

• 장지 : 국립산청호국원

 

우리뿐이다. 식장이 텅 비어 있다. 입구에서부터 화환이 즐비하다. 조카들은 화환이 많다며 그저 기분이 좋은가 보다. 산청의 꽃집이 달려서 진주에서 공수한다고 했다. 하트 모양의 국화 속에 아버지의 영정이 오롯하다. 그 밑으로 훈장과 국가유공자증서, 그리고 영구용 태극기와 참전용사 증서가 나란히 보이고 양옆에는 대통령의 조기와 상조회 조기가 놓여 있다. 문상객 가운데 아버지의 친구는 막냇고모부가 거의 유일하다. 이태 전, 게이트볼협회장을 하실 때도 세 분이 남아 계셨다고 했는데 그 새에 모두 가신 모양이다.

 

드디어 이승에서 아버지를 뵙는 마지막 순간이다. 화려한 은발, 깊게 팬 주름살, 신령님 눈썹, 온화한 눈매, 오뚝한 코, 그리고 도톰한 입술 등 비록 여의긴 했지만 생전의 모습 그대로다. 영면하신 아버지 얼굴은 온기까지 그대로 평온하다. “박 서방, 언제 왔노?” 하시며 금세 일어나실 것 같다. 줄줄이 나가서 술 한 잔씩 올리고 재배한다. 마지막으로 찬물에 밥 말아 올리고 다시 재배한다. 장례지도사는 한껏 근엄한 표정으로 향불을 거꾸로 꽂고 국화로 촛불을 끈다.

08시 정각에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운구 차량 기사가 유난히 친절하다. 노제의 의미와 절차, 화장터 예절, 호국원 안장 절차 등 별의별 안내를 다 한다. 결국은 아버지를 편히 모시려면 노잣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기사는 만면에 웃음을 띤다. 사람으로 태어나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는 순간은 영가에게도 중요한 의식일 터, 염불로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는 듯 가는 내내 반야심경을 들려준다.

엊저녁에도 아내는 무슨 음료숫값이 주점 가격이냐고 날을 세웠다. 무너진 상도의를 세운다면서 식장 사장과 담판을 벌인 모양이다. 30분쯤 뒤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돌아왔다. 얼마를 깎았는지는 모르지만, 조카들 입에는 아이스크림이 물려 있었다.

산자락 밑에 있는 오부면 보금자리는 멀리서도 한눈에 드러난다. 커다란 두 그루의 고종시는 뱀허물 같은 수피만 앙상하고 움을 틔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언젠가 ‘약낭구’ 를 심었다고 해서 갔더니 마가목이었다. 그 밖에도 참죽나무, 가새뽕, 두릅, 엄나무를 많이 심으셨다. 때가 되면 ‘박 서방’ 좋아한다고 새순을 따서 보내주셨다. 그러면 아내는 나물로 데치고 장아찌를 담그고 참죽은 튀각을 만들어서 냈다. 담 밖의 석류나무에는 대여섯 개의 빛바랜 열매가 쭈글쭈글한 채 말라붙어 있다. 열매 가루도 향기롭지만 잎 부각과 장아찌가 그만이라며 손수 잎을 따서 주시던 초피나무와, 갈 때마다 열매를 따서 효소를 담가 주시던 뜰보리수가 빈집을 지키고 있다.

빈집을 지키고 있는 고종시나무, 소를 치던 마굿간, 초피나무, 석류나무
빈집을 지키고 있는 고종시나무, 소를 치던 마굿간, 초피나무, 석류나무

 

마당에 들어서니 대청마루 주춧돌에 기대고 서 있는 물푸레 지팡이가 보인다. 아, 저 지팡이를 짚고 안 가신 데가 없었지. 망구에 이르러서도 친구분들과 게이트볼을 치고 경호강에서 천렵을 즐기시던 분이다. 그러던 분이 최근 3년 동안은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셨다. 그렇지만 갈 때마다 고추, 마늘, 양파를 바리바리 싸서 마을회관까지 따라오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특히 지지난해 생신 때는 동의보감촌에서 약초 비빔밥을 맛나게 드시고 거북이 닮은 ‘귀감석’을 어루시며 당신보다도 당신 딸의 건강을 비손하던 모습이 삼삼하다. 마당 한쪽에는 크고 작은 화분에 대파, 설화, 상사화가 자라고 텅 빈 외양간 시렁 위에는 살진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낭랑하던 괘종시계가 멈추고 허청 앞에 서 있는 경운기도 추억의 골동품으로 전락했다.

남도의 2월은 완연한 봄이다. 골목 담 밑으로 들풀이 무성하다. 냉이를 비롯하여 꽃다지, 꽃마리, 봄까치, 민들레, 광대나물, 방가지똥 모두 꽃을 피웠다. 뒤란에는 부추, 상추, 대파, 머위가 제법 많이 올라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뒷밭에 오르니 묵은 고춧대가 그대로 박혀 있는데 양파와 마늘은 이랑마다 속절없이 파릇파릇하다. 올해는 누가 저걸 거두려나….

한겨울에 활짝 핀 큰개불알풀, 별꽃, 광대나물, 그리고 주인 없이 홀로 자라는 마늘밭, 묵정밭, 고사리밭
한겨울에 활짝 핀 큰개불알풀, 별꽃, 광대나물, 그리고 주인 없이 홀로 자라는 마늘밭, 묵정밭, 고사리밭

 

09시 16분, 진주시 안락공원에 도착했다. 운구 차량들이 장사진이다. 화장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흰 장갑을 낀 손자와 사위들이 양쪽으로 늘어섰다. 태극기에 덮인 참전용사는 운구차를 타고 1번 화장로 앞에 멈춘다. 마지막으로 관등 성명을 대듯 성함을 확인하고 하직 인사를 올린다. 저승문이 활짝 열린다. 아버지가 화장로로 들어가신다. 수십 개의 눈과 마음이 함께 빨려 들어간다. 여든여섯 해가 일순간에 저물고 있다! 도대체 말씀이 없다. 무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으신다.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가신다.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정을 떼려고 짐짓 저러시는 게지. 얼마나 살갑고 촉촉했는데 저리도 차갑고 메마르게 가시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문이 닫히고 1번 방 불이 켜진다. 전광판을 통해 진행 상황 일체를 안내한다. 화장 후 냉각까지 60~80분이 걸린다고 했다. 칠 남매 중 홀로 남은 막냇고모님이 먼저 울음을 터뜨린다. 신음 소리는 울음보다 처절하다. 삼키고 있던 생울음들이 소리 없이 터져 나온다.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잠든 진수를 만나러 추모관으로 갔다. 진주경찰서에서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한 조카다. 못난 놈, 무엇이 그리도 급해 나를 앞지르고 할아버지보다 먼저 간 거냐?

'꼬모부, 지리산 자락에 좋은 집 있어예. 꼬모랑 같이 퍼뜩 내려오이소. 그 집 산닭, 쥑여줍니다.'

웃지나 말지. 앳된 얼굴, 너무 젊다!

화장로를 나온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다. 살갑던 모습도, 온화한 목소리도 장대한 기골도 모두 간데없다. 누구도 말이 없다. 숨소리까지 멎은 듯 일련의 분골과 습골 과정은 메마른 시간의 연속이다. 화장 안내인이 아버지를 백지에 싸서 상자에 담는다.

10시 46분, 이번에는 손주 차를 타고 호국원으로 향한다.

오늘을 위해 붉게 피어난 듯 상록 떨기나무 피라칸타 열매가 참 붉다. 단풍 든 남천 이파리도 붉고 그 열매는 유난히 더 붉다. 군데군데 통째로 떨어져 더 슬픈, 동백꽃은 붉다 못해 거무스름하다. 붉디붉은 핏빛들이다. 불현듯 정태춘이 울부짖는다.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 묻기 전까지,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 묻기 전까지….

제복 입은 군인들의 안내에 따라 아버지를 봉안당에 모시고 우리는 금선사를 찾았다. 평소 아버지께서 자주 들르시던 함양의 한 사찰이다. 기다리고 계시던 일여스님께서 잠시 법문을 설파하신다.

“대학생 때부터 음습한 공동묘지에 연꽃을 피웠다고 자부해요. 제단에 올려놓은 봉투는 모두 거두세요. 아버님 노잣돈은 내가 넉넉히 넣어 드릴 것이니 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낮에는 해가 지켜주고 밤에는 달이 지켜줄 텐데 상좌 없어도 무방합니다. 그래야 부앙천지에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어요. 돈으로 극락세계를 살 것 같으면 집 팔고 땅 팔아서 바쳐야지 마음 지극 정성이면 충분합니다.

17살에 출가했는데 스님이 무지 가난해서 돈에 헐떡거리기에 돈과는 담쌓자고 다짐했지요. 싸라기밥 드시고 좋은 쌀은 팔던데 나는 통장 만지지 않고 돈 세지 않고 쌀 팔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나이 든다는 건 정리한다는 것이지요. 없으면 늦추면 됩니다. 부처님 크기는 법당 크기에 비례하지 않아요. 자, 이제 코로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김두원 처사님의 왕생극락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너니내니 온갖분별 본래부터 공하거니

아침이슬 저녁연기 그무엇에 얽매일까

육친으로 맺은정들 훌훌털어 거두시고

아미타불 극락세계 상품상생 하옵소서.

스님께서 합장하더니 물밥에 각종 찬을 넣어 마지막 헌식을 올린다. 이어서 우리 앞에 상자를 부린다. 과일과 떡 모두 갖고 가란다. 특별히 남원에서 맛난 떡을 주문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과일도 다 갖고 가서 공덕을 나누라며 요양원에서 점심 공양하고 가란다.

 

5년 전에 먼저 가신 어머니, 드디어 다시 만나셨나요

2014년 1월 4일 04시에 눈을 떴다. 안치실에 계시던 어머니는 여섯 명의 손자와 조카 들 부축을 받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캐딜락에 눕는다. 05시 30분, 맨 앞에 선 어머니 따라 서울성모병원을 나선다. 매서운 칼바람도 자식들의 눈물샘을 어쩌지 못한다. 불과 15분 남짓 달렸지만 눈물 많은 처남들은 어떻게 운구를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까마득하다.

큰처남이 사무실에서 운구차 기사가 내미는 대로 무언가를 적는다. 잠시 봉안용기를 고르느라고 떠들썩할 뿐 건조한 시간이 흐른다. ‘어머니는 생전에 꽃을 좋아하셨다’ 라며 울음을 삼키던 작은처남이 고른 봉안 용기에는 모란꽃 자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어머니는 이제 캐딜락에서 내린다. 마지막으로 모시고 갈 운구 수레에 눕는다. 주검을 인도하는 자의 선창에 따라 묵념을 올린다. 이윽고 배정받은 화로로 향한다. 이제 정녕 육신과 헤어져야 한다. 처절한 오열 너머로 육중한 여닫이문이 열리더니 이내 닫힌다.

예서제서 저미어 오던 원지동의 새벽은 잠든 혼령마저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추모공원은 ‘통곡의 벽’ 그 자체이다. 가다 서다 주저앉아 눈물을 훔친다. 어르고 달래며 어깨 서로 부축한다. 이윽고 유족 대기실에 오종종종 마주 앉는다. 커피 한 잔으로 한기를 달랜다. 깔깔거리다가 누군가의 말 한 마디로 어깨를 들썩이며 금세 울먹인다. 그러기를 몇 차례. 불길이 타오르던 80여 분이 참으로 덧없이 지나갔다.

마침내 수골실. 말라붙은 눈물이 다시 흐른다. 어머니 몸 안에 있던 인공 고관절 티타늄과 검정 링을 확인한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가 ‘어머니 사리’ 라고 하자 모두 얼굴을 드밀며 반긴다. 누가 한 줌의 재라고 했는가? 한이 많아서일까. 육신의 흔적은 두 손으로 떠받치기에도 버겁다. 어머니의 유골함은 공군 병장 장조카가 안았다. 어머니는 생전에 늘 그러셨던 것처럼 큰아들 옆자리에 앉아 계신다. 4시간 남짓 달렸을까? 크고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산청군 오부면의 하늘이 티 없이 맑다. 보일 듯 말 듯 중천에 떠 있는 하얀 초승달까지 어머니의 넋을 추모하는 양 옷깃 여미고 다소곳하다.

 

어머니 방에는 평소 어머니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인형들,  어머니 손때가 묻은 동전지갑, 그리고 생전에 즐겨 드시던 박카스를 들였다.
어머니 방에는 평소 어머니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인형들, 어머니 손때가 묻은 동전지갑, 그리고 생전에 즐겨 드시던 박카스를 들였다.

 

장모님(權鍾順)께서는 1930년 12월 9일에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셨다. 만주, 일본을 거쳐 해방되자 부산으로 이주하여 사시다가 군인인 장인어른을 만나 오로지 4남매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치셨다. 자식들에게는 수시로 ‘떡을 할 놈’이라고 혀를 차셨지만, 사위인 내게는 단 한 차례 하대한 적조차 없다. 홍합탕을 시원하게 잘 끓이시고 무채나물을 감칠맛 나게 무쳐 주시던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호박죽을 좋아하셨다. 여기에서‘떡을 할 놈’이란 말은 떡을 해 놓고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하라는 말로, 아픈 환자를 치료하던 주술적 행위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해 섣달 초에 아내는 마지막 생신일지 모른다며 호박죽을 쑤었다. 이웃 병실까지 두루 돌리고 간호사들에게는 케이크까지 건넸다. 그런 딸 속도 모르고 막상 당신은 한 숟갈도 드시지 못하고 가셨다. 가진 것은 없어도 남긴 것은 넘치는 좋은 분이셨는데…. 지금도 문을 열면 소파에 앉아 ‘박 서방!’ 하고 부르며 반기시던 모습이 삼삼하다.

어머니 사연은 파란만장하다. 그러니까 거창의 만석꾼 외할아버지께서 왜놈들의 등쌀에 고향을 떠나 만주로 도망가신다. 그곳에서 농장을 경영하셨는데 어느 해 수확을 앞두고 된서리가 내리는 바람에 폭삭 망하고 야반도주하다시피 히로시마로 가셨다고 한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은 일제 육군의 근거지인 히로시마시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 이로 인해 1945년 말까지 약 14만 명이 사망하고 그중에서 한국인 희생자는 대략 4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물론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 당시 어머니는 14살이었다. 밑으로 이모와 외삼촌 둘이 있었는데 어쩌다 먹는 쌀밥은 차지고 유난히 기름기가 넘쳤단다. 사 남매의 놀이터인 바닷가는 조개 천국이었다고 하셨다.

그날도 동생들과 조개를 캐는데 비행기들이 보이더란다. 사람들이 부산하게 무슨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사진을 찍더란다. 빨간 마후라를 맨 군인들이 ‘사케’를 마시면서 무슨 의식을 치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표정이 슬퍼 보였다고 기억하셨다. 이른바 태평양 전쟁 당시 가미카제(신풍) 출정식을 본 것이다.

그 옛날 여원연합군과 여몽연합군이 태풍 때문에 두 차례나 일본에게 패배한 적이 있다. 이를 두고 하늘이 신풍(神風)을 보내서 일본을 도왔다며, 일본은 하늘에 근본이 있는 나라라고 날뛰었다. 산 자나 죽은 자의 코와 귀를 전리품으로 베어 묻는 만행을 저지른 그들이다. 그들의 후손답게 아베신조 일본 총리는 언젠가 항공자위대를 방문해서 ‘731’ 이라고 쓰인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731’ 은 곧 중국 하얼빈에 있던 일본 관동군 생체실험부대가 아닌가. 독일의 아우슈비츠가 차라리 인간적일 정도로 사악하다. 예방 주사액으로 세균을 접종하고, 일부러 매독을 감염시킨 뒤에 남녀를 합방시켰다. 흑사병, 콜레라, 탄저균 등을 도자기 폭탄으로 위장해서 투하하고 특히 페스트 벼룩과 쥐를 마을에 살포했다. 질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하여 목을 매달고 신장에 말 오줌을, 혈관에 소피를 주입했다. 음식과 물을 차단하고 사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재고 인체 수분 함량 비율을 알기 위해 죽을 때까지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렸다. 통 속에 가두고 진공실험도 했다. 수용자들은 칠규로 피를 토하고 오장육부가 꾸역꾸역 비져나왔다. 아, 예서 더 언급할 수가 없다…….

사이렌 소리에 맞춰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따라 용케도 기역 자 모양의 갱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도 B29 소리가 방방방방 들렸다. 할머니 품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엄청난 굉음과 섬광과 폭풍이 지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니 쪽 갱도는 무사한데 반대쪽 갱도 사람들은 처참했다. 누가 누구인지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녹아버린 것이다. 거리 곳곳에는 불기둥과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살고 있던 나무집도 흔적 없이 타버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 마산에 정착한 외할아버지는 귀환 동포회장의 도움을 받아 쌀집을 운영했다. 워낙 수완이 좋은 분이라 사업이 날로 번창했지만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할아버지께서는 40대 중반에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당시에는 복막염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일제 군수공장에서 얻은 피폭 후유증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그 전부터 연정을 품고 쌀집 앞을 서성거렸다고 한다. 그때마다 이모가

“언니, 김 하사 또 왔어.”

하시며 할머니 몰래 밀정 노릇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두 분은 1955년에 결혼, 부산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파견대장을 하실 때다.

아버지는 열여덟 살에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1972년 대방동 해군본부에서 제대할 때까지 포항, 진해, 백령도, 김포, 베트남을 전전하셨다.

베트남에서 텔레비전은 물론 냉장고, 축음기, 다리미, 옷까지 보내주셨다. 처남들이 기다리던 것은 시레이션이다. 야전식인데 네모진 상자 속에 캔과 과자가 무수히 들어 있었다. 그런데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캔을 따기 전에는 내용물을 알 수가 없었다. 땅콩·딸기·포도 잼 모두 좋은데 버터는 맛이 없었다. 인심 쓰듯 동네에서 짱이던 ‘용천’이 형에게 버터를 주면 그렇게 좋아했다. 아버지 덕에 든든한 배경까지 생긴 셈이다. 또 동네 사람들 모두 텔레비전을 보러 모이는 바람에 유년은 한껏 우쭐거리며 지냈다.

한번은 삼부자가 앉아 술 한잔을 했다. 작은처남이 ‘6·25도 그렇고 월남전도 그렇고 아버지는 어떻게 부상 없이 생환했느냐, 도망만 다닌 게 분명하다, 이러다가 갑자기 베트남에서 누가 브라더 하면서 나타나는 것 아냐?’ 하면서 놀렸다고 한다. 그때 큰처남이 ‘야, 인마. 넌 무적의 따이한을 뭘로 보느냐?’ 고 지레 호통을 쳤다. 그러다가 ‘상권’이 말이 나오자 갑자기 침울해졌다. 상권이는 처남의 사촌형이다. 그가 아버지에게 자기도 월남으로 가게 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지에 보낼 수 없다고 죽기로 말리셨는데 친구들과 함께 자원해서 나가고 말았단다. 아버지가 귀국한 뒤에 이를 알고 어떻게 손을 쓰려고 하셨다. 하지만 파병된 지 며칠 만에 정찰 나갔다가 1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상권이가 동작동에 안장되긴 했지만 큰어머니는 두고두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는 입때까지 고개를 떨구고 사셨다.

 

눈 뜬 자 쉬이 감지 못하고

눈 감은 자 깊이 잠들지 못할지니

한쪽 눈을 감고 뜬 채 낮밤을 지샜으리라.
 

어머니는 초승달 같은 눈썹 그리느라 설날 가시고

아버지는 밤길 밝히느라 정월 대보름에 가셨나요?

마산·부산·포항·김포·히로시마·베트남·산청 다 털어버리고

사바세계의 연은 자식들 마음자리에 묻어 두시라.

그리하여 이제 두 분은 다시 비익조(比翼鳥) 되어

원도 한도 없이 서방정토까지 날아올라

부디 아미타불에 귀의하소서.

 

아버지가 살던 오부면 집 뒤란에는 약모밀 향이 은은하고, 5월의 산청호국원에는 쥐똥나무, 산딸나무, 노랑꽃창포, 그리고 태산목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아버지가 살던 오부면 집 뒤란에는 약모밀 향이 은은하고, 5월의 산청호국원에는 쥐똥나무, 산딸나무, 노랑꽃창포, 그리고 태산목 꽃이 활짝 피어 있다.

 

현충일을 며칠 앞두고 산청호국원에 들렀다.

5월의 남녘 하늘은 전형적인 가을하늘이다. 헝클어진 구름 사이로 깊고도 넓은 파란 하늘이 당당하다. 아내는 아버지의 베트남 참전 반지를 보여주며 자기 손 마디가 아버지처럼 굵어졌다고 자랑한다. 아버지의 집 주변에는 산딸나무와 노랑꽃창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쥐똥나무와 산철쭉 꽃에서는 꿀이 흘러내린다. 현충관 바로 앞에는 아버지 얼굴처럼 크고, 어머니 얼굴처럼 하얀 태산목꽃이 반지르르 피어 있다.

 

다시 산청이다.

아버지가 누워 계시던 침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요를 깔고 아내가 눕는다. 아버지의 반지를 끼고 눈을 감는다. 어머니, 아버지 흔적이 지워지지 않도록 기억 자락을 붙좇고 싶은 것이리라. 우리 서로 오르막길 내리막길 곁부축하고, 한 걸음 내딛다 말고 뒤돌아본 세월! 머잖아 뒤따를 어머니 길 아버지 길. 애틋한 눈빛 이내 촉촉해지고 코 고는 소리마저 애잔하게 들린다. 오백 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 한 번 스친다고 했거늘….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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