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의 큰 어른 이종학 선생이 한 세기의 삶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옥천신문과 손잡고 2018년부터 ‘은빛자서전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자체가 역사이고 작은 박물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80세가 넘은 어르신들의 구술(口述)을 풀어낸 자서전을 옥천신문 지면에 게재하고 자녀와 손주 등 후손들이 감사편지를 작성하여 화답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다섯 번째 은빛자서전의 주인공이 되어주셨던 선생의 백년 인생을 정리해보았다.이종학 선생은 1922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년시절 학
이번에 만난 사람은 청산면 한곡리에 사는 박종학(86)씨입니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고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빈손으로 살림을 시작했을 때 한 주민의 조건 없는 도움을 받아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아 내가 일어섰으니 이제 남을 위해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는 서른여섯 살에 새마을지도자를 시작으로 여든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노인회장으로 봉사 생활을 실천해왔습니다.문득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식들에게 읽어주었다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해라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적하리에 사는 오준임(86)씨입니다. 열여덟 살에 전통혼례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혼불'에 나오는 결혼식 묘사 장면들을 찾아봤습니다. "마당의 넓은 차일 아래에는 십장생이 그려진 열 폭 병풍이 펼쳐져 있다…'부선재배(婦先再拜).' 신부의 양쪽에 서 있던 수모(手母)가 신부를 부축한다. 신부는 다홍치마를 동산처럼 부풀리며 재배를 하고 일어선다. 한삼에 가리워졌던 얼굴이 드러나자, 흰 이마의 한가운데 곤지의 선명한 붉
1927년생 청산면 교평리 남한우 어르신이번에 만난 사람은 청산면 교평리에 사는 남한우(94)씨입니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9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들어보니 그의 어머니도 한 세기를 꼭 채우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1900~1999). 확인한 바로는 이 모자(母子)의 장수 비결은 소식(小食)과 다동(多動) 그리고 나눔이었습니다. 사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소식다동(小食多動)을 실천했기에 인류의 조상은 생존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현대인은 수억 년에 걸쳐 인간의 유전자에 설계된 소식다동을 거부한
1937년생 청산면 백운리 정금순 어르신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노래가사)고) 현인 선생님의 '굳세어라 금순아'의 한 소절이다.그 시절 금순이처럼 굳세게 살아오신 청산면 백운리 마을의 정금순 어르신.새벽마다 소리 없는 빗질이 백운리를 그림 같은 마을로 만들었다.골목에 먼지 하나 없어 길바닥에 이부자리 깔고 누워도 될 만한 백운리 마을.그 정갈한 마을의 가장 깨끗한 집에서 환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정금순 어머니
김영순(87, 군북면 대정리)이번에 만난 사람은 군북면 대정리에 사는 김영순(87)씨입니다. 그의 이름 ‘영순’은 여자 이름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 군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호적에는 출생연도가 실제보다 2년 앞선 ‘1932년’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하며 두 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1932년 태어난 누나가 있었는데, 이름이 바로 ‘영순’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살이 되던 해에 동네에 홍역이 돌더니 누
정진기·이응주(87·88, 옥천읍 가화리)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가화리에 사는 정진기(87)·이응주(88)씨 부부입니다. 옥천군 토박이 출신 최초 목사인 정진기씨는 1958년 전도사로 처음 부임한 영동군 황간에서 만난 한 살 연상 간호사 이응주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12월 24일 4남매와 후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금강혼식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금강혼식은 결혼 60주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참고로 결혼 10주년은 석혼식, 20주년은 도혼식, 25주년은 은혼식, 30주년은 진주혼식, 45주년은 홍옥혼식, 50주년은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원각리에 사는 이종연 씨(88)입니다. 소나무 벽화가 그려진 좁은 골목을 몇 차례 꺾어 들어간 끝자락에 큰 대문과 넓은 마당을 안고 있는 양옥 한 채가 서 있었습니다.제일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양옥 전면에 걸려 있는 수많은 서예, 동양화, 수채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창고 안팎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공구였습니다. 황혼에 뒤늦게 배우기 시작한 서예와 그림 공부는 그의 집을 예술작품 전시장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전문가 수준을 넘보는 각종 공구는 황혼의 열정을 불태운 집수리 봉사의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상계리에 사는 정순임 씨(86)입니다. 정 씨와 그 자녀들은 자신과 어머니가 다수의 옥천 '1호'와 '최초' 기록의 보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막내아들은 어머니와 관련해 "최초로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여성 1호, 옥천군 피아노 교습소 1호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으며 '신여성'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다"고 평가했습니다. 정 씨는 새댁 시절 화단 가꾸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화단의 맨 앞에는 채송화를 심었고, 맨 뒤에는 해바라기를 심었습니다. 작은 등나무 정원을 만들어 놓고,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구일리에 사는 이수일 씨(80)입니다. 죽향초, 옥천중, 옥천농고(옥천상고 전신)를 졸업한 그는 20대 젊은 나이에 이장이 되어 마을을 위하여 7년 동안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마흔 살이 되던 해인 1979년 이장으로 3년 이상 활동한 사람을 대상으로 공무원을 특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그는 늦깎이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안내면 산업개발계장, 옥천읍 사회계장이 그의 19년 공무원 생활의 마지막 임무였습니다. 1998년 지방선거에 옥천군의회 의원으로 출마해 채 100표가 되지 않는 근
서른 세번째 주인공 신용란(89, 동이면 적하리)씨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적하리에 사는 신용란 씨(89)입니다. 신 씨의 장남인 김성장 충북문화재단 이사는 동이초, 동이중 재학 때 장래 희망란에 '화가'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달리 금오공고 기계과에 진학했고, 거기서 문학 하는 선배들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직업군인 생활을 마치고 공장에 취직해 용접공으로 살다가 스물일곱 살에 충북대에 합격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시, 소설, 평론 등 마음 가는 대로 그저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를 좋아했습니다.
이번에 만난 사람은 안내면 동대리에 사는 민준식 씨(87)입니다. 민 씨의 장남인 민병관 서울시동작관악교육지원청 교육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육공무원입니다. 안내초, 안내중, 대전고를 거쳐 1979년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한 그는 경기고 교감을 거쳐 청량고, 양재고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이 기간에 한국국공립고등학교교장회 회장과 한국초중고등학교교장총연합회 이사장으로도 봉사했습니다. 교육부의 동북아역사문제대책팀장과 교과서선진화팀장으로 국가의 교육정책에도 관여했습니다. 현재는 전국교육장협의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그런 민 교육장에게
서른 한번째 주인공 연기섭(86, 옥천읍 장야리)씨공부 잘 하는 자녀를 원한다면…"공부하는 습관을 물려주세요"손바닥 하나에 몇 개의 영어 단어를 적을 수 있을까요? 이번에 만난 은빛자서전 주인공 연기섭 씨(86)는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걸어서 등·하교하며 영어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1년 동안 한문을 배우다 입학한 중학교는 5~6km 거리에 떨어져 있었지요. 교과서를 읽지 않을 때는 손바닥에 깨알같이 적은 영어 단어를 외웠습니다. 손가락에는 짧은 단어 10개씩, 손바닥에는 긴 단어 30개를 적었
이번에 만난 사람은 안남면 청정리에 사는 정찬당 씨(87)입니다. 인터뷰 초반 10분 동안 정 씨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며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어느 한 구비에 이르자 할 말이 없다던 그가 폭포수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 이야기 들어서 뭐 하냐"며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아내 박유순 씨(85)까지 합세했습니다.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은 노부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배웅을 나왔습니다. "비록 이문은 남기지 못했지만 인심
이번에 만난 사람은 군서면 하동리에 사는 김선형 씨(79)입니다. 하동리에는 '삼일유지계'라는 이름의 계(契)가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화산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던 김 씨의 할아버지 김순구 선생과 마을 주민 25명의 유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순구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2002년 민관 협력으로 3억 원을 모금해 김순구 선생과 주민 25명의 초상화와 위패를 모신 사당을 건립했는데, 사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평산리(소도마을)에 사는 김양환 씨(84)입니다. 김 씨는 아내 태옥춘 씨와 슬하에 4남2녀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장남은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업고를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었습니다. 사정이 조금씩 피면서 나머지 세 아들은 대학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사꾼이 자식을 셋이나 대학에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어렵게 마련한 땅도 팔아야 했고 농협에서 대출을 가장 많이 받은 조합원이 돼야 했습니다. 그나마 공부를 잘한 자식들이 가져오는 많은 상장이 위안이 돼주었습
이번에 만난 사람은 군서면 상지리에 사는 김재식 씨(84)입니다. 물레방아 정미소집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곤 평생 동안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켰던 토박이입니다.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맡았던 아버지는 주민들로부터 보리나 쌀로 받아야 하는 보수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지던 전쟁 와중에도 이념보다 인륜을 소중히 여긴 덕분에 빨치산에게 끌려갔지만 오히려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김재식 씨는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며 당당하게 사셨던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아 마을과 지역을 위해 나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조령2리(새재마을)에 사는 여경자 씨(80)입니다. 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열여덟 나이에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시집왔습니다. 오지 중의 오지인 새재마을에서 남편과 함께 땀흘려 일하며 7남매를 낳았습니다. 땅 한 뙈기 없다 보니 셋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쌀밥 한 번 먹이지 못하고 보리밥과 고구마만 먹으며 살았습니다. 황혼의 나이에 입학한 청춘학교에서 한글을 배워 삐뚤빼뚤 몇 편의 시를 쓰면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봤습니다. 이번에 장야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손녀 성영선 양(1
은빛자서전 스물다섯 번째 주인공김순임(81, 옥천읍 금구리)씨 이야기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금구리에 사는 김순임(81)씨입니다. 옥천교회 신자로 70년 동안 살아온 김씨에게 올해 성탄절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80을 넘긴 나이에 직장인이 되고 처음으로 맞이한 성탄절이기 때문입니다. 1948년 11세의 나이에 예수와 만난 이후 김 씨는 예수가 권력자들에 의하여 매달렸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세우고 살아왔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상징합니다. 아마도 십자가의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금구리에 사는 오성택 씨(87)입니다. 읍 중심가에서 60여 년 동안 동신철물을 운영해온 오 씨는 옥천신문 오한흥 대표이사의 부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옥천신문의 탄생, 위기, 성장의 전 과정을 지켜본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8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국민주(國民株)' 한겨레신문이 등장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전국에서 지역신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창간한 '군민주(郡民株)' 옥천신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창간 30주년을 1년 앞둔 옥천신문은 현재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구일리에 사는 박언년씨(77)입니다. 그녀는 지난 8.15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 막내 남동생, 조카와 함께 금강산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북으로 간 큰오빠 박범태씨(89)를 만났습니다. 6.25전쟁 때 죽은 줄 알고 친정 동생과 조카들이 제사까지 지내왔던 터였다고 합니다. 눈물바다가 된 상봉은 큰오빠가 마을, 부모, 동생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가 북에서 낳은 아들을 통해 신청했기에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TV 뉴스 화면에 세 남매가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는데, 화면 하단에 이런 자막이
■ 내가 호동 왕자를 미워했던 이유나는 1932년 대전시 용두동에서 태어났다.아버지(신명재)는 7대 종손으로 주변에서 '대종손(大宗孫)'으로 불렀다.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33세까지 독선생(獨先生)을 두고서 한학 공부를 할 정도로 종손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많이 배운 아버지는 자녀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7남매 중 다섯째였던 나도 아버지가 들려주는 덕담을 들으며 자랐다.하지만 아버지는 정작 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선화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였는데, 상급 학교에 진학해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기념일인 3월 5일을 앞두고 충북 옥천 주민들이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제로 1940년 1월 1일자 조선일보는 1면 제호 위에 일장기를 얹은 신문을 발간한 바 있습니다. 옥천 주민들이 이런 운동에 나선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23년 전으로 거슬러 가보겠습니다. 1997년 12월 50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지며 사회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아졌습니다. 민주주의를 배신한 권언유착을 종식시키기
이번에 소개하는 사람은 동이면 적하리(연줄)에 사는 최옥주씨(83)입니다. 지난해 91세에 세상을 떠난 남편과의 사별의 아픔을 겪은 그녀는 유난히 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봄이 오면 마당 가득 꽃씨를 뿌리거나 늦가을에 캐놨던 알뿌리를 심곤 했습니다. 덕분에 봄이면 노란 수선화가 거실 앞 담장에 곱게 피어났고, 보랏빛 꽃잔디가 사립짝 입구를 찬란하게 수놓았습니다. 함박꽃이며 해당화도 다투어 피어나 그녀를 기쁘게 했지요. 여름이면 민들레, 채송화, 봉숭아가 꽃의 제전을 펼쳤고, 가을이면 백일홍과 화초가지와 이름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남곡리(개미재)에 사는 조순섭 씨(87)입니다. 한국전쟁 참전자로 국가유공자인 그는 1952년 8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약 1년 동안 금화지구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며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그는 야간 기습작전에 함께 투입됐다가 총탄을 맞고 "간호원"을 외치며 적진 속에서 죽어가던 전우의 피맺힌 절규를 아직도 꿈속에서 듣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 조순자 씨(83)마저 "64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이런 얘기는 오늘 처음 듣는다"며 놀라워했던, 숨겨두었던 아픈 과거를
이번에 만난 사람은 안남면 도덕리(덕실마을)에 사는 이승우 씨(91)입니다. 어린 시절 유교 학자인 조부로부터 에서 까지 배웠다는 그가 정한 좌우명은 '대의소신(大義小信)'입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살아야 하되, 설령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소신' 즉 작은 믿음이나마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였을 겁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냐"고 묻자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6남매를 낳고 키우고 가르치던 시절이었다."고 답했습니다. 인생 90년을 넘길 무렵부
문병규(81, 옥천읍 금구리)씨 이야기평안남도 진남포 출생, 이모 찾아 60년 전 옥천행북한 출신, 고아로 세파 헤치며 살아온 행복한 팔십 인생!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금구리에 사는 문병규(81)씨 입니다. 그는 북한 출신, 고아원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옥천에 살던 이모를 찾아오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출신은 생활력이 강하다"는 아내의 긍정적 신뢰와 기대를 주문(呪文) 삼아 더욱 성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5남매를 공부시키려고 경부고속도로 공사판에서 일할 때는 주야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장야리에 사는 오공탁 씨(83)입니다. 그는 옥천농고를 졸업하고 농촌지도소와 농협옥천읍단위조합에서 근무했습니다. 그 시절에 대한 진술에는 옥천군 농업 발전사의 정사와 야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옥천 포도가 비닐하우스와 결합하며 비약적 발전을 했던 사정과 옥천 한우가 농가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상황도 알게 되었습니다.3대 독자인 15세 소년이 6.25전쟁 당시 황간, 김천, 대구를 거쳐 경산까지 3개월 동안 피난을 다녀왔던 이야기, 17세 중학교 3학년 시절 조기 결혼해 딸만 내리 다섯을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가화리에 사는 전북열 씨(84)입니다. 그는 평생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살아왔습니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도 드라마 같은 절정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1975년 죽향초등학교 축구부 전국대회 우승 신화 당시 감독으로 활약했던 순간을 그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교감 고시를 통과하기 위해 아내와 각방을 쓰고 앉은 채로 자면서 공부하다 코피를 흘리는 등 '자기와의 싸움'을 치열하게 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돌아보니 혼자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중국 고서
류봉열(80, 옥천읍 문정리)씨 이야기제7회 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옥천지역 지방선거를 거론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지요. 옥천군의회 초대 의장(1991년), 초대 민선 옥천군수(1995년)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류봉열 씨(80)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옥천군수 3선 연임(1995년, 1998년, 2002년)이라는 기록까지 세운 그의 이력 자체가 옥천지역 지방자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1995년 제1회 지방선거가 끝났을 때 한 방송사 기자가 류 씨를 찾아왔습니다. '충북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기초자치단체
향토사학자 정수병(85, 동이면 적하리)씨 이야기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적하리에 사는 정수병 씨(85)입니다. 옥천신문을 즐겨 읽는 독자라면 '정수병'이라는 이름 석 자가 매우 익숙할 겁니다. 매달 한 번씩 연재되는 '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옥천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정수병'을 주제어로 입력하고 검색하니 무려 266건의 기사가 뜨네요). 정 씨의 안내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는 2003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1989년 정 씨는 동이면 평산리 뒷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삼양리에 사는 조병태 씨(84)입니다. 조 씨의 양옥집 거실 한쪽 벽면에는 수십 개의 메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2012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최가선 씨가 남겨두고 간 영광의 흔적입니다. 아침마다 배드민턴을 즐겼던 아내는 수많은 생활체육대회에 출전해 셀 수 없이 많은 메달을 땄습니다.아내 최씨는 봉사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1990년 8월 1일부터 옥천장날이 되면 시원한 보리차를 자전거에 싣고 장바닥을 누비며 사람들에게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을 선물하는 이 봉사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