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경기도만 ‘키’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나머지 7도는 ‘치’라는 명칭을 썼다. 이제는 모두 ‘키’라고 부르지만 그 경위는 알 수 없다. 어민들은 지금도 ‘치’라고 부른다. ‘치’를 ‘솔개 치(鴟)’자를 사용해 표기하는 이유도 불분명하다. 이는 연구 대상이다.기원전에 제작된 중국의 상고문헌을 보면 선박의 방향조정용 기구가 ‘축(舳)’이라고 기록돼 있다. 최초로 노를 기록한 석명(釋名, AD100)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타(柁, 舵)’가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돛대를 만들 때는 수종을 잘 선택해야 한다. 나무를 잘못 선택하면 비바람 속에서 항해할 때 돛대가 잘 부러진다.뱃사람들이 돛대용으로 제일 선호하는 나무는 전나무(편백)다. 마르면 강하면서도 쉽게 부러지지 않고 잘 휘어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휘어졌다가 원상태로 돌아가는 특성이 있다. 삼나무(스기나무)는 가볍기는 하지만 잘 부러져서 기피 대상이다. 해추선처럼 앞 돛 하나만 세우는 작은 배에 쓰이는 돛대는 소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소나무는 물에 젖으면 수분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무거워지고 쉽게 부식되는 단점이 있다.
먼저 돛에 쓸 천을 결정해야 한다. 임진전쟁 때 조정에서 돛 베 29필을 받았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있다. 당시에 돛을 만드는 천이 따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두꺼운 광목을 사용하고 있다. 황토물 혹은 갈물을 들여서 쓰기도 하고 천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한국어업사를 보면, 중국과 왜국의 배는 모두 호초(蒿草)를 짜서 돛으로 쓰기 때문에 부드럽고 질겨서 오래 사용하는 반면 우리나라의 배는 모초(茅草, 띠풀)만 사용해 쉽게 파손된다는 기록이 있다.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조 때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돛은 초석(草席)
돛을 언제부터 사용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신라 때 이미 이슬람제국에 범포(帆布, 돛을 만드는 천)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제17권에 ‘무명 돛폭’이란 말이 등장하는 걸 통해 당시에도 무명천으로 돛을 만들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선 한 척이 흰 돛을 달고 바다 입구에서부터 건너오더니 오래지 않아 돛을 돌려 만으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통해 신라 때 돛을 만드는 천이 따로 있었을 만큼 돛 제작 기술이 발달해있었단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우리는 돛단배를 한자로 ‘범선(帆船)’이라고 표기하지만 어민은 ‘풍선(風船)’이라고 한다. 돛은 노와 함께 범선의 추진 기구로서 아주 중요하다. 돛은 바람을 이용해 배를 추진시킨다. 바람이 없으면 쓸모가 없는 것이 또한 돛이다.배는 범선, 범노선, 노선으로 구분한다. 범선은 말 그대로 돛배다. 이 배는 바람이 없으면 전혀 움직일 수 없다. 바람이 없으면 닻을 놓은 채 정박하고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신풍(信風)이 불지 않아 닷새 동안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범노선(帆櫓船)은 바람이 있으면
청산도는 2007년 12월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1년 역시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세계 슬로길 제1호로 인증 받았다. 2013년에는 농림부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농촌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4년에는 구들장 논(방독 논)이 국내 최초로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완도군은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슬로시티 청산도 어워드를 제정했다. 한국슬로시티 본부와 공동으로 청산도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활발히 활동을 펼친 사람에게 주는 상이며, 또한 청산도의
앞의 설명은 날씨가 좋을 때 노를 젓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 파도가 심할 때 노를 젓는 방법을 살펴보자.돛으로 항해하기 어려울 땐 노를 저어서 나아가야 한다. 아마도 돛단배를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배가 북쪽을 향해서 가야 하는데 북풍이 분다고 가정하자. 만약 조류의 방향도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면 노를 저어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조류의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면 노를 저을 수 있다.파도 속에서 노를 저으려면 배에 노가 최소한 3개는 장착돼 있어야 한다. 우선 돛대 등을 눕혀서 바람의 저항을 조금
우선 날씨가 좋은 날이란 가정하에 노를 젓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노가 하나인 해추선에선 왼쪽 발을 앞으로 내고 오른쪽 발은 뒤로 뺀 채로 노를 젓는다. 마치 걸어가는 것과 같은 자세다. 이때 발의 간격은 대략 30cm 정도를 유지한다. 노를 밀 때는 우측 발의 뒤꿈치를 들고, 당길 때는 좌측 발의 앞을 들어야 한다. 발을 고정한 상태에서 노를 저으려고 하면 힘이 많이 든다. 노를 저을 땐 전방을 주시해야 하다 보니 만약 우측 발을 앞으로 내고 노를 저으면 몸이 뒤틀리고 고개가 불편해진다. 한편 노를 밀고 당길 때 각도는
노의 설치 장소는 배의 크기에 따라서 다르다.해추선(海鰍船)에 설치하는 두 개의 노는 각기 다른 위치에 둔다. 노가 하나일 때는 고물에서 봤을 때 좌측의 맨 뒤에 설치한다. 두 번째 노는 같은 방향 바로 앞쪽의 고부랭이가 있는 곳에 둔다. 이때 노가 배 밖으로 나가도록 별도의 멍에를 걸어둬야 한다.노는 ‘앞 젓거리(앞 곁노)’라고 부른다. 맨 뒤에 설치한 노가 두 개 이상일 때는 맨 뒤의 노를 ‘밑 노’라고 한다. 바탕이 되는 노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해당 노는 치의 역할까지 한다. 혹자들은 ‘민노’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밑노라는
중국의 노 그림1은 중국의 노를 나타낸다. 노의 생김새는 별다를 게 없지만 노착이 두 개로 돼 있단 점이 특징적이다. 이렇게 만들면 밀고 당길 때 노가 매우 둔해져 사용하기 불편하다. 또한 두 개를 연결하는 지점에 물이 스며들어 썩게 돼 사용 연한이 짧아지고 고장도 자주 난다.중국의 노는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별도의 쇠고리를 만들어 그 고리를 노착에 걸고 젓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경우 쇠와 나무의 마찰로 인해 쉽게 닳고 부러진다. 반면 우리나라의 노는 노반드레를 노손에다 걸고 젓는다. 만약 닳아서 부러지면 간단히 노손만 바꿔
완도 지방의 노 그림1은 완도 지방에서 사용하는 노다. 노착의 생김새가 마치 통나무를 둘로 쪼개어 놓은 것처럼 둔탁해 보이지만 좌우로 잘 구르고 아주 튼튼하다. 무게가 있어 구르는 것을 도와주기도 한다. 노잎을 만들 땐 쭉나무(가죽나무), 가시나무, 참나무, 전나무(편백)를 사용한다. 노착은 주로 소나무를 써서 만든다. 가죽나무는 강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잘 휘어져서 최고로 쳐줬으나 양이 많지 않아서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시나무를 사용했으나 마르면 실금이 가는 특성 때문에 최소한 1년 정도는
그림1과 2은 둘 다 도다. 그림1은 서양식 보트에 좌우로 설치하는 도다. 그림2는 우리나라의 큰 배들이 종선으로 사용했던 자그마한 배에 설치했던 도다. 종선은 전체 길이가 대략 4m 정도인 작은 배다. 배가 커서 접안을 할 수 없을 때 종선을 이용해 육지에 내려오곤 했다.T자형 도는 그림3과 4처럼 배의 고물이나 좌현에 설치했다. 줄로 고리를 만들어 도를 끼워서 젓는다. 이처럼 고물이나 좌현에 도를 설치하는 건 정상적인 노를 설치하면 노의 길이 때문에 배는 작은데 노 젓는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해서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공간이 좁
노는 중요한 선박 추진 기구 중 하나로, 동서양에서 사용하는 것의 작동 원리와 방법이 다르다. 서양의 노는 한 쌍 혹은 여러 쌍을 설치해 배에 앉아서 잡아당기는 반작용으로 선박이 움직인다. 이러한 형태의 노는 노라고 하지 않고 ‘도(櫂)’라고 한다. 도는 저을 때 몇 개가 되던 일시에 잡아당기고 일시에 멈춰야 해서 배가 가다가 멈추는 걸 반복하게 된다. 또한 도가 양옆으로 나가 있기 때문에 근접전에서 아주 불리하다. 만약 다른 배와 붙는다면 도를 저을 수도 없지만, 이로 인해 도가 다 부러지게 되는 불편함이 있다.동양의 노(櫓)는
먼저 표민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19세기 중엽 순천 어부 11명과 해남 상인들이 일본 땅에 표류해 갔을 때 조선인과 일본의 전어관(傳語官; 통역을 맡아 하던 벼슬아치) 사이에 이뤄진 대화 내용을 적은 것이 표민대화다. 이 책에 배와 관련된 명칭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들만을 골라봤다.▶배를 가리키는 어휘어선(御船), 대선(大船), 도해선(渡海船), 벌선(筏船), 도선(舠船), 소선(小船), 신행사선(信行使船), 부선(夫船), 원선(元船), 일본선(日本船), 전선(戰船), 조선(朝鮮)배, 표류선(漂
17) 똥개와 널 깔기 그림1 속 ㄴ자 모양 부재가 똥개다. 마땅한 이름이 없어 그냥 목수들이 쓰는 용어를 그대로 썼다. 도모지리, 선미지리라고도 한다. 부자리 삼이 하반 밖으로 나가 있고 덤불이 밖으로 나가 있으므로 이를 보호하기 위해 똥개를 사용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문양을 그려 넣는 등 똥개에 미(美)적인 것을 가미하기는 현상도 나타났다.다만 경주용 배에는 똥개를 붙이지 않는다. 똥개와 하반 사이에 생기는 공간에 물이 차서 배의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또 배 밑과 부자리 삼에 초를 칠해 물의 저항
13) 판재 연결법 삼 등을 붙일 때 배가 길면 그만큼 되는 장목(長木, 긴 나무)을 구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무를 이어서 써야 하는데 이음 방식에 따라 차이가 크게 난다. 그림 1-1, 1-2, 1-3은 모두 다 판자의 이음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1-1은 비교적 쓰지 않는 방식이다. 약간만 휘어져도 쪼개져서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평평한 대청마루 바닥 같은 곳에서는 사용해도 무방하다. 그림 1-2는 제일 많이 쓰는 방식이다. 판을 휘어 붙일 때 잘 쪼개지지 않아 일하기 편안하다. 그림 1-3은 가끔 쓰는 방식이다
9) 하반 그림1과 같은 하반을 붙이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옛날에는 배의 밑에서 하반이 있는 위로 구지못을 쳐서 고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반을 세울 때 뒤로 비스듬하게 세우기 때문에 하반과 밑을 관통시켜서 볼트로 조인다. 이때 잊어서는 안 될 게 있다. 밑에서 위로 올리는 볼트의 대가리에 댓거울을 감아서 조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으로 물이 스며드는데 그 물은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 철저히 막아놓지 않으면 배를 타고 다니면서 계속해서 애를 먹는다.10) 간답(
5) 배 무이 장소 목재 건조가 끝나면 먼저 배를 만들 장소를 정해야 한다. 지금이야 장소가 정해지면 모든 것을 자동차에 싣고 가면 되지만 필자가 일을 배울 때만 해도 몇십 리고 공구를 지게에 짊어지고 가야 했다. 배를 만들 곳이 다른 섬일 경우에는 나룻배를 타고 가서 또 몇십 리를 걸어서 가야 했다. 그런데도 스승들은 교대는커녕 ‘힘들지’라는 말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배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의 집에 도착하면 일몰 시간이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일반적으로 주인집 마당에서 배를 만들었다. 집 마당이 좁으면 마을의 넓은 공터에서 일하
모든 배의 제작 방법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이 글에선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쉽게 만들 수 있고 함부로 부리기에 좋은 ‘해추선(海鰍船)’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해추선에 갑판만 깔면 어선 등이 되고, 오늘날에는 이 배가 모든 배의 기초가 된다. 이 배를 현재는 ‘채취선’이라고 부른다. 김이나 미역 등을 채취하는 데 사용한다고 해서 정해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해추선(海鰍船). 농토선(農土船), 토선(吐船), 해채선(海菜船)이라고 했다. 개인 소유의 배는 지토선(地土船)이라고 구분하기도 했다. 50년대 중반까지도 완도에서는 실제
그림20-1, 20-2, 20-3의 명칭은 일본인들이 부르는 고유의 이름이다. 이와 같은 ‘쿠기사시노미’라는 명칭이 노미라는 말은 떼 내어 버리자 ‘구기사시’로 전해진 것이다. 쿠기라는 일본어가 구지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구지(傴扺)라는 본래의 우리 명칭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그림20-1처럼 구부러진 것을 목수들은 ‘누이스끼’라는 국적불명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경상도 지방에서 말하는 누이 못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 중 구부러진 것은 맞대기 이음방식으로 못을 박는 경우 사
옛날에는 배를 만들 때 어떠한 공구를 사용했을까?예나 지금이나 사용하는 공구에는 큰 차이가 없다. 몇 가지 안 되는 공구로 배를 만들었어도 마음대로 대해를 항해하고 다녔다. 옛 공구로 일을 한다면 힘도 많이 들고 작업능률도 떨어지겠지만 배를 만드는 데는 별 어려움 없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공구들은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용됐을 것이다. 그 공구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개량된 공구로 변해 오늘에 이르렀다.고전번역서인 ‘기측체의(氣測體義)’의 기록을 보면 나무를 깎기 위해 자귀(근,釿)를 만들고 나무를 뚫기 위
선소란 배를 만드는 곳인데 여기에서는 배를 만들었던 곳이나 매어뒀던 곳을 의미한다. 그럼 이러한 배들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밝혀진 것부터 하나씩 풀어보자. 오늘날의 조선소들을 보면 대부분 옛날에 조선소가 있었던 곳이나 그 인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곳을 보면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 진남관 앞 중앙동 사거리의 선소(지금은 매립됨)와 돌산읍 군내리 서외마을의 방탑진 선소 등이 있다. 여천 선소유적지는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들었던 곳이라고 하며, 임진전쟁 때는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 보성군 득량
배는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게 됐을까?그 누구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 인류의 삶과 동시에 이뤄졌을 것이다. 내(川)를 건너야 할 때 그 방법을 찾았을 것이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바다로의 진출도 절실히 요구됐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물에 뜨기만 하면 됐겠지만 사람의 몸이 물에 젖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고, 짐도 날라야 했을 것이다. 배란 아득한 옛날부터 고기잡이, 해상의 운송수단, 전선 등 다양한 형태로 긴긴 세월을 지나면서 변해왔을 것이다. 위의 그림1과
대한민국전통기능전승자회에서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의 후원 하에 오는 25일부터 27일까지 완도군 신기마을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한다. 마을 주민 외에 선착순 30명까지 참가자를 모집한다. 참가를 원하는 사람은 전화(010-8600-6323, 완도읍 신기마을 이장 마광남)로 연락하면 된다.△일정표 및 세부내용▶26일 10시부터 17:00까지 완도읍 신기 마을에서 재능기부 및 봉사활동▶봉사내용 : 방충망 교체, 영정사진 찍어주기, 마을회관 현판 달기, 마을 안 청소, 대문수리, 주민 중식 제공, 민요공연(1시간)▶재능기부 : 솟대 만
지금까지 우리의 바다에서 인양된 배들을 보면 하나같이 고려 시대의 배들이다. 이러한 배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배의 밑은 몇 판이고, 삼은 몇 판으로 되어있더라고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만, 마치 수학공식처럼 우리의 배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고 하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배란 크기나 용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나무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정조 때의 기록에 배를 건조할 때에 본판(本板)의 경우는 나무 하나를 더 붙여서 그 넓이를 약간 증가시키고, 삼판(杉板)의 경우는 소나무의 대소(大小)에 따라 7
새싹의 붉은색은 어린 잎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해준다고 합니다.
완도의 봄소식을 전합니다.
우리의 배를 통칭해서 한선(韓船)이라고 한다. 우리의 전통 한선은 예부터 우리만의 독자적인 조선방법을 가지고 배를 만들어 왔던 것이 전래되어 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자기들 식으로 개량할 것을 강요하면서 전통적인 우리배의 선형이 바뀌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선형이 바뀌어가고 있는 시기와 맛 물렸을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러운 시대적인 변화였을 것이다.만약 현대의 우리 배들이 일본이나 미국 등의 배와 선형이 같다고 해서 그 나라 배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