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지막 환상

한 밤중에 이 낯선 도시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꿈을 꾸는 게 아닌 건 확실하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치고는 희한한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젊은 미남청년과 중년의 칙칙한 사나이는 나의 내면에 잠재해있는 두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의 무의식과 독백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고, 증인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다. 그들에게 묻는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20년 전의 일을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겠소?"

잘 생긴 청년이 대답한다.

"당신이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오."

"그렇다면 구원의 여인상이 내 앞에 또 나타나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렇소. 구원의 여인상은 그리 자주 나타나는 게 아니오. 잘해야 이십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하오."

"그럼 이번에도 놓치면 또 2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군요."

"내가 당신들을 만난 게 결국 그 말을 듣기 위해서였소? 아니면 또 다른 이유라도?"

"당신의 합리성은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당신의 삶을 올바르게 인도해 왔다고 볼 수 있소. 하지만 합리성의 탈을 쓰고 숨어있는 고정관념과 사회적 편견 같은 독소들이 문제요. 당신은 그로 인해 난감한 처지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모른 체하고 있소.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구원의 여인을 놓치지 말기 바라오."

난감한 처지에 빠진 적이 있는데 합리성이 그걸 모른 체한다니? 무슨 말인가? 무엇보다도 구원의 여인은 어찌 된다는 말인가?

구원의 여인상은 누군가에게는 성모 마리아일 것이고, 단테에게는 '지고의 행복이자, 모든 악덕의 파괴자이며 모든 미덕의 여왕이며, 구원(salvation)'인 베아트리체일 것이다.

피천득의 시 <구원의 여인상>에서처럼, 구원의 여인은 '성실한 가슴, 거기에다 한 남성이 머리를 눕히고 살 힘을 얻을 수 있고, 거기에서 평화롭게 죽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가슴을 지니고 있으며, 신의 존재, 영혼의 존엄성, 진리와 미, 사랑과 기도, 이런 것들을 믿으려고 안타깝게 애쓰는 여성'일 것이다. 또한 '아름다우나 그 아름다움은 사람을 매혹하게 하지 아니하는 푸른 나무와도 같을' 것이다.

피천득의 시는 구원의 여인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그런 여인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피천득의 시에서 언급한대로의 여인을 찾는 것도 아니다. 구원의 여인은 어쩌면 사귀어보지 못한 미지의 여인을 향한 남자들의 허상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구원의 여인을 다시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보 같은 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내가 이번에도 그 여인을 못 알아보고 인연을 맺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요?"

"그거야 당신 하기 나름이지요. 당신은 이번에도 합리성과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그 여인을 판단할 텐데, 그러면 무조건 실패할거요."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이성적 합리성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인데 그 여인을 놓치지 않으려면 합리성을 내려놓으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당신들이 예언자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미리 안단 말이오?"

멋진 청년이 후훗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의식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떤 일이든 무의식 세계에서 먼저 감지되는 법이오."

그런데 무언가 마음 한 구석에 미진한 데가 있다. 말로 표현해 보려고 애를 써본다.

"구원의 여인상이 나에게 주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소."

중년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는다.

"당신이 그 의문을 제기하기를 이제껏 기다리고 있었소. 사실은, 구원의 여인상은 환상이오. 당신이 극복해야 할 마지막 환상."

"그럼 내 앞에 나타날 거라는 그 구원의 여인상은 무엇이오? 가짜란 말이오?"

나는 갑자기 흥분해서 그들에게 따지고 들었다. <계속>

대표사진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623.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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