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문은 시대가 변하면 도태되거나 새로운 후계자가 등장하여 더욱 발전시키지요. 성인이나 종교를 창시한 인물도 처음에는 인간이었지만 후대로 가면서 신격화과정을 거치고, 나중엔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배교자 혹은 조사능멸이라는 해괴한 죄로 처벌받게 됩니다.공자는 약 200년 후 맹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제자백가의 한 사람으로 기록될 인물이었습니다. 맹자가 활약할 당시 중국 천하는 도가사상이 단단하게 뿌리내렸고, 묵자의 겸애사상이 시대조류였습니다.맹자는 치열하게 노자와 묵자의 사상을 공격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천하에 널리 알
인류사에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한 몽골의 칭기즈칸. 가장 잔혹한 정복자. 파괴와 학살의 사신. 절대적인 무력으로 이긴 전쟁, 감히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게 하여 이룬 대제국의 평화. 이집트를 제외한 중앙아시아의 전 이슬람세계를 정복하고 동으로는 고려를 복속시킨 원나라.청나라 강희제에 의해 몽골은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리가 됩니다. 청나라가 쇠약해지자 외몽골은 독립을 선언하고 1924년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국호를 정합니다.몽골리아(약칭 몽골)는 1992년 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하였고, 현재는 3백여 만의 인구가 사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동토의 한반도에 촛불 밝히니 따뜻한 봄기운이 감돌고 있다. ‘혹시 우리 생전에 통일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분단국가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지금은 중국의 위세에 눌려 통일도, 독립도 선언하지 못하는 곳 대만에 살고 있다.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있지만 ‘CHINESE TAIPEI’란 이름을 사용해야하고,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걸어야하는 곳 ‘대만’.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두 곳에 살다보니 통일문제에 관심이 더 많다. 1949년부터 40년 넘게 동・서독으로 갈라져 지내던 독일은
대만의 지난 역사를 다룬 이야기는 ‘[대만이야기 5] 장보고와 정청꽁’, ‘[대만이야기 8] 대만의 슬픈 역사’에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이번 글에서는 대만을 놓고 왜 미국과 중국이 다투는지, 그 배경과 대만인들이 느끼는 감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1894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일본에게 얻어맞고, 1895년 4월 23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 이홍장이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조약을 체결합니다.주요 내용은 1,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권을 영구히 포기하고, 조선을 완전한 독
그동안 한국고대사를 쓰면서 많은 자료들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까? 기록은 진실일까?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동일한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모두가 보고 듣는 상태에서 합의를 하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정 반대로 기록합니다.하물며 천 년 전, 2천 년 전의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만 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신념이고, 사이비 종교의 맹신과 같은 위험요소라고 생각합니다.이 지구상에는 많은 종족들이 여러 곳에서 흥과 망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와 수많은 유물을 남겼지요. 그 유물을 보면서
평양성이야기는 고구려의 실존 자료인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참고합니다.광개토대왕비문과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동명성왕 주몽에 관한 내용은 세곳의 출처에서 거의 일치합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각 왕들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오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중국 자료에 근거하였습니다.기원전, 중국의 전한 말기에 동명성왕(재위 BC 37~BC 19)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한 후, 홀본(졸본)에서 소서노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부여에서 자란 주몽의 큰아들 유리명이 들어와 태자가 되자, 소서노는 두 아
최초로 관에서 편찬한 사서가 진서입니다. 이전의 사서들은 사가들이 전문적인 지식과 자료를 토대로 사서를 편찬하였는데, 진서는 당태종 이세민이 어용학자들을 모아 편찬하였지요. 후대 학자들로부터 삼국지 읽을 때 참고할 지리지로서의 가치뿐이라는 혹평을 듣는 책입니다. 진서에 참여한 사람들이 문인들이라 이것저것 잡다하게 집어넣어서 그런 현상이 생겼다고 평가합니다.진서 지리지에 한사군과 관련된 지역이 나옵니다. 바로 유주와 평주입니다.유주는 현재의 북경지역입니다.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이 있을까봐 원문을 다 올리고 필요한 부분만 번역을 하겠습
먼저 한사군을 설치하기 이전의 당시 형세를 살펴봅니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고 몽염장군을 보내 북쪽의 흉노를 칩니다. 그리고 북방의 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지요. 만리장성은 내성이 아니라 적과 대치하는 최전방의 방책선입니다.초한전쟁이 일어나자 흉노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북방을 통일하여 최대의 유목국가로 성장합니다. 항우를 이긴 유방은 흉노와의 전쟁에서는 참패를 당하고 7일간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칩니다. 그 이후 흉노와는 전쟁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지요. 그리고 흉노와 조약을 체결하는데 한의 공주를 선우(흉노 지도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전의 우리역사서가 전해지지 않기에 중국 문헌을 찾아 고조선이야기를 씁니다. 우리나라에서 인정을 안 할지라도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니까요.가장 먼저 조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주나라 무왕 때 이야기입니다. 무왕이 상나라 왕족인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했다는 이야기가 사마천 사기에 등장합니다.1.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보면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 그래서 무왕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은 청나라 강희
우리나라의 역사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국과 일본의 이해에 따라 좌우되어 왔고, 그 피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글로 기록할 수 없었던 태생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최근 사학계의 갈등과 대립으로 우리 고대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비록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평범한 일반인의 눈으로 고대사를 논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몇몇의 전유물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상상력과 고증으로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군이야기, 고조선 이야기, 한사군 이야기로 나누어
유방이 팽성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합니다. 도망치기 바쁜 중에도 유방은 장량에게 묻지요. 내가 천하를 차지하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장량은 초나라 맹장 경포(주 : 원 이름은 영포, 죄를 지어 얼굴에 죄목을 문신하는 경형을 받은 후 경포로 불림)가 항우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경포를 끌어들이고, 분봉시 대우를 못 받은 수적 출신의 팽월을 장군으로 삼으라고 하지요. 또한 한신을 중용하라고 조언을 하자 이를 충실히 따릅니다.한신이 북벌을 나가있는 상황에서 유방은 항우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아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일어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장량!’이라고 한고조 유방은 이야기합니다.영웅호걸들이 수 없이 등장하여 한세상 큰 바람을 일으키지만 결말이 언제나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완벽한 삶을 살았다며 선시선종(善始善終)이라 부르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장량이지요.장량이 없는 유방, 장량이 없는 한나라 건국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됩니다. 장량은 단순한 책사 혹은 모사의 개념을 벗어나지요. 유방은 장량의 건의를 묵살하거나 이의를 단 적이 없었습니다. 전쟁에서의 크고
대만에서 중국어를 배우던 초기에 배운 단어가 있습니다. 일생에서 가장 큰 일을 뜻하는 ‘종신대사’입니다. 미루어 짐작해도 결혼이 쉽게 유추가 되더군요. 생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이 없지만, 결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입니다.지난 25일 결혼을 한 신랑은 30년을 지켜봤던 대만친구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선과 악의 양 극단에 카인과 아벨이 있다면, 친구의 두 아들도 거의 양 극단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그야말로 모범생이었고, 둘째는 부모의 걱정거리였지요. 10분을 한 자리에 앉아있지 못
지진과 태풍에 관한 제 경험은 ‘대만 이야기 21 지진과 태풍’에서 이미 했습니다.2월 6일 밤 11:50(대만 시간) 대만 화련에서 진도 6.0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2월 10일 현재까지 16명이 사망했고 290여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지금도 구조활동은 계속되고 있으므로 인명피해는 더 증가할 수 있습니다.고국의 많은 친지들이 저를 염려해주셨습니다. 걱정이 크실까봐 이젠 안심하시라고 이 글을 씁니다. 아울러 대만에 여행을 계획하신 분들께서는 지진때문에 여행을 취소하거나 주저마시길 바랍니다. 그런 저의 마음도 함께 전합니다.
대만은 눈 구경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해발 3,400m의 허환산(合歡山)인데도 1년 중 약 열흘 정도만 눈이 옵니다. 그 때마다 눈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지요. 허환산은 해발 3,000m까지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으므로 대만사람들에게 이국적인 설경을 체험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습니다.오늘은 드물게도 타이베이 양밍산(陽明山)에 눈이 내렸다고 친구가 설경을 보내주었습니다. 한국 광주에서도 주주통신원 김태평 선생님이 밤사이 내린 눈 사진을 보내주셨고요. 이들을 접하고 보니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새장안의 새는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을 위해 노래만 불러주면 양식과 안락한 잠자리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새장 속 세상을 떠나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은 욕망이 간절한 새도 있습니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푸드득거리는 삶은 결코 날개달린 새의 삶이 아니라는 자각, 지금 내가 찬바람 부는 광야를 지나 저 창공으로 날아오르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이 요원하다는 깨달음.30년 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춥고도 외로운 길을 선택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우거진 가시덤불, 이정표도 없는 미지의 세상이었
한신이 위나라에 이어 대나라를 정벌하고 조나라로 진격을 하려는데, 유방은 형세가 위급하다며 한신의 병력을 차출하여 초나라 항우를 막기 위해 데려갔습니다. 한신은 정예병을 보내고 새로 개편한 오합지졸 2-3만을 끌고 정형으로 진군하지요. 당시 조나라에는 20만의 군대가 대비하고 있었습니다.조나라 이좌거는 왕과 실력자 진여에게 청하기를, ‘3만의 군사를 자기에게 주면 수백리 길을 이동하느라 지친 군사들이 정형으로 들어오는 좁은 지형에 길게 늘어졌으니, 샛길로 가서 보급을 끊어버리면 열흘 안에 한신의 목을 바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류는 많은 세월을 이어오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 동력은 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더 크고, 더 높고, 더 화려한 꿈을 이루려는 선조들의 지난한 노력이었습니다.하지만 그들이 높게 쌓아올린 탑만큼이나 행복하였을까요?위진동은 30대 후반에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물질의 풍요가 생각만큼 큰 행복을 주지도 않고, 오래 가지도 않더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더 크고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위한 삶을 위해 17년 전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그가 추구하는 삶은 『단순, 청정(고요)』입니다.“단순과 청정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신이
예로부터 사내대장부라고 큰소리치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치기일망정 싸우다 죽기를 원했습니다.그렇지만 다른 의미로 제가 자주 언급한 인물이 한신입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펼쳐보고자 죽음보다 더한 치욕도 견뎠고, 찬밥 한 덩이도 기꺼이 얻어먹었습니다.한신은 살아서 평생을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놈’이란 욕(과하지욕,胯下之辱)을 먹었고, 역사에서도 개국공신이라는 미명보다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놈’으로,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토사구팽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신이
지난 수천 년의 역사에서 항우만큼 탁월한 장수는 거의 유일무이합니다. 전술, 전투, 개인의 역량 모두 나무랄 데가 없는 용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지혜를 함께 주지는 않았습니다.전장에서 함께 싸울 때는 몰랐지만, 막상 논공행상에 들어가면 섭섭함이 생기지요. 항우는 객관적이지도 남들을 납득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즉흥적이고 기분 내키는 대로 자리를 주다보니 불만이 거셌고, 이는 따르던 사람들이 쉽게 떠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비록 진나라에 망했어도 춘추전국시대 최초의 패자가되었던 환공 이래로 제나라는 강력한 나라를 유지했었지요.
대만이야기 34화 ‘한고조 유방’과, 35화 ‘논공행상’에 이어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초한대전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한고조 유방은 초패왕 항우보다 15세 연장이고, 항우는 8년 동안 전장을 휩쓸다가 30살에 자살을 합니다. 항우가 죽고 유방은 45살에 한나라를 세워 황제가 된 후 재위 7년만인 52살에 생을 마칩니다.항우는 초나라의 명망 있는 장군가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항연은 초나라의 마지막 장군이었지요. 초나라가 망하고 작은아버지 항량의 손에서 자랍니다.항우하면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서 어원을 따져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말들이 꽤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변명하지 마!’라는 말이 있지요. 변명의 한자를 보면 ‘변별하여(辨) 명확하게 밝히다(明).’라는 의미로 사용을 하여야 마땅하나, 현실에서는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말하다.’의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왜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싫어할까?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못하는 부모들의 조급증은 ‘변명하지 마!’라는 한마디로 가슴속에 불신과 증오를 자라게
‘래자불선 선자불래(來者不善 善者不來)‘ 이 말은 청나라 문인인 조익(趙翼)이 쓰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노자의 선자불변 변자불선(善者不辯 辯者不善)을 변형해서 사용했습니다. 둘 다 어렵지 않은 한자이지만 그 뜻은 기억해둘만합니다. ’좋은 뜻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는 조익의 글과, ‘말 잘하는 사람치고 나에게 이로운 사람 없다’라는 의미의 노자 이야기, 마땅히 새기고 경계를 해야겠지요.우리 조상들이 세운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망하는 계기도 아시는 바와 같이 래자(來者)를 다스리지 못한 탓입니다. 주왕조의 봉건 국인 연나라가
아무래도 저의 활동영역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 ‘아름다운 울타리’라고 하는 모임이 있는지도 모르고 참석을 했습니다.지난 10월 13일(금) 저녁 6시에 '문화공간 온:'에서 아름다운 울타리’ 창립 4주년 행사가 있었습니다. 처음 관심은 행사보다는 개인적인 이유였지요. 처음 '문화공간 온:'에 갔을 때 반갑게 맞아주셨던 이상직 선생님을 오랜만에 뵐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연락을 받고 달려간 것 같습니다. 추석 무렵 한국에 들어와 아마도 처음 대외 모임에 나가게 된 셈입니다.따라서 이 글은 아무 준비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역 3성, 즉 헤이룽장(黑龍江, 흑룡강), 지린(吉林, 길림), 랴오닝(遼寧, 요녕)성 역사에 관한 연구공정입니다. 자기들 땅에서 자기 역사를 어떻게 하던 우리가 감놔라 배놔라 할 이유도 없고, 하고 싶은 맘도 없지요. 하지만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이유는 고구려와 그 유민이 세운 발해 그리고 백제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왜? 무슨 이유로 남의 역사까지 가져다 주장을 해야 하는지 조금 언급을 하려고 합니다.동북공정은 과거 역사의 문제임에 비해 현실에선 훨씬 심각한 문제가 서북공정과 서남
그동안 신장 북쪽을 여행하였다면 마지막 회는 톈산(天山,천산)남쪽으로 이동하여 키질 석굴이 있는 쿠처(庫車,고차)에서 출발 쿠얼러(庫爾勒,고이륵)에서 일박하고 우루무치(烏魯木齊,오로목제)로 되돌아가는 약 900여 킬로미터를 이틀간 이동하는 신장의 남쪽 여정입니다.들어가는 입구에 蓮海世界(연해세계)라고 큰 표지판이 걸려있는데 ‘연꽃 바다 세계’라고 번역을 해야 하나요? 위의 지도 쿠를리 우측 파란 지점이 바로 이 호수입니다. 실제로 고대에는 서해(西海)라고 불렸고, 당나라 때에는 어해(魚海)라고 불리다 청나라 때부터 붜스텅호라고 부른
여행을 하는 큰 즐거움의 하나는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역사의 인물을 만나고 새로이 알게 될 때 느끼는 희열입니다.중국이나 다른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면 불교유적을 많이 만납니다. 이천년 가까이 전래되며 많은 이야기를 후세에 남기고 있지요.그중에 석굴이 알려지면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기위해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역사의 흔적을 더듬기도 합니다. 용문석굴, 운강석굴, 돈황 막고굴은 이견이 없는 삼대석굴인데 이번에 들른 키질석굴을 가이드나 해설사가 사대석굴중의 하나라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합니다.가이드나 현지 해설사 모두
바인뿌루커(巴音布魯克,파음포로극)대초원’을 출발, 천산을 넘어 신장(新疆,신강)의 남쪽 타클라마칸 사막 북단으로 이동한 후 동쪽으로 달려 쿠처(庫車,고차)까지 가는 일정입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에 출발을 하기로 했는데 가이드 이야기가 어제 내린 눈으로 천산 남쪽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막혔답니다. 만약 길이 풀리지 않으면 어제 넘어왔던 나라티(那拉提,나랍제)대초원으로 다시 나가서 돌아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6시간 정도의 시간이 더 추가된다고 합니다.중국에 10년 살면서(대만은 아님) 터득한 깨달음은 ‘문제없다. 고 말하면 반드시
천산에는 신장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 나라티(那拉提,나랍제)대초원이 있습니다. 오늘은 약 250여 년 전, 1771년 1월 5일 한겨울에 강물이 어는 러시아를 탈출한 몽고인들의 인솔자 워바시(渥巴錫,악파석)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을 합니다. 그들이 이리분지에 도착한 것은 그해 7월이었습니다. 우리 버스는 이리 분지에 있는 이닝(伊寧,이령)시를 떠나 250Km를 이동하여 나라티(那拉提,나랍제)대초원에 도착하였습니다.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초원에서의 모든 일정은 취소하고 건륭황제가 워바시(渥巴錫,악파석) 일행에게 약속한
이번 여행기도 이틀에 걸쳐 돌아본 마귀성과 싸이리무호수, 카자흐스탄과의 국경 등을 돌아본 글입니다.우얼허 마귀성은 이안감독의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지만 애석하게도 전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마귀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밤이 되면 바람이 일면서 애기울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지정학적인 이유와 바람이 여러 기암괴석사이를 통과하면서 내는 소리라고 추측합니다.몇 년 전까지도 중국이 산유국이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계시지요? 거기다가 수출까지 하였다면 믿어지시나요? 그동안 중동 산유국과 미국 일본
이번 여행기는 이틀에 걸쳐 관광을 한 카나스 공원의 전망대와 호수 그리고 인간정토(극락정토는 들어봤는데, 참 생소한 단어입니다.)라 불리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을 허무촌(禾木村,화목촌)과, 역시나 천하제일탄(天下第一灘)인 오채탄(五彩灘)에 관한 내용입니다.아마 여행 중 가장 눈이 시원한 일정이었고, 나름 산행도 즐겼습니다. 춘하추동을 다 경험한다는 쿤밍의 샹그릴라보다 카나스가 더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카나스국가지질공원’이라고 하는 보호구역입니다. 이곳에서부터는 무공해 전기버스로 갈아타고 첫날은 카나스 호수 방면으로, 다음
오늘 일정은 준가얼 분지의 동북단 푸온(富蘊)현에서 서쪽으로 이동 뿌얼진(布爾津,포이진)까지 약 420Km 입니다. 이곳 준가얼분지에는 준가얼 야생마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6,000만 년 전의 원시말에 가장 가깝다고 합니다.준가얼 야생마는 원래 이곳과 몽고 서부에서 서식을 하였는데 서방에 알려진 계기는 1878년 러시아 장교이며 탐험가였던 푸러와얼스키(普熱瓦爾斯基.보열와이사기)씨가 탐험대를 끌고 3차례 준가얼분지를 탐험하며 야생마를 나포, 채집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명이 푸러와얼스키馬, 줄여서 푸쓰마(普氏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