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은 누가 창안 했을까? 라는 전종실님의 글을 읽고거북선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말이다. 1795년에 편찬 된 이충무공 전서의 기록은 임란으로부터 195년 후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이순신이 창제(創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제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란 뜻이라고 한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정사에 단 두 번의 거북선 기록이 나온다.첫 번째는 태종13년의 기록으로 임금이 임진강변을 행차하다 거북선과 왜선(倭船)으로 꾸며서 수전(水戰)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최초이고(국역왕조실록 태종13년(37
우리나라의 남자라면 누구라도 군에 입대한다.양심선언을 한 사람들은 군에 가지 않기도 하지마는.....,36개월이란 긴 시간을 같이했던 그 전우들을 찾고 싶다.요즘이야 그 기간이 많이 짧아졌지만, 기간이 길고 짧음을 떠나서 함께 군 생활을 했던 그 전우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나는 북한의 대남방송이 바로 옆에서 하는 것처럼 들리는 서부전선에서 근무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던 그 전우들, 감포에 살았던 김상현, 강릉에 살았던 박재열, 서울에 살았던 유병하, 조무웅, 문산에 살았던
폐창(廢娼)운동요즘 성범죄문제로 세상이 많이 시끄럽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에관한 뉴스를 접하다 보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으며 깊이 반성한다. 이런 문제가 대두 된 것이 상당히 오래 된 일인데도 아직 이렇다 할 해결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 것은 안타깝다.성에 관한 문제들이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국내 3대 집창촌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 한 곳은 1908년 을사늑약체결 이후 진출한 일본인들에 의해 설치된 성매매 집결지라고 한다. 기독신보(1928, 11, 28)의 기사 한 사설을 따르면 조선에 있는 소
의무와 권리, 권리와 의무, 어느 것이 먼저일까?어느 것이 먼저이든 우리는 둘 다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찌 된 일인지 많이 배우고 권력을 가진 목소리가 큰 사람이 항상 앞에 서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생각조차 없을까? 그분들도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그렇다고 목소리가 큰 그 사람이 의무를 다했는 지 알아보면 그렇지 못하면서 그 큰 목소리로 자기의 과실을 덮어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는
환경, 해수부장관에게온 세계가 환경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육지의 생활쓰레기도 넘쳐나서 문제지만 특히 해양쓰레기가 더 심각한 것 같다. 우리가 즐겨 먹는 생선만해도, 폐플라스틱을 먹이로 알고 먹는 생선을 우리가 먹어야 한다고 한다.2017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해양 쓰레기는 연간 약 176,807톤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바다에는 양식용 스티로폼 부자가 온바다를 뒤덮고 있다. 이것이 유실될 경우 해변의 암벽에 부딪치면서 분해되어 바람에 날려 바닷가의 산림에도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해양 쓰레기의 주범이다. 지금도 바닷
우리는 대통령, 국회의원, 도지사, 교육감, 지자체장, 도의원, 군 의원을 우리 손으로 뽑았다.우리들을 편히 살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뽑았다. 기대하고 그렇게 하도록 우리도 잘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우리가 뽑아준 사람들이 잘해야 하는데, 뽑아 주고는 우리들은 또 실망한다. 물론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방선거에서 만은 어느 정도 다 아는데 왜 뽑아 놓고 실망을 할까?우리 국민들은 아마도 정에 약한 것 같다. 그러나 정에 치우쳐 잘 못 뽑아 놓고 임기 내내 마음이 상하니 잘 뽑아야 함은 말할
▲ 정남국 선생항일운동을 하다가 수감 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게 많다. 그중 수감 횟수가 제일 많은 사람이 아마도 정남국 일 것이다. 생전에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 된 것이 무려 93회나 되니까. 정남국은 1897년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의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5세가 넘도록 가정이 빈곤하여 완도읍으로 유학할 수가 없어 바다에서 해조류를 채취하여 가정을 꾸려갔다. 선생은 또래들이 완도읍에 유학하여 사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완도 유학을 갈망하고 있는 것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지금도 주주가 7만이라는 말만 늘어놓고 있다. 그 수를 부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주주가 어디에 사는지 생존은 해는지 파악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그냥 우편물 보내 놓고 반송되면 그뿐인, 그러고도 할 일 다 했다고 할 것인가? 우리 주주들이 많게는 90대이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안일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을 것인가? 혹 시간만 가면 월급 나온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지만. 이미 세상을
완도군(군수 신우철)은 10월 14일 군청 대회의실에서 신규 공무원 29명에 대한 임용식을 가졌다.이번 임용식은 임용장만 전달하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수험 기간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 준 가족들과 임용의 기쁨을 함께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하는 특별한 자리로 마련됐다. 임용식은 임용장 수여와 공무원 선서,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 낭독, 카네이션 전달 순으로 진행됐다.-----------------------------------~편집 : 허익배 객원편집위원
보길도의 탄시암(嘆時岩)을 아시나요? 탄시암은 완도군 보길면 백도리 산 1-1번지에 위치한 바위로, 소안면의 맹선리와 마주한 돌출 된 곳의 바위를 말한다.지금은 甫吉島라고 쓰지만, 왕조실록 등에는 寶吉島, 甫叱吉島라고 쓰기도 하였다.고려 때는 최영장군이 삼별초를 토벌하러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에서 정박을 하면서 전열을 정비하기도 한 곳이고,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도 너무도 유명한 곳이다.고산은 어부사시사에서 보길도의 비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였는데,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이 사는 곳은 아니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보길
완도군에서는 아주 특별한 임용장이 수여되었다. 지난 10월 7일 사무관 승진자 두 사람에게 옛날 조선시대 교지와 닮은 임명장을 주어 눈길을 끌었다.교지는 조선시대 때 4품 이상 벼슬에 오른 관리에게 수여했던 족자형 임용장이다. 이날 신우철 완도 군수는 가족과 함께한 임용자에게 교지형 임용장 배경을 설명하면서 청렴하고 강직하게 업무에 임하라는 의미를 담아서 주는 것이니 초심을 잃지 말고 열심히 일해 달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우리 글 날이 돌아온다. 우리글 날은 1926년 11월 4일(음력 9,29) 가갸날로 정하였다. 그래서 인지 10월은 정부가 정한 문화의 달이기도 하다. 나라의 기본이 되는 것이 국어(國語)일 것이다. 이를 지키고 다듬기 위해 주시경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통일을 목표로 국어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37년 최현배는 우리말본이란 책의 서문에서 한겨레의 문화 창조는 언어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려고 엄청난 일들을 했었다. 조선어학회의 최현배,
단기 4283년 완도유치원.단기 4283년은 서기 1950년이다.5회 졸업생은 모두 34명인데 남학생은 11명이고 나머지는 여학생들이다. 이 당시 자그마한 섬에 유치원이 있었다는 것도 흔치 않는 일인데 남자보다 여자 아이들이 더 많았다 함은 완도인들의 높은 교육열때문이었을 것이다.이는 필시 열렬히 항일운동을 하였던 선대들이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조기 신교육이 이루워졌던 것이리라.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일제가 우리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일본은 조선 민중의 동원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었다.1920년에는 ‘조선정보위원회’를 설치해 독립에 대한 의식을 저하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으며,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내각정보부와 연동하는 조직으로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하여 국책 선전의 다양화를 꾀했다.신문 잡지와 같은 활자미디어부터 시찰단, 전람회, 각종 강연회와 행사 등, 국책에 적극 협력하는 신민을 만들기 위한 시국인식 교육과 미디어의 통제가 조직적으로 진행하였다.그 중 문맹률이 높았던 조선
환경을 보호하고 어민들 편의를 위해 여러 시설물을 많은 돈 들여 설치해 놓았다. 만일의 화재에 대비해 소화기를 비치해 놓았으나 도둑님(?)이 가져갈까 쇠고리줄로 묶어 놓았다. 그래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보다야 나을 것 같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우리가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왔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과연 우리가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 왔을까?전혀 그렇지를 않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일본은 우리에게서 기술을 배워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기술이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말을 하는 사람 중에는 식자층이 더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였으면서도.....,일본의 기록에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친일파일까? 아니면 눈치를 보면서 아부하고 시키는 대로 하던 36년이 모자라서일까? 의문이 생긴다
완도항에서는 가을로 접어든다는 절기 처서보다 조금 일찍부터 디음 해 이른 봄까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자연 경관 덕분에 일찍 일어나게 됩니다. 앞에 보이는 산은 신지도의 상산(象山,325m)입니다. 신지도는 1730년(영조 6년 9얼 17일) 송곡리에 만호진을 설치하였다.초대만호로 박준(朴俊)이 부임했다.신지만호에는 거북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고진리(鎭吏) 각 35명, 사령 25명, 수군 384명이 배치되어 있었다.수많은 공적비가 있었으나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헌것(?)이라
왜구(倭寇)들이 또다시 우리를 침략하고 있다.우리 속담에 피를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새삼 이 속담이 생각난다. 일본의 침략을 말하면 임진왜란이 떠오르는데, 왜(倭)가 우리나라를 침범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다.(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一 赫居世 居西干) 삼국사기에는 “八年倭人行兵欲犯邊聞始祖有神德乃還(8년왜인행병욕범변문시조유신덕내환) -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왕에게 신덕(神德)이 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기원 전 50년)를 시작으로 삼국시대, 고려시
안개 낀 신지도 상산(象山)이다.여름철이면 산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안개가 장관이다.신지도는 조선시대에는 3천리 유배지로 '원악도(遠惡島)'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섬은 송촌 지석영이 유배되어 종두의 임상실험을 끝낸 곳이기도 하고 처음으로 우리나라 의서가 쓰여진 곳이다. 조선시대 이긍익의 아버지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규장각 문신으로 정조의 명을 받아 이충무공전서를 집필했던 윤행임도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이처럼 당시 거물급들이 유배
국가간의 전쟁양상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이 군병과 무력을 이용한 전쟁이다. 하지만 현대전에서는 무력전쟁보다 정보전과 경제전 및 문화전이 더 일반적이다. 특히 보이는 전쟁보다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국가의 근저가 무너지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근자에 들어 일본의 무도한 도발은 우리국가와 국민의 분노를 넘어 아시아민들은 물론 세계민들에게도 우려를 주고 있다. 사실 선린國(善隣國), 선한 이웃국가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조상들께서 왜구라고 지칭했던 일본을 다시 분석하고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한
사투리라는 말(言)작은 나라임에도 지방에 따라 각기 말이 다르다.각 지역의 말을 할 때 전라도 사투리 또는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그럼 사투리(와어訛語)와 표준어의 차이는 무엇일까?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사투리는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을 이르고, ‘표준어’는 한 나라에서 공용어로 쓰는 규범으로서의 언어로, 의사소통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쓸 공용어의 자격을 부여받은 말이라고 한다.말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기호. 곧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
보길도 「윤선도 어부사시사 명상 길」 6월 15일 개통~고산 윤선도의 역사와 다도해 절경을 엿볼 수 있는 탐방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보길도에 ‘윤선도 어부사시사 명상 길’이 개설됨에 따라 오는 6월 15일 12시, ‘보길 윤선도 어부사시사 명상 길’ 이 개통된다.명상 길은 ‘어부사시사 테마 길 조성사업’ 추진을 통해 고산 윤선도 선생이 거닐었던 부용동 원림의 옛길을 복원하여 관광객들이 고산의 발자취를 따라 거닐어 보고, 쾌적한 탐방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추진됐다.협소한 탐방로 노폭을 개선하고,
여수 워크숍 때 오동도 구경을 하다 한 컷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누군가의 말처럼 늙은이가 하는 말이라 그냥 넘길지 모르지만 80이 다 되도록 살면서 이렇게 험한 말을 하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70년대 국회의원들은 빈말? 일지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국회의원들을 보면 국가는커녕 국민도 안중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국민을 대신해서 나라 살림을 잘 해달라고 뽑아 놓았는데 뽑아준 국민은 없고 본인들만 위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런데 막말을 하는 사람이 인기?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왜일까?그렇다면 정원이 모자라는 대학을 폐교하려고 하지
마네킹에 다시마로 옷을 만들어 입혀 다시마 홍보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거 사 (擧事)계미 11월 18일 맑음어제 불던 찬바람은 뚝 그치고 아침 해는 동산(東山)에서 떠오른다.1883년 11월 18일 석장리 모래밭에는 1천여 명이 넘는 군중이 마을마다 깃발을 들고 모여 들었다.사시경(巳時頃)이 되어 석장리 모래밭에 난대 없는 깃발이 펄럭이고 나팔소리 유량(流)하게 들린다,일취(一吹), 이취(二吹), 삼취(三吹), 천뇌상곡(天雷裳曲)을 울리니 좌우산천(左右山川)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손에 작대 짚은 군중(群衆) 수천(數千)이 일제히 모래밭에 들어섰다.허사겸(許士謙)은 후리후리한 키에 큰 삿갓을 쓰고 학
한식(寒食)한식날은 말뜻 그대로 찬 음식을 먹는 날이라 해석한다.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고 양력으로는 4월 5일 또는 6일이 된다. 또한 청명과 겹치거나 하루 늦게 들기도 한다. 한식날의 유래를 보면 우리나라의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도 나타나지만 당나라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祠享儀)에 따르면 옛날에는 기록된 문헌이 없었는데 공자가 어떤 묘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때에 따라서 조상에 제사를 지냈으면 좋겠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하나의 설은 개자추(介子推) 전설이 있다. 이
4, 작전계획허사겸(許士謙)은 최여집(崔汝集), 조자근(趙子根)을 불러 말하되 이 통문(通文)을 가지고 군외(郡外)을 돌아오시오. 내가 미리 각리(各里)에 돌아다니면서 비밀리(秘密裏)에 약속(約束)하였으니 이것만 갖다 전(傳)하면 곧 알게 될 것이요, 내일오전(來日午前) 사시(巳時)에 석장리(石場里) 모래밭으로 모이되, 좌우산천(左右山川)에 숨어 있다가 나팔소리가 나가든 일제히 모래밭으로 모이라하시오. 또 20인의 장정(壯丁)을 불러 말하되 군등(君等)은 내일 새벽에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동부(東部) 가용리(加用里) 노두방면(方
간밤에 싸웠나 봐요.돌아서서 생전엔 보지 않을 것 같죠.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진달래가 활짝 피었습니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완도에서 먼저 살아보기’~ 청산면 느린섬여행학교, 신지면 울모래마을 완도군은 전라남도에서 올해 처음으로 추진하는 ‘전남에서 먼저 살아보기’ 공모사업에 슬로시티인 청산면의 느린섬여행학교와 신지면 울모래마을 2개소가 선정됐다고 밝혔다.‘전남에서 먼저 살아보기’는 귀농-귀어, 귀촌에 관심있는 전남 외 다른 시·도민이 5일에서 최장 60일간 전남 지역 농어촌에서 살며, 도·농간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도시민이 농·어촌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한 체험 프로그램이다.이 사업에 전남 22개 시·군 중, 18개 시·
민란(民亂)의 동기이렇게 작은 어촌의 한 마을 이장에 의해,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하여 난을 일으킨 연유는 무엇이었을까?청해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바다가 잔잔할 때는 배가 바다를 타고 다니지만은 일조(一朝)에 바람이 불어 파도(波濤)가 이러나면 바다가 배를 뒤엎는 것이다,사겸은 원동을 건너 신학리 박일지(朴一之)를 찾아 소상히 말하니 일지씨는 손을 흔들면서 “뒷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찬동(贊同)할 수 없네”라고 하였다.사겸은 초연(梢然)하다가 가로되 살기를 위한 사람은 그 말씀이 당연(當然)하오나 국민(國民)을 위하여 죽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