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는 그날 밤 오랜만에 도쿄 번화가에 자리 잡은 신주쿠 거리의 술집을 찾았다.  삿포로에서 출장차 올라온 친구와 만나기로 한 터였다.  그 친구는 월간지  '시공( 時空) 컬쳐 3.0'  잡지사에서 편집국장으로 일하는 노부유키였다.  노부유키는 한 달에 한 번씩 도쿄로 출장을 오는데 그때마다 마쓰다와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절친이었다. 한 달 만에 만나는 노부유키를 마쓰다는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자 신주쿠 거리는 술 취한 취객들로 흥청거리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소위 돈 좀 있고 힘 좀 쓰는 자들은 오늘 밤 이 거리를 누비고 있겠군. 평소에 억눌려있던 자신들의 욕망을 한껏 발산하고 있을 거야."

"어디 가진 자들 뿐이겠나? 저들은 현실 속에서의 고통과 갈등을 잊기 위해 불나방처럼 쾌락과 즐거움에 온몸을 불사르고 있는 거야.  그렇게라도 해야 현실 세계에 적응할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조용한 술집에 자리를 잡은 마쓰다와 노부유키는 으레 그렇듯이 술잔을 기울이며 점점 기울어가는 일본의 앞날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도 했고, 1980년대에 일본이  미국을 바짝 추월하던 기개와 자신감에 넘쳤던 옛 시절을 추억하기도 했다. 마쓰다는 오전에 모리 국장에게 보고했던 내용을 노부유키에게  넌지시 귀띔해 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개하며 말했다. 

"가짜 예언가를 조작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말야!" 

평상시에는 1차로 끝내고 귀가하는데 오늘은 일본의 어두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해져서 술이 더 당겼다. 노부유끼가 마쓰다를 은근히 떠본다.

"오랜만에 유흥주점이나 가볼까? 기분도 꿀꿀한데!"

"어? 그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마쓰다는 마침 아내가 친정에 볼 일이 있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규슈로 가 있던 차라 잘 됐다 싶었다. 발동이 걸린 마쓰다와 노부유키는 유흥주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쓰다로서도 오늘은 취하고 싶은 날이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주점이었다. 유흥주점을 들어서자 웨이터가 안내를 하며 어떤 접대부를 원하는지 묻는다.  접대부는 인종에 따라 여러 레벨이 있었다. 동남아 여성에서부터 남미와 동유럽에서 온 여성들도 있다.  마쓰다가 노부유키의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필리핀이나 베트남 같은 동남아 여성이  무난하고 좋지 않을까? 일본 남자들은 대개 유럽이나 남미 여성에 대해 로망을 품고 있지만 그들과는 정서가 달라서 재미가 없단 말이지. 서비스 비용도 비싸고 말이야. "

노부유키도 동의를 하며 말했다.

"비싼 걸로 친다면야 소프란도(soapland)만큼이나 하겠어?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데는 한 번에 12만 엔부터 20만 엔까지 한다던데. 잘나가는 사업가들이나 고위 관료들이 아닌  일반 월급쟁이들로서는 소프란도 같은 데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게야."

 

일본 도쿄의 대표적 유흥가인 신주쿠구 가부키초 입구에 있는 전광판에서 코로나19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해서 밀폐된 공간에 가지 말라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발언이 흘러나오고 있다. 도쿄/UPI 연합뉴스 / 출처 : 한겨레신문
일본 도쿄의 대표적 유흥가인 신주쿠구 가부키초 입구에 있는 전광판에서 코로나19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해서 밀폐된 공간에 가지 말라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발언이 흘러나오고 있다. 도쿄/UPI 연합뉴스 / 출처 : 한겨레신문


"어쩌면 모리 국장 같은 자들은  소프란도 같은  업소를 선호할지도 모르겠군."

마쓰다는 모리 국장의 음흉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거짓 예언가를 조작해달라는 모리의 어이없는 요청을 거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위암 판정을 받은 모친의 수술비가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양심을 팔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거절을 했지만 뒷맛이 개운치는 않았다.  모리 국장이 무슨 엉뚱한 공작을 벌일지 마쓰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쓰다가 모리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노부유키가 마쓰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선심을 썼다.

"자네가 동북아재단 보고서 때문에 고생이 많았으니 오늘 술값은 내가 내지. 어때. 괜찮지? 이번에 출장비를 넉넉하게 받아서 여유가 좀 있거든. "

"그렇다면 나야 땡큐지 !"

마쓰다는 노부유끼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접대부들이 들어오기 전에 노부유끼가 마쓰다의 손을 정겹게 잡으며 은근한 태도로 말했다.

"그 보고서 말일세. 동북아재단 보고서. 그거 사본 좀 얻을 수 있겠나?  알다시피 내가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말이야. 대신 기밀은 유지하겠네. "

술김이었을까. 마쓰다는 잠시 노부유키를 쳐다보더니 마지못하는 척하며 수락했다.

"그러지 뭐. 자네를 안 믿으면 내가 누구를 믿겠나? 이 험난한 세상에서 말이야.  대신 외부로 자료가 유출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걸 명심하게."

마쓰다는 동북아 보고서가 담긴 usb를 노부유키에게 넘겨 주었다. 유흥주점 룸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노부유키의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때 접대부들이 들어왔다. 날씬한 몸매의 필리핀 여성이 노부유키 옆에 앉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매끈한 각선미의 베트남 여성은 마쓰다 옆에 앉았다.  여성들이 각자 짧은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필리핀에서 온 줄리아라고 해요."

"베트남에서 온 엠마라고 해요."

마쓰다가 자신의 파트너인 엠마에게 관심을 보이며 일본어로 물었다.

"본명이 엠마는 아닐 텐데 본명을 물어봐도 되나?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일본에서 생활한지 좀 되어 보이는 엠마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일본어로  답했다. 

"본명은 흐엉이라고 해요. 일본에 온 지는 5년이 넘었고요."

"일본어 잘하는구나. "  마쓰다는 곱상한 얼굴의 엠마가 마음에 들었다. 

줄리아와 엠마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한담을 나누다 보니 밤이 깊었다.  그러던 차에 옆 테이블에서 술에 취한 취객들이 횡설수설하며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1940년대의 일본이 그립단 말이야. 그때는 동남아 국가들을 우리가 다 지배했는데 말이야. 그렇지 않나?"

"그럼! 그랬지. 당시에는 맘만 먹으면 동남아 여자들은 다 우리 거 아니었겠어? "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후안무치하고 한심한 소리를 들으며 마쓰다와 노부유키는 고개를 떨구었다. 줄리아와 엠마가 들을까  조심스럽다는 듯이 마쓰다가 노부유키에게 조용히 귓속말로 말했다.

"일본은 아직 멀었어. 정신 상태가 저래가지고서야 일본의 미래가 있을까 싶어."

노부유키도 마쓰다의 말에 맞짱구를 쳤다.

"한심하지. 과거 제국주의 시절이나 그리워하고 있으니 매사에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기업체에서도 매뉴얼에만 매달리고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일본은 점점 쪼그라들 수밖에 없고 그러다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 거야."

마쓰다가 홀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소리를 질렀다.

"아! 그거였구나. 왜 그걸 몰랐지?"

 

‘소녀상 지킴이’ 된 독일 청년들 “영구 보존해 역사 기억”  /  보호막을 친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하진란 작가의 작품 <하우스 데어 프렘데>(Haus der Fremde·타향의 집)로 둘러싸여 있다. 연합뉴스  / 출처 : 한겨레신문
‘소녀상 지킴이’ 된 독일 청년들 “영구 보존해 역사 기억”  /  보호막을 친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하진란 작가의 작품 <하우스 데어 프렘데>(Haus der Fremde·타향의 집)로 둘러싸여 있다. 연합뉴스  / 출처 : 한겨레신문

 

노부유키가 의아한 표정으로 마쓰다를 쳐다보았다.

"자네 말이 정곡을 찔렀네.  일본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 분명히 알것 같아. 일본인들은 과거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거야. 제국주의 시절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그 시절이 다시 재현되기를 기대하는 거야. 이를테면 심리학자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에 젖어 있는 거지."

그러면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국을 식민 지배하여 한국인들에게 수십 년간 고통을 주었고,  위안부를 성 노예로 삼은 것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거였어."

노부유키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맞아, 그거야. 일본인들 대다수는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비판의식이 전혀 없어.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지. 일본 정치인들은 그 허점을 틈타 군국주의의 부활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지.  그러니 그들에게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나 회개일랑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거야."

마쓰다와 노부유키는 같은 민족으로서 일본인들에 대해 새삼 부끄러움을 느꼈다.  갑자기 술맛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자리를 파하고 주점에서 나오려는데 엠마가 마쓰다의 품에 안기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같이 포근한 남자는 처음이에요. 나중에  따로 연락드릴 수 있을까요?"

마쓰다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스마트폰 번호를 엠마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지갑에서 2천 엔을 꺼내어 엠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엠마가 고맙다고 말하며 마쓰다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주점을 나온 마쓰다가 노부유키와 작별하고 귀가하려는데 엠마가 어느 틈에 다가와 팔짱을 끼며 조금만 배웅해 주겠다며 따라나선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베트남 남자  두어 명이 나타나더니 엠마에게 욕을 하며 폭행을 하려 했다. 마쓰다가 그 남자들을 말리려 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인근에 있는 주점의 종업원들이 싸움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마쓰다와 엠마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베트남인들이 엠마에게 베트남어로 뭐라고 소리치며 자리를 떠났다. 마쓰다가 엠마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오빠에게 전하라고 하네요.  오늘은 이쯤에서 멈추지만 다음에는 가만두지 않겠다고요."

저들이 엠마 오빠와 무슨 안좋은 일이 있어서 엠마에게 복수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마쓰다로서는 더 이상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엠마는 마쓰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기분은 상했지만 마쓰다는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했다. 

어둠 속에서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피고 있던 궐련을 한 모금 빨더니 손가락으로 궐련을 튕겨서 근처의 쓰레기통에 골인시켰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노부유키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숙소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정신을 차린 노부유키는 마쓰다에게서 받은 usb에 담긴 동북아재단 보고서 내용을  바즈라야나 사상 연구회의  사무총장에게  이메일로 긴급 전송했다.   

  <계속>

편집 : 안지애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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