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꽃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인가요?"푸른 눈의 여인이 엎드려 있는 노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크고 시원시원한 눈매, 훤칠한 키, 가녀린 허리에다 말투까지 남다른 여인의 자태는 일행 중에 돋보였지만 아무도 그것에 신경쓰는 이들은 없었다. 일행은 그저 먹던 밥을 잠시 멈추고 이어질 노인의 대답에 주목할 뿐이었다."늙고 천한 몸이지만 바위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은 자주 해온 일입니다." 노인이 바위 꼭대기에 핀 꽃을 바라았다."저 꽃에는 독이 있으니 먹을 만한 작은 짐승을 잡고, 잎은 잘 말려 열을 내리는 약에 씁니다. 마님께서는
炯아,'우리 이혼했어요'를 어쩌다 시청했다. 평소 같으면 굳이 보지는 않았을 텐데, 네게 들은 얘기가 있다 보니 최고기, 유깻잎 편을 보게 되더라.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는 신선했다고 생각한다.이혼이 굴레처럼 느껴지는 우리 사회에서 - 적어도 우리 세대에게는 - 버젓이 이혼했다고 '광고'하는 프로그램이 탄생하고 시청률이 높다는 것은 인식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가 아닐까 싶다.물론 출발이 모든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들이 여과 없이 방영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고, 암묵적으로 재결합으로 몰아가는 것 또한 한국인의 정
昊에게이른 장마가 오더니 날 촉촉하고 안개가 짙다. 너랑 네 동생을 태우고 산을 넘어 집까지 오던 길, 그 짙은 안개가 생각난다.소설 '무진기행' 안개 속의 마을을 찾아 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그 고립감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소설은 담담히 그려가고 있다. 짧은 소설의 영향은 길어서 많은 문학 지망생
昊에게'엥, 600g에 44,000원? 미쳤어?'네 엄마가 자신의 예상과 다른 가격에 비명을 질렀다.내 기억에 한우를 내 돈 주고 사본 건 네 고3 시절, 하도 아침을 안 드시기에 이거라도 드시려나 하고 사 보았던 게 유일한 것 같은데.... 어쨌든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거니까.이 집에서 파는 고기들이 인기가 있는지, 애초 생각했던 육회용 고기는 다 팔리고 없어서 한방족발을 사 들고 왔다. 음, 네게 미안한데 맛있더라. 한우 찹스틱(chopstick)에 한방족발.최근 와인에 꽂힌 네 동생은 내가 사 온 저가형 와인에 향이 없다는 둥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2.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창 밖으로 기차가 지나갑니다. 결혼한 지 스물일곱 해를 맞은 오늘, 저는 아내와 여행 중입니다. 당신이 떠나간 지는 열아홉 해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제 아내를 몹시 귀하게 여기셨지요. 제 아이들조차 당신의 품을 찾았습니다. 평생 홀로 살아왔고, 가족과도 어느새 멀어져버린 당신에게는 꼭 살아야겠다는 열망이 없었을까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그 열망을 데우지 못했습니다. 위암 판정을 받은 후 몸도 마음도 급속히 쇠약해져가는 모습을 저는 끝까지 보아야 했습니다.2002년
炯에게아침 먹으며 유튜브로 '프엥카레의 추측'에 대한 콘텐츠를 보았다.- 흠. 이 유튜버님은 부러울 만큼 이해력과 전달력이 뛰어나더라. -푸엥카레의 정리는 그레고리 페럴만에 대한 에피소드와 함께 조금은 알고 있던 얘기였다.그래서 별 부담 없이 들었는데 웬걸..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 서스틴의 우주모형에 대한 추측은 푸엥카레의 정리와 연관되어 있더라. '추측'은 다시 위상수학과 관련되어 결국 위상수학은 푸엥카레의 추측을 증명하는 핵심이 된다. 아쉽게도 '위상수학'의 핵심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 지식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개 취미로 혹
昊에게-----엄마 엄마오늘 과학 시간에 선생님이 말했어요모든 것이 빛으로 존재한다고요빛이 없으면 서로를 확인할 수 없다고요빛이 있어서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고요그럼 엄마내 앞에 있는 엄마는 엄마인가요 빛인가요어느 날 엄마가 사라진다면 그건빛이 사라진 거니까 엄마는보이지 않을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건가요- 임경섭, '빛으로 오다' 중에서------'보이지 않는다' 와 '사라지지 않는다'는 같은 의미가 아니지만, 빛이 있기에 이 다른 뜻의 단어가 같은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고 시인은 묻는다.대개 시인의 직관은 이러하다. 익숙한
昊에게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엄마가 지난 주부터 말했었는데, 이번 토요일에는 갈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속이 편안해지고 있다. 이틀 동안 밥 한 공기를 나눠서 물 부어 끓여먹고 한 숟갈 정도의 참치통조림과 간장, 김 대여섯 장으로 식사를 해결한 덕이지 싶다. 매일 이런 식으로 먹어도 삶에 지장이 없다면 참 좋겠는데.. 영양학적 불균형을 따지기 이전에 미각에 대한 욕망이 앞서서 쉽지 않을 것 같다.항상 그렇지만 '크게' 아프고 났더니 많은 생각들이 달라지고 있다. 크게 성공해도, 크게 실패해도 사람들이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마음에 각인
수주촌의 우두머리 벌보말, 일리촌의 우두머리 구리내. 이리촌의 우두머리 파로, 이 세 사람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왕이 불렀다. “내 아우 두 사람이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가 돌아오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보고 싶은 정이 그치지 않는데 살아 돌아오게 할 방법이 없겠는가?” 세 사람이 한결같이 대답했다. “신들이 듣건대 삽량주의 우두머리 제상이 용감하며 지모(智謀)에 능하다 들었으니 근심하심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삼국사기 권45, 박제상전)”聞水酒村干伐寶靺一利村干仇里迺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召問曰吾弟二人質於倭麗二國多年不還兄弟之故思念
昊에게어제 드라이브는 대구 위쪽의 김천이라는 도시에 있다는 '초롱반점'이 목적지였다.어린 시절 집 아래에는 초롱반점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그때는 짜장면이 쉽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저렴한 음식이 아니었다.까다로운 입맛의 어머니 덕에 나는 또래에 비해 자주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가 운영했는데 남편이 조리부터 배달까지 다 했었다.내 엄마는 맛이 괜찮다며 별식이 먹고 싶을 때는 항상 그 집에서 주문하셨다.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맛이 변했다며 다른 집을 찾기 시작하셨다. 주문이 뜸해진 건 우리 집만이 아니었던
炯아,일요일이 저물어간다.자동차 정기검사를 금요일에 받고 왔다. 검사장소는 어렵지 않게 찾아갔다. 음.. 그때까지는 수월했는데 예약제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일찍 간 탓인지 차들이 검사라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햇볕은 '죽어볼래?' 하고 내려쬐고 결국 차만 세워두고 내려서 그늘을 찾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늙은 아내와 그녀를 부축하는 남편도, 보라색 썬글라스를 쓰고 차양 긴 모자를 쓴 중년의 여성도, 초등학생쯤인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도 나무 그늘 아래서 햇살을 피하고 있었다.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검사소 너머로 보이는 도로의
昊에게일찍 집을 나섰다.새벽의 길은 상대적으로 한가롭지만 화물차들로 인해 느리다.화물차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혹은 적정한 속도를 통한 연료절감과 제동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꾸준한 속도로 느릿하게 움직인다.특히 법규상 운반차량에 실어 이동해야 하는 굴삭기나 지게차등의 중장비등도 가까운 거리를 이유로 비용을 아끼기 위해 운송량이 적은 새벽에 움직인다.그 사이를 뚫고 미친 듯이 질주하는 차량들 또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질주하는 차량은 외제차와 국산차를 가리지 않는다. 드물게는 스포츠카도 물론 있지만 인상적인 것은 가끔 힘에 부치지 않을
-----------------------------------------길도 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길 위에 서 있을 때 들었습니다. 거울을 닦듯 이 길을 닦으면, 길은 어느새 목판화 속의 작은 집으로 나를 데려갑니다. 공기의 빈 곳으로 가득히 연기를 채우며 꽃 피는 집은 또 다른 꽃씨를 품고 있을 것입니다. 목판화 속의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목판화 속의 집을 불러낼 수는 있지요. 거기가 내 옛 집이었음을, 그렇게 집은 구름이 뜨거나 지듯 아무데서나 불쑥 생기기도 하고, 다시 맑게 지워지기도 합니다.집들은 불을 켜고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새로 받은 교과서를 들쳐보다 이 문장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낯설었었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 시대의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고(故)한창기 선생은 나와 달랐다.그는 옛 사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한국인과 대화하려고 했다. 그의 역작 '한국의 발견' 열 한권 전권(全卷)이 중고거래 앱에 '연락주세요'라는 사진과 함께 매물로 올라왔을 때, 마음속에 절로 환희가 일었다. 학창 시절
림 (rim) 이라 불리는 바퀴살을 고리에 겁니다.공장에서 일한지 3년째가 되었습니다. 작업은 단순합니다. 고리에 걸린 바퀴살은 컨베이어를 따라 도장박스를 진입합니다. 환갑이 넘은 동료가 림에 골고루 페인트가루를 묻히고 나면 림은 화로를 통과해서 다시 내가 있는 자리로 돌아옵니다. 저는 그 바퀴살을 다시 내려서 통칭 파레트 (표준어로는 팰릿 pallet) 라고 불리는 나무틀에 내려 정리합니다. 승용차의 바퀴살은 가볍지만 내가 일하는 공장은 지게차의 바퀴살을 만듭니다.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만큼 지게차의 바퀴살은 나사구멍을 제외하고는
家在壁山岑 내 집은 속세를 떠나 푸른 산봉우리에 있어從來有寶琴 가진 보물이라고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거문고 하나.不妨彈一曲 한 곡조 정도 연주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祗是少知音 그 음을 알아들을 이 무척 적으니 망설이게 되네 글씨 한 점을 고민 끝에 샀다.누군가에게 선물로 건네진 것이라는 것이 맘에 걸렸지만,결국 그 내용이 마음을 움직였다.타산지석이라더니, 세간을 떠나 청정함을 추구한다고 하거늘결국 알아줄 이 없어 한 곡 타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는 것,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표리부동의 표본이다 싶어 경계(警戒)로 삼고 싶었다. 세간에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 유병록 우리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서랍을 열면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앞날에 대해 침묵해요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겨울이 와도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봄이에요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금방 흘러가고 말 봄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짧디짧은 봄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그뿐이라면이번 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昊에게회사 정문앞 목련나무에 꽃망울이 올라오고 있다.잊고 있었다. 봄은 항상 목련과 같이 온다는 걸.어릴 적 옛 집으로 올라가던 길에는 봄마다 담장위로 뻗은 목련이 환했다. 옛 집, 작은 집에도 목련나무가 하나 심겨져있어 집에 오면 다시 환한 꽃망울이 반겼다. 비로소 봄을 실감하며 계절이 가져다줄 따뜻함에 설레었었다.목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목련을 보며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을 생각했었다. 붉게 흐드러진 꽃들은 자태를 뽐내며 생명력을 과시한다. 목련은 희고 고와서 금새 부스러질 것 같은 위태함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몇 번 봄
옛 집터를 돌아보면 무척 작았다. 아니 무척 작다고 느낀다. '좁다'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공간은 풍요로웠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어 여름마다 등목을 했고 처마끝 떨어지는 빗물을 앉아 볼 수 있는 쪽마루도 있었다. 아버지는 겨울마다 땅을 파고 독을 묻었다. 어렸던 나는 엄마가 언제 동치미를 담그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쯤은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치며 엄마를 찾다가 김치담는 광경을 구경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이내 코를 쏘는 양념향에 질려 방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옹기뚜껑을 편하게 들 수 있을만큼 묻어둔 김장독, 엄마는
- 페르시아, 혹은 조로아스터교의 전설에 따르면 신령한 하오마 나무는 ‘위대한 가오케르나 mighty Gaokerena’라고 불리웠다. 가오케르나 나무에는 상처를 치료하는 힘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특히 그 뿌리에서 나오는 액은 신들이 사용하는 영약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힘을 두려워한 악마는 도마뱀이나 개구리로 변해 나무를 없애려 했다. 그래서 ‘가라 Kara’라는 이름의 물고기 열 마리와 여섯 개의 눈과 아홉 개의 입을 가진 당나귀가 나무를 보호했다. - 위키피디아 ‘Gaoke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 수영, ‘풀’-------------------------------------------- 김 수영 시인의 ‘풀’을 다시 읽는다.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일까. 그의 시는 항상 내게 반항하는 자의 초
겨울 강, 그 두꺼운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저 마른 붓은 일획이 없다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그 누가 일필(一筆)도 없이 휘지(揮之) 하는가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 이정록, '갈대'--------------------매일 출근하며 강을 건너 퇴근하며 다시 강을 만난다. 태어나기 전부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사람들에게도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나희덕, '길 위에서'-----------------마당 있는 집에서
그 날 아침에는 비가 내렸습니다.비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러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차창을 가릴만큼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안개에 싸인 아침풍경에 절로 ‘우와’하는 소리를 내며 출근했습니다. 반복적이고 건조한 일상, 무미건조한 마음에 와닿는 싱그러움은 마음속 깊이 기쁨을 꺼내기에 충분했습니다.저 말고도 아쉬운 이 비를 기뻐하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기쁨을 나처럼 ‘우와’하고 표현하지 못합니다. 대등한 생명의 입장에서 저는 그가 기뻐하리라고 추측합니다. 그는 제가 일하는 작은 공장 뒤편에 자라고 있는 이름모를 나무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같은 길을 가는 거라고 믿었지한 차에 타고 나란히같은 전경을 바라보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봐너는 네 길을 따라 흐르고나는 내 길을 따라 흐르다우연히 한 교차로에서 멈춰서면 서로 차창을 내리고안녕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랑인가봐 사랑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영원히 계속되지도 않고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끈도 아니고 이걸 알게 되기까지왜 그리 오래 걸렸을까오래 고통스러웠지 아, 신호가 바뀌었군다음 만날 지점이 이 生이 아닐지라도잘 가, 내 사랑다시 만날 때까지잘 지내 양 애경, '교차로에서 잠
아내가 말했다. “거기까지 왜 가려고 그래?” 기록되는 순간 기억은 사라진다.기억이란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마당과 같다. 마당을 다듬고 나면 옛 모습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마당 한 구석에 개미들이 드나들던 작은 개미집이 있었다고 한들 그 개미구멍이 있었던가 하는 흐릿한 의문만이 남는다.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원두막의 기억은 그러하다. 살면서 딱 한번 원두막에 누웠었다. 별들은 왜 은하수라고 불리는가를 알려주는 것처럼 풍성히 반짝였고, 발 아래에는 잎으로 가리워진 수박들이 셀 수 없이 늘어서 있었다. 할머니의
이름을 태희라고 지었다.‘태희’는 내가 네 번째로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리고 태희는 내게 특별했다. 그 아이는 처음으로 ‘온전히’ 나 혼자 소유한 자동차였기 때문이다. 아내는 800cc의 자그마한 몸을 타고 고속도로로 나가는 나를 아침마다 불안한 마음으로 배웅하곤 했다.주고받는 애정은 가끔 서로를 피곤하게 한다.혼자만의 작은 공간을 난생 처음 가진 나는 자주 행복했다. 아침 한 시간, 퇴근길한 시간을 나는 그 아이가 만들어준 공간에서 지냈다. 공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속에서 일관되게 나를 지켰다. 실재로 변화하는 것은 없었다. 오
K부장님께,오늘 말씀대로 잡지 N의 구독을 연장하였습니다. 아내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펼쳐보지도 않은 잡지가 쌓여가는 걸 보면서, 아내는 딱 한 번 읽지도 못하는 걸 왜 자꾸 구독하냐고 얘기했었습니다. 오늘의 구독이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아내는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겠지요.부장님께서는 샘터라는 잡지를 아시는지요? ‘부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밝고 깨끗한 여성의 목소리가 ‘고객님’하고 전화에서 말씀하셨을때는 조금 당황했었지요. 내가 생각하는 나이가 맞다면 부장님은 ‘샘
파릇한 벼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바람은 휘청거리는 벼들을 보듬어 물결을 만들어낸다.물결이 이어진다. 그래, 한때 여기는 바다였다.작은 배들이 날씨를 걱정하며 쉼없이 드나들던 바다. 왕은 절을 짓고자 했다.배들은 쉼없이 물고기를 잡았고, 먹고 입을 것들을 날랐다.가람은 조촐했으되, 바다를 마주보는 탑들은 우뚝 서서그 위세를 풀풀거리며 날리고자 했다.절은 살아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기다림에 지친 왕은 용이 되려 했다. 그래 이건 꿈과 신화가 믿어지고 있을 때의 이야기.꿈과 신화를 믿고 권력을 끝끝내 지켜낸 한 남자의 이야기. 한때
내 눈빛에 빛나는 별들로내 심장 속을 태우는 저 불빛도영원하진 않겠지 but 잃을 건 없지- 2NE1 'Fire' 공자는 말했다. “그가 노나라에 있을 때는 음악이 몸과 마음을 울렸는데, 다른 나라로 가버리고 나니 그러지 못하는구나” 인(仁)이라고 하는 것이 그가 보기에 인간이 평생 추구해야 할 목적이었다면, 음악은 그 수단이었다. 그는 음악을 귀히 여겼다. 좋은 음악에 빠져 즐겨하던 음식을 잊고 몰입했다는 또 다른 이야기는 음악에 대한 공자의 열정이 어떠했나 하는 것을 알려준다. 음악은 보편적이다.‘덕후’의 설레임은
필경에는 하고 넘어가야 하는 얘기가 있다무거운 안개구름이 밀려들어귀밑머리에 젖어도한번은 꼭 해야만 되는 얘기가 있다잠든 나귀 곁에 앉아서나귀의 귀를 닮은 나뭇잎으로밤바람을 깨워서라도그래서라도 꼭은 하고 싶은 그런 얘기가 있다 - 김태형, ‘당신 생각’ -------------------------------------------- H에게우리가 헤어진지도 서른 해를 훌쩍 넘었습니다.아니 ‘헤어졌다’고 말한 것은 정정하지요. 그건 단지 내 소망일뿐이었습니다.우리는 서로 좋아한 적도 없었습니다. 나만이 당신을 몰래 좋아했지요.처음 만났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