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玩牌(완패, 화투)〉: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척들 모임에 나가면 언어소통에는 지장이 있었지만 함께 화투놀이는 할 수 있었습니다. 짧은 언어로도 아주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1989년~1992년 사이에 전체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중국어 여행 가이드 중 대만사람은 유일하게 저 혼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화교출신이었지요.

자녀들이 부모님 여행경비를 부담하는 일명 효도관광단이 들어오면 대부분 노인들이라 표준어를 못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단체여행객 중 표준어를 할 수 있는 사람 한 명이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효도관광단이 입국을 하게 되면 단체 인원수와 상관없이 모두 저에게 가이드를 맡겼습니다. (역주: 대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복건성(福建省) 언어인 민난위(閩南語)다. 1949년 12월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 장개석 일행이 대만으로 옮긴 후 북경표준어를 공식어로 정해서 학교교육을 통해서 표준어를 보급한다. 80~90년대 나이가 많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는 표준어를 할 줄 모른다. 그냥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 정도가 아니라 외국어만큼 완전히 다르다.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대부분 산동성 출신들이라 대만어인 민난위를 모른다.)

인원수가 많은 단체손님일 경우는 업무실적이 좋은 선임 가이드에게 배정하는 것이 회사의 불문율이었습니다. 여행사에서 가이드 실적이라고 하는 것은 손님을 잘 모시는 것보다, 권장상품을 사게 하는 것으로, 회사에 이익을 많이 얻게 하는 가이드가 회사의 왕이지요. 저는 햇병아리였고, 매번 회사에서 내거는 업무실적이 빵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만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장점이었지요. 거기다 대만 여행사에서는 손님을 대하는 저의 태도에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대만회사에서 중요한 손님들일 경우에는 아예 저를 가이드로 지정해서 보냈기에, 30~40명의 큰 단체 손님들도 저에게 맡기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럴 경우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지요. 업무실적은 꽝이었고요. 회사 사무실에 들어가 사장을 만나면 탁자를 두들겨가며 싫은 소리를 쏟아냅니다. “라문황씨! 당신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거야? 우리는 뭐 한겨울에 찬바람만 마셔도 되냐고?”

왜냐면 저의 가이드 비용은 대만 관광객들이 직접 제게 지불하니 항상 100% 다 받습니다. 저는 가이드 비용을 받을 때마다 그럽니다. 고향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저랑 놀아주고 가는데, 누가 누구에게 팁을 주어야하는지 모르겠다고요.

▲ 〈童年(동년, 어린 시절)〉: 어렸을 적 이웃 친구들과 모여 함께 놀면 어두워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들어가지요. 엄마는 계속 들어와 밥 먹으라고 큰 소리로 부르고. 그러다 안 들어오면 밥을 다 치우고, 안 줄 거라고 최후의 통첩을 하면 마지못해 돌아서던 시절.

대만 관광객을 맞이하면 보통 3박4일 아니면 4박5일 일정입니다. 첫째 날 비행기 도착시간에 맞추어 정장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공항에 나갑니다. 90도 배꼽인사를 하고 저를 소개하지요. 그리고 며칠 동안의 일정과 주의사항 등을 알려줍니다.

둘째 날이 되어 간편한 캐주얼 복장으로 갈아입으면, 본래의 제 모습이 다 드러납니다. 어제의 그 다소곳하고 수줍은 자태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한국인들의 의식주와 행동이 어떻게 대만과 다른지를 이야기해줍니다.

옛날에 한복은 6겹으로 되었다고, 똑딱단추나 지퍼가 없으니까 매번 옷을 한 겹 입을 때마다 옷끈으로 매듭을 지어 묶는다고. 6겹이니 6번 매듭을 지어 묶는데 결혼 첫날 밤, 신랑이 6개의 매듭을 다 풀고 나면 날이 밝아버린다고 이야기했더니,

할머니 한 분이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심각하게 묻습니다. “아니 가위가 없어? 싹둑 잘라버리지.”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겨울철에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주로 좋아한다고. 찌개 종류를 다르게 여러 가지를 놓고 먹는 게 아니라 한두 가지 보글보글 뜨겁게 끓여서 식탁 중앙에 가져다 놓고 먹는다고. 밥을 먹는 법은 쇠로 된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안에 밀어 넣고, 다시 찌개 속에서 먹을 반찬을 떠 입으로 가져간다고. 어떤 사람은 찌개 속에서 뒤적뒤적 고르다보면 숟가락이 깨끗해진다고.

할머니는 제 이야기를 듣다가 묻습니다. “너도 그렇게 먹니?”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안 먹어요. 혼탕을 싫어하거든요!”

저는 고향에서 온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고향 사투리로 장난하고 대화 나누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공항에서 떠나보낼 때입니다. 탑승권을 발급 받아 여권사이에 일일이 대조하여 끼우고 한 사람 한 사람 나눠주지요. 그들은 모두 한 줄로 서서 한명씩 손을 붙잡고 석별의 정을 나눕니다. 매번 제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할머니들은 저와 함께 같이 울고, 할아버지들은 제게 몸 건강하게 지내라며 당부합니다.

그들이 다 들어갈 때까지 눈을 거두지 못하고 바라봅니다. 문이 닫히고 나도 발걸음을 떼지 못하지요. 그러다가 누군가 들어가면서 문이 열리고 나면 검색대 앞에 대기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듭니다. 그들도 제게 손을 흔들어 주지요. 그렇게 그들이 검색대를 다 통과하여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처음 단체 손님들을 모두 보내고 출국장 옆 난간에 기대어 오래 동안 울고 있었는데, 출국자 여권을 체크하던 아가씨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가족이 떠났느냐고? 울지 말라고.

당시 김포공항은 매우 작았습니다. 이용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출국문은 두 곳만 있었지요. 나중에는 출국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제가 나타나면 모두 알아봅니다. 저 대만 가이드 잠시 후에 또 울 거라고!

 

愛上阿里郎(六)

1989年~1992年,全大韓民國的中文導游就我一個台灣人。其他都是華僑,碰到孝親團(兒女付錢讓父母出来旅游的團)全車幾乎都聽不懂國語的,那團不管多少人,公司都會给我带。

依公司的规矩大團是給業绩好的老導游带,只要你能做出好業績赚錢给公司,在公司就是王。

我還是菜鳥,每次公司主打的那一项成績都掛鴨蛋。會講台語是我的優勢,再加上台灣旅行社喜歡我的包君满意的工作態度,重要的團體一定指名要我带,所以30-40個人的大團我還是有機會带到,但壓力很大,業績不好,進辦公室碰到老板,他會拍桌子罵說羅小姐妳可以活就好了嗎?我們都喝西北風啊!(因為我的小费肯定100%都會拿到。我常說不知道是誰該給誰小费,是台灣人來陪我的啊。)

每次接團不是3夜4天就是4夜5天。第一天在機場接機,我會穿着整齊的两片裙套装,高跟鞋,90度鞠躬,自我介绍,講解這幾天行程和注意事项……。第二天開始,我换上輕便服裝,我開始原形畢露了,不再是昨天那羞涩的女孩了。

我開心的告诉阿公,阿媽們,韓國人的食,衣,住,行是如何的跟台灣不一樣。

我說:古早韓服有6層,没有鈕扣或拉鏈,所以每穿一層就用一條布條绑一個死結,6層就有6個死結,結婚那天,新郎把6個死結打開,天都亮了。

老阿媽很老實跟我說,阿那没用加刀加,卡紧。(台語)

我說韓國人冬天喜歡煮泡菜鍋或大醬鍋,湯不是很多,整鍋熱騰騰放在餐桌上,吃飯時,習惯用鐵湯匙挖飯,送進嘴裡,含一下,再去鍋内撈菜,有的人喜歡翻来找去,鐵湯匙剛好也洗乾净了。

老阿媽聽了會問我,阿妳有吃麽?

我說我不吃,老阿媽問我為什麽不吃,我說我不喜歡綜合果汁。我和阿公,阿媽玩的很開心。

問题出在送機,辦好登機證,把護照登機證夾好,分發给大家時,他們會排成一隊,一一和我握手道别,我的眼淚就開始嘩啦啦掉下來。阿媽們都陪我哭,阿公說:自己要保重喔。

看着大家都進入,玻璃門關上了,我不走,我等有人進去,玻璃門打開,還可以看到排隊過X光檢查的台灣人,我再跟他們揮手。他們也再跟我揮手,就這樣都没有台灣人了,我再回家。

記得第一次带團送機,台灣人進去了,我站在玻璃門前的欄桿邊哭很久,看護照的小姐過来拍拍我的肩說家人走了,不要哭。

那時候金浦機場很小,人不多,入口只有两侧,

後來工作人员看到我來送機都知道,那個台灣導游等一下會哭。

(待續)

[편집자 주] 라문황씨는 고향이 대만이다. 유학 온 한국남성을 만나 결혼해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다. 대만에 거주하는 김동호 주주통신원으로부터 <한겨레:온>을 소개받아 한겨레 주주가 되었다. 남편 이은모씨는 한겨레 애독자다. 라문황씨는 한국에 살면서 한지그림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지 민속그림작가가 되었다. 대만과 한국에서 수차례 전시회도 가졌고, 지난 7월 3일부터 8월 21일까지 종로에 있는 <문화공간 온:>에서 한지 민속그림전시회도 열었다. 위 글은 하단의 한문을 김동호 주주통신원이 한글로 번역한 글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라문황 주주통신원  low030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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