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같은 반 학우 중에 최연소자는 아직 만 16세가 안 되는 리리(莉莉, Lilly)입니다. 폴란드계 아버지와 대만인 어머니 사이에 독일에서 태어난 막내딸입니다.위로 두 살 터울의 쌍둥이 언니가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 언니들과는 영어로 대화하고, 어머니와는 중국어로 대화를 한다고 해요.리리 말로는 어머니도 독일어와 영어에 아주 능통하다고 합니다. 대만 은행 쪽 업무와 용어에 능숙하기에 결혼 전 은행에서 일했냐고 물었더니 컴퓨터 관련된 회사에 근무했었다는 정도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리리 아버지는 스키를 매우
나이가 들수록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집니다. 활동하는 단체 대화방에는 거의 매일 건강 관련 이야기나 몸에 좋은 운동, 먹거리 혹은 나름의 비방이나 경험을 공유하지요.제가 보기엔 대만 친구들 대화방이 좀 더 자유롭게 많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타인의 의견 표시에 더 너그럽습니다.몇 개의 골프 모임방에 가입되어 있는데 보수 지지자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도 크게 다투거나 탈방을 하지는 않더군요. 선거 국면에서 경찰간부출신인 국민당 열혈지지자의 일방적인 사진과 지속적인 홍보에 진보적인 민진당 지지자가 반대의견을 제시하자 여기저기서 정치적
의도와 다른 행동을 하면 당연히 힘들고 어려움도 많은가봅니다. 배움이 목적이 아니라 대만에 거주하기 위한 편법으로 학생 비자를 받아 대만에 머무르다 보니, 사실은 학교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주말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렇게 간절해질 줄이야!친구들이나 함께 배우는 어린 동료들은 건성건성 듣고 하루걸러 하루 등교해도 될 거라고 말하지만, 거의 매일 있다시피 하는 시험과 수업시간 교사의 질문 때문에 준비를 안 할 수가 없지요.그렇게 수업과 시험에 시달리면서 한국에서 공부할 때보다 비교도 안 되게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덕분에 시력은 급속히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현실은 이루지 못한 꿈과 불확실한 미래로 편안치가 않습니다. 얻고자 하는 기대치와 현실의 괴리가 클수록 불행은 크게 느껴지지요.건강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누구나 건강한 몸을 만들고 싶어 운동을 해보지만, 모두가 손흥민이나 류현진이 될 수가 없지요. 하지만 운동을 못해서 불행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치를 잘 알기에 턱도 없는 기대를 하지 않지요. 아침에 일어나 아무 고통 없이 평소 걷던 길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약 인간의 고통 또는 불행이 망상에서 오는 것이
1985년으로 기억합니다. 대만 중부 타이중시 동해대학의 농구장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주말이면 종종 시합을 했습니다. 게임에서 이기고 시원한 음료 한 잔을 마시면 세상 행복의 전부라 생각하던 시절, 한 동료 유학생이 대만인 여자 친구와 함께 농구장에 나타났습니다. 대학 건너편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라고 했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그 모습이 더욱 눈부셨지요.30여 년이 지난 뒤 대학원 동문으로부터 그 대만인 간호사가 서울에서 화가로서 ‘한지민속화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나문황 작가와 우리 동문들은 대만이 아닌
대만 청꽁대(成功大) 어학원은 1년 4학기-봄, 여름, 가을, 겨울학기로 나누어서 가르칩니다. 봄학기에 입학하여 막 여름학기를 마쳤습니다. 벌써 6개월여가 지났습니다.비자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억지 춘향 노릇을 하고 있지만,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꽤 즐거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난체했던 중국어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알게 되었고, 젊은 대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심지어 태극권을 가르치는 선생은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는 난생처음 듣는 평가를 하더군요.수업 중에는
대만에 거주한 지도 7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요사이 부쩍 사주, 궁합, 무속 등이 한국에서 널리 입에 오르내립니다. 궁합이 맞거나 어떤 법사가 대만에 살라고 해서 사는 것은 아니고, 사업상 돈벌이를 위해서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성격상 한 곳에 진득하게 눌러앉아 사는 편은 아니고, 변화와 새로움을 찾다 보니 그동안 많이 떠돌아다닌 편입니다. 대만에 머물면서도 종종 다른 나라를 기웃거리며 옮겨볼 생각도 했지만, 갈수록 대만보다 더 좋은 곳을 찾을 수가 없네요.사시사철 맛있는 먹거리,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를 두고 굳이
학생 비자를 발급받아 대만에 입국하였기에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학생 신분이 되었습니다. 속박받는 생활을 싫어하는 성질머리에 시간 맞춰 강의실 쫓아다닐 생각에 정신이 어지럽습니다. 그래도 수년간 살아왔던 집이 있고, 놀아줄 친구들이 있는 대만으로 와야겠다는 생각이 더 앞서는지라 감내해야 할 몫입니다.학교 수속을 다 마치고 대만 친구에게 대학 어학원에서 중국어를 배운다고 했더니 사업하는 친구는 ‘活到老 學到老’라는 글을 보내주며 응원하고, 전직 교수 친구는 사는 데 지장이 없는데 뭔 고생이냐며 위로합니다.‘活到老 學到老’의 뜻을 찾
지난 2년여의 코로나 상황을 경험하며, 행복이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소소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측 가능한 삶이 왜 필요한지,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고 절실해졌습니다.코로나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봉쇄 조치를 취한 곳이 대만이었습니다.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연임을 못 하도록 중국이 대만으로의 자국인 여행을 막았지요. 코로나가 유행하자 대만은 재빠르게 대만에 있는 중국인들을 돌려보내고 중국인의 입국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대만인 이외의 외국인 입국도 금지하였습니다.섬나라에서 공항으로의 해외 입국
‘[대만이야기 9] 경국지색’에서 짧게 언급했던 하 나라 걸 왕과 말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지난 수천 년의 역사에서 온고지신의 지혜를 찾아야 하겠지요.제 기억에 사마천의 사기를 끝까지 읽도록 흥미를 유발한 고사가 주지육림(酒池肉林)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학생이 알만한 사자성어의 뿌리가 사기에 줄줄이 나오는데, 당시 느낌은 새로운 눈이 열리는 신세계였습니다.중국 상고시대 태평성대를 연 요와 순 그리고 하 나라와 상 나라를 세운 우 왕과 탕 왕을 4대 성군이라고 합니다. 요는 순에게
반 도읍지 예천을 찾아 길 떠난 우리 4인은 의구한 산천을 돌아보며, 간 곳 없는 인걸의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병산 서원을 뒤로하고 나서니 갑자기 과거에 장원급제라도 한 양 의기양양 보무당당 주막을 찾았지요.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는데, 예쁜 주모가 눈웃음이라도 칠라치면 일필휘지 시 한 수 써주고 곡주 한 잔 얻어 마시면 금상첨화렷다!자원방래(自遠方來)한 붕우(朋友)를 위해 박효삼 샘이 소개하는 비장의 명승지는 산자수려(山紫水麗)한 선몽대였습니다.소나무 숲에 이르자 선대동천이란 탑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동천(洞天)이란 “산과 내로
우리 필진 중에서 깔끔한 글솜씨로 이름이 자자한 분이 박효삼 선생입니다. 그래서 종종 편집에 어려움이 생기면 기꺼이 조언을 구하지요.대구 토박이지만 최근 예천에 머물고 있다기에 한번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경주 남산 답사기 10편'을 열독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호젓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유적과 대화하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사실 예천이 경주 부근 어디인 줄 알았는데 턱도 없이 먼 거리더군요. 한번 보자고 했더니 반가이 응낙하셨고, 반백수인 두 분 심창식, 형광석 선생과 함께 예천으로 떠났습니다.12월 9일 목요일, 동서울터미널에서
부엌(竈房, 조방)작가가 어렸을 때 귀여운 흰둥이와 부엌 언저리에서 놀다가,멍하니 아궁이의 불을 바라보던어머니를 자주 보았습니다.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식구는 많고 가난한 집안에서내일은 어떤 반찬을 만들어야가족들이 배부르게 먹을지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라문황 작가를 소개합니다. 1985년 한국인 유학생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라문황 작가의 어머니는 몹시 반대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에게 어머니가 들었다는 이야기는,첫째, 한국 사람들은 몹시 가난해서 김치 한 가지 하고만 밥을 먹는다.둘째, 한국 사람들은 쉽게 마누라를 때린다
올해는 산수(傘壽,팔순)를 맞이하신 전종실 주주를 꼭 뵙고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다행히 해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단풍도 고운 자태를 잃어가고, 갑작스러운 추위가 밀어닥쳐 따뜻한 남도의 온화함을 을씨년스럽게 만든 11월 하순 전남 보성군 벌교로 향했습니다.생각보다 늦게 벌교 버스터미널에 내리자 이미 어둠은 내리고 한적한 정류장에서 전종실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전종실 주주통신원께서 에 처음 쓰신 글이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 장군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편집하였기에 글로 대화를 나눈 지 만 3년이 되었습니다.1545
독재 권력에 저항하다 실직한 참 언론인들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를 털었던 한겨레 창간 주주 마광남, 김신 주주를 뵙고자 늦가을 완도행 고속버스를 탔습니다.누구보다 이른 아침 완도의 여명을 자주 올려주어 친숙해진 이름 마광남. 80여 성상을 바다와 함께 살아오며 완도의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신 어른.마광남 선생을 처음 본 지도 5년이 지나갑니다. 2018년 고창에서 비싼 전복을 서로 양보할 정도로 원 없이 먹게 하셨지요. 자신의 선행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며 숨기려는 분. 그러나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까칠해 보이는
‘은평구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는 에 김미경 통신원이 쓴 기사 제목입니다.관련기사 : http://cms.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188 처음 만나본 최호진 통신원은 멋진 남자, 젊은 감각의 사람이었지요.두 번째로 본 그는 맥가이버였습니다. 어디에서나 막힘없이 손을 놀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자였습니다.다음으로 본 최호진은 봉사가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최호진 통신원은 마음이 젊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한 가정의 장남이자 가장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항상 그 이상의 역
대만 지인의 친구가 미국인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아 기르며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편의 어머니는 아시안인데 일본인으로 생각했답니다. 고아원에 있다가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그 남편이 최근에 DNA 검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가 나왔다며 보내준 자료입니다. 친구는 자기 남편이 한국인이라며 친구에게 보냈고, 지인도 깜짝 놀랄 일이라며 제게 보내줬습니다.‘한반도에 최초로 정착한 종족은 석기 시대 러시아 동쪽 아무르강 유역의 수렵-채집 인종과 유전자가 유사하다. 이들은 청동기 시대 중국 남쪽 또는 베트남 지역에서 이주한 농
늦깎이란 말이 주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에 젊은이며, 가르치고 배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에 용기 있는 사람. 그 아름다운 사제 두 분을 만났습니다.한때 명절이면 최상의 선물로 이름 올린 설탕. 66년도에 그 설탕을 생산하던 선망의 대기업 삼양사에 취직하였다는 최성수 통신원.저는 최성수 통신원을 2016년 한주회 송년회 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지금 보아도 명품 인물 사진들이 '최성수의 이야기 사진'으로 당시 올라왔습니다.http://cms.hanion.co.kr/news/articleView.ht
십 년을 살던 백 년을 살던 나름 짧지 않은 경험과 개인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을 통해 가장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전해주신 분은 김반아님이었습니다.'통일은 영세중립국으로 해야 한다'는 첫 글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그 뒤로 '생명모성'과 '홀로서기'를 통해 여장부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드디어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루고자 영세중립화를 꿈꾸며 고국에 돌아와 영암에 거처를 마련하십니다.5월 23일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자동차를 보고 피하려다 넘어집니다. 이 사고로 갈비뼈가 골절되어 폐를 찔러 출혈이 생기는 중상을
서울의 남서지역에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멀리 맛집을 찾다 보면 강화도 쪽이나 행주산성 부근, 또는 통일로를 따라 파주 쪽도 자주 들렸습니다.그러다 헤이리에 예술인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프로방스라는 곳에 맛집들이 모여들며 더 자주 찾았던 마을이 파주 헤이리입니다.한겨레:온을 통해 반가운 분이 그곳에 살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도를 사랑하고 독도를 지키고 계신 안재영 통신원.‘독도(獨島)가 위기다’, ‘독도(獨島)에 사람이 살아야 한다’, ‘[안재영 시] 작지만 큰 섬 독도’ 등 독도와 관련된 글을 연이어 올려주셨지요.
2020년 2월 외국인 입국 금지가 내려지기 전에 대만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14일 자가격리가 막 시행되었지요. 초창기라 저는 구호 식품도 받지 못하고 격리에 들어갔습니다. 공항에서 받은 검사용지에 매일 체온을 적었고, 아침이면 보건소 직원이 확인 전화를 하였습니다. 한 번은 경찰과 함께 방문하여 신원 확인을 하고 가더군요. 일각이 여삼추, 참으로 지루했습니다. 7~8일을 힘겹게 견디고 열흘이 넘어가니 조금 수월해지더군요.일 년 반이 지나도록 초유의 코로나 사태는 진전이 없고, 내가 사는 인근 도시로 구매한 왕복 항공권은 비행기
코로나 방역에 가장 성공적인 나라로 대만이 오르내렸지요. 대만은 2003년 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당시 중국, 홍콩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환자와 사망자를 내면서 방역 당국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으로 전염병 대응 매뉴얼이 잘 작동이 된다고 합니다.이번 코로나 상황에서는 사실 운도 작용하였습니다. 대만은 친중 보수성향인 국민당과 독립 개혁성향인 민진당이 선거마다 치열하게 대결합니다. 중국 정부의 방해에도 민진당 차이잉원 총통이 2016년 당선되면서 비록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양안(중국과 대만)관계가 매끄
삶 자체가 긴 여행입니다. 그 길목에서 숱한 만남과 헤어짐이 씨줄과 날줄로 이어지고, 인연 따라 발길 닿는 곳에서 이루어진 상처와 기쁨이 추억으로 남습니다.대만 친구들과 다음을 약속했던 티베트 여행은 일 년 반이 지나도록 요원하기만 합니다. 돌아보니 오랫동안 갇혀 지냈습니다. 아마도 내 운명에는 역마의 기운이 강한가 봅니다.만약 달구지나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 태어났다면 떠돌이나 낭인 혹은 거지 등등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도 좋은 시절에 태어나서 무역한답시고 이곳저곳 많이도 돌아다니고, 여행도 즐겁게 다닐 수 있었으니 모두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이 성격 또한 각양각색입니다. 내성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낙천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 남 탓으로 돌리는 사람과 내 탓이라고 여기는 사람, 폭력성이 강하거나 음흉한 사람, 마음이 따뜻하고 어진 사람 등등 수없이 나눌 수 있습니다.체질 또한 다양하게 나눕니다. 우리나라 한의학에서는 4상으로 체질을 구분합니다. 소음인, 소양인, 태음인, 태양인으로 나누며 증상으로만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체질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또 체형에 따라 오행 즉 목화토금수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체
한국의 경주와 같은 느낌을 주는 도시가 타이난(臺南)입니다. 기원전부터 천년을 신라의 수도로 지내온 경주의 역사와 비교하기는 어불성설이지만 최초로 왕부가 위치했던 덕분에 4~5백 년의 역사를 가진, 흔적들이 남아있는 고도입니다.타이난에서 오래된 음식점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입니다.蔣介石을 따라 대만에 온 사람 중에는 뒷골목 출신들도 있었습니다. 장개석이 지하조직과 연관되었다는 이야기의 연장인데, ‘청방’이란 조직에 속한 인물 중에 머리가 있고, 학식이 좀 있는 사람이 타이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친구들과
외국인이 뽑은 가장 살기 좋은 나라 1위에 거의 매년 대만이 올라갑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만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만족도가 세계 1위입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만족도는 낮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한국인은 어려서부터 경쟁에 몰리고, 자각이나 목표보다는 타인과 비교하는 성향이 강한 듯합니다. 항상 맨 앞줄, 꼭대기에 올라서야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식이 남보다 처지는 꼴은 절대 못 보지요. 그런 동력이 짧은 시간에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자신보다 남의 눈에 어떻게 뜨일지 먼저 생각하며 살다보니 지나치
대만 남쪽에는 까오슝(高雄)이라는 제2의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2018년 개관한 웨이우잉(衛武營)국립문화센터가 있지요. 일 년에 두세 번은 다녀옵니다. 골프 친구가 협찬사를 통해 구해주는 공짜 티켓도 한몫 하는데, 음악회에 관해서는 언감생심, 감히 논할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이번에는 지인이 애들 시험이 끝나면 춤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해서 수락했습니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하길 기다렸습니다.조명이 들어오고 커다란 북 하나가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작은 북 기다란 북들이 무대를 가득 메웠습니다.
가난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변하며 G2로 올라서던 시절, 그 극적인 변화의 시기에 10여 년을 선전에 머무르며 여러 가지 듣거나 경험을 했지만, 주변 사람이 당한 의료사고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더글러스 장모가 림프샘 암으로 판정되어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장모의 나이가 쉰을 막 넘었거나 가깝다는 이야길 들었고, 몸도 건강해서 바로 수술하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닌 듯이 말했습니다. 더글러스 처도 크게 걱정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고요.수술한 지 한 달쯤 지나서 수술이 잘못되었다며 가망이 없다는 황당한 이야길 들었습니
중국에서는 글리터 기계를 팔 수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기계를 수입하겠다고 선전(深圳)으로 두 사람이 왔습니다. 사장인 장인과 사위가 함께 왔습니다.자기들 제품에 사용할 글리터를 생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제품이냐고 물었더니 카탈로그를 꺼내어 보여주는데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주로 내장재로 사용하는 건조 페인트였습니다. 페인트를 종이처럼 얇게 건조하여 필요한 크기로 부스러뜨려 벽면에 뿌리는 제품입니다.백색에 약간의 흑색을 섞어서 뿌리면 대리석 느낌이 납니다. 우둘투둘 자연스러운 느낌과 다양한 색을 혼합하여 다른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자 2004년 경 선전(深圳)으로 갔습니다. 선전은 잘 아시다시피 홍콩과 다리 하나로 연결된 경제특구입니다.인구 30만의 작은 어촌마을인 선전은 1979년에 시로 승격되고 다음 해 중국에서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됩니다. 서방과의 교역 창구인 홍콩의 배후에 생산거점 도시를 만들어 중국의 산업화를 이끌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계획에 따라 탄생한 도시입니다.지금은 1,300만 명이 넘는 인구에 일인당 국민소득도 3만 불이 넘어가는 대도시이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도로에는 자동차와 소달구지 사람이 뒤엉켜 다녔지요.
한지민속화 작가 라문황 주주통신원의 전시회가 있습니다.장소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방문자센터 2층 특별전시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기간 : 2021. 3. 4(목요일)~4. 4(일요일) 라문황 작가와 동료 박명희 작가가 '한지민속화, 그리움이 깃들다' 합동전시회를 엽니다. 대만의 중남부 도시인 자이(嘉義)에서 태어났으며, 대만에 유학온 한국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의 며느리가 된 라문황 작가.한국의 사계절과 자연 그리고 한국의 문화는 이국에서의 쉽지 않은 삶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좋아하는 한지민속화를 만나고 선생님과
더글러스가 한국에서 거주하며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서는 투자회사인 대만의 光群雷射의 파견 직원 신분이어야 하고, 중국의 여자 친구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더글러스와 법적인 결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어느 시대나 다 그러하듯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욱 잘 사는 나라로 가기를 열망합니다. 당시 중국 여자들도 대만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땅, 그리고 가장 쉽게 또 편안한 마음으로 가고 싶은 곳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만에서는 꽤 까다롭게 사실혼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와 결혼증명 사진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