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트랙터가 모내기 할 논을 삶고 있다. 써레질 밭갈이 하던 일소는 사라지고 어느새 농사 중심이 된 저 농기계가 이제 나에게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됐다.동진아, 네가 트랙터 사고로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나고 벌써 다섯 번 철이 바뀌었다. 너무나 황망한 나머지 동지들이 모여 격식 갖춘 영결식도 챙기지 못하고 보낸 것이 내내 켕겼다.느닷없이 네 전화가 올 것 같다. “어디 있냐? 나 서울 가는 중인데 얼굴 좀 보자!”우리가 처음 만난 지 꼭 반세기가 됐구나. 며칠 전 우리 학과 동기들이 모여 50년 전을 회고하는 자리가 있었다. 19
“절대 잊지 않고 다시 가겠다 다짐”“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 우리 주변에서 흔히 그리고 널리 쓰이는 말이다. 어쩌면 현재도 잊혀져갈지 모른다. 어지러운 세상. 우리는 어디서 지혜를 찾아야 할까.‘어디에도 실리지 않은 기억의 파편이 있다.’ 2018년 봄 강제동원에 대하여 학습하고자 모인 청년들은 한 가지 의문점에 도달한다. 왜 우리는 강자의 기록, 강자의 언어, 강자의 시선에서 역사를 배우는 것일까? 이후 이들은 소수자의 관점에서 잊힌 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특별한 사람도 위대하지만, 그 뒤에는 항상 ‘보통사람
내 연구실 철제앵글 서가 한쪽 기둥에는 색 바랜 신문 조각이 붙어 있었다 . 한 일간지 시단에 실렸던 ‘겨울 북한산’ 이다 . 1987년 말이거나 88년 초라고 써 놓고 물음표를 붙여 놓은 것을 보면 꽤 오래된 것인데, 수차례 연구실을 옮겼음에도 용케도 그 자리에 붙어 남아 있다가, 이제는 수연 박희진(朴喜璡) 선생님의 시집 의 표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있다 .이불 속에서 새벽에 잠이 깨면나의 두뇌는 말들의 용광로~육체의 문은 열릴수록 좁아지고마음의 문은 열릴수록 넓어진다묘구다 싶어 벌떡 일어났다이 묘한 구절
이어 내리건대, 해의 차례는 임인년 유월 병오 초하루, 이렛날 기미, 이른바 2022년 7월 5일장손 장헌영을 비롯한 유가족 일동, 장재성기념사업회 회원 일동, 장고봉 인근 마을 주민과 여러 후학은 청정한 몸가짐과 경건한 마음으로 감히 삼가 밝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보며장재성 선생 영전에 아뢰오니,당시 전남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에서 1908년 6월 20일 장원용 선생과 최예언 선생 사이에서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나 1926년 11월 3일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하셨으며, 1
이틀 전이 어머니 생신 일이다. 그러나 이젠 어머니 얼굴을 봴 수 없다. 부산 영도엘 가도 어머니는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환한 얼굴로 반기던 그 모습이 그립다.장인 어른 추모 기일을 맞아 나흘 전 부산엘 내려갔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들어가 가만 가만 어머니 유품을 만지다 그만 자리에 누웠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제 2주가 흘렀다. 여전히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 같고 꿈만 꾸는 것 같다. 슬픔을 위로 받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가슴엔 여전히 그리움과 슬픔만 가득하다.올해를 마
하늘로 가신 내 어머니 칠팔월 뙤약볕온몸으로 받으며고구마 밭이랑이리 넘고 저리 넘으며고구마순 뜯어다짧은 밤 반 잠자며고구마순 곱게 벗겨파아랗게 삶아이슬 맺힌 새벽 십리 길비가 와도하루도 거름 없이차가운 시장 바닥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가며오가는 사람 다 쳐다보면서서투른 미소로판매전략 펴보지만아침 장 보는 시간 다 지나도록그득 남은 고구마순뱃속에서는 밥 들여보내라고신호하고 야단인데붕어빵 굽는 냄새 나는 쪽힐끔 남몰래 쳐다보고는새끼들 돈 달랄 일 생각나서먹고 싶은 충동 참으면서오는 길목 바라보며서성이며 마당에 서 있을서방 생각으로조금만
이어 내리건대, 해의 차례는 임인년 오월 병오 초하루 스무여드렛날 경술, 이른바 2022년 6월 26일후학 형광석은 청정한 몸가짐과 경건한 마음으로 감히 밝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 우러러보며백범 김구 선생 영전에 아뢰오니,낯설고 물선 이역만리(異域萬里) 중국에서 바람을 밥처럼 잡수시고 차디찬 이슬을 이불처럼 덮고 자는 몹시 처절하고 참담한 시련을 견뎌내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이끌어 오신 백범 선생이시여!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만3천리 대장정, [상하이(上海, 1919.4.11. 임정 수립)~항저우(杭州, 1932)~자싱(嘉興)~하이옌(
청재 선생은 1951년 9월과 12월에 각각 ‘육군 하사관학교’와 ‘육군경리학교 경리하사관 후보생 과정’을 수료하셨다. 올해가 70주년이다.1951년 5월 1일, 19세 소년은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3월 17일, 전남 화순군에서 수복 및 빨치산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제3대대가 빨치산 혐의로 마을 주민인 청장년 남자 15명의 목숨을 빼앗았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9.17, 242-244쪽). 우연히도 그 시점에 첩첩산중으로 피란을 가는 바람에 겨우 화를 면했구나. 1년 전에 발발한 6
곽예남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그곳에서도 잘 계신지요.할머니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에요. 꽃다운 순백의 영혼들을 생각하면 이 겨울이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진 않아요. 할머니 그곳에서는 잘 계신지요. 할머니가 가신 그 나라에서는 편히 계셨으면 좋겠네요.요즘도 할머니가 사시던 담양 집 앞을 지날 때면 할머니가 너무 뵙고 싶어져요. 할머니가 손을 잡아주며 환하게 웃으셨던 순간들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어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던 시간들이 후회스럽기만 합니다.2016년 7월 말께 할머니를 처음 뵈러 가던 그날은 봉
지난 2002년 불법체류하다 합법체류 자격을 얻은 뒤 한국어 교재를 만들고 싶다고 밝힌 네팔인 이주노동자가 있었다. 필자는 네팔인을 위하여 최초로 한국어 교재인 (THE TWO WAY GUIDE BOOK)을 기획해서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그 노동자와 첫 인연을 맺었다. 교재는 한국인은 네팔어를, 네팔인은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구성했다.훗날 그 노동자의 초청으로 네팔 현지를 방문해 한 달간 머물기도 했다.그 덕분에 뜻하지 않게 네팔어를 배운 나는 네팔인 아내와 결혼하며 깊은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지
지난 11월 16일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가신 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진정한 스승이 더는 없다고 하는 시대에 나는 운좋게도 참 좋은 스승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안석재 선생님이다. 쉰다섯살,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나신 안 선생님의 기억을 이렇게 글로나마 나누어 공동의 기억으로 만들고 싶다.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자리한 휘봉고등학교, 대부분 학생들이 기억하는 선생님의 첫 인상은 입학식 날 모습일 거다. 인자한 미소에 안경. 푸른색 조끼에 왠지 작은 나무 한 그루 같았던 분. 국어 담당인데 손에 꼭 쥐고 있던 카메라. 어
엄마!! 엄마(태영숙·1935~2020)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난 지 벌써 1년이 지났어요. 비행기 안에서 들은 엄마의 소식. 결국 전 엄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죠. 지난 9월 23일. 엄마의 첫 기일. 엄마가 좋아하는 꽃 들고 찾아갔어요. 유리 너머로 엄마의 유골함을 만져보지만 실감이 나지 않아요. 이제 제게 남은 것은 후회와 슬픔뿐. 엄마와 좀더 많은 대화를 나눴더라면, 자주 찾아뵀더라면, 꽃구경을 많이 했더라면 후회합니다. 뒤늦게 이렇게 편지를 쓰며 엄마가 보고 싶어 꺼이꺼이 웁니다. 어렸을 땐 철없어 엄마의 힘든 삶을 살피지
1950년대부터 통일·민주화 운동 앞장세 분 합쳐 30년 넘는 감옥살이도 감내고문 후유증에도 아껴 모아 ‘기부 실천’비전향 장기수·양심수 옥바라지 ‘자처’기초생활수급비·조의금까지 미리 기증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남겨두고 떠나가신 세 분의 여성 통일운동가를 추모합니다. 내 마음의 교과서이자 삶의 향기인 고 박정숙·주명순·김선분 선생님을 기립니다.1917년생인 박정숙님은 지난해 10월 2일 104살에, 친자매처럼 60년을 같은 집에서 동고동락한 1925년 김선분님은 2015년 8월 4일 91살로, 그리고 두 분과 1950년대부터 정치적
그리운 엄마~,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신 지 200일이 훌쩍 넘었습니다. 32년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을 맞으니, 새삼 엄마를 지켜내지 못한 애통함에 사무칩니다. 하지만 엄마를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용기를 내었습니다.엄마를 잃고 나자 세상이 온통 낯설고 슬픔 투성이입니다. 엄마 없는 큰오빠 생일엔 모이지도 못했고, 엄마 없는 큰언니 칠순에는 자매들만 모였습니다. 엄마가 안 계시자 끈 떨어진 풍선처럼 모두 뿔뿔이 흐트러진 모양입니다. 엄마의 고장 난 시계를 고쳐 손목에 두르고, 엄마의 원피스를 꿰매어 입고, 엄마 양말을 신고, 엄
그리운 어머님 , 어머니가 저희들 곁을 떠나신 지 어언 15 년이 다 되어 갑니다 . 어머니가 아기 때부터 키워주시고 늘 손잡고 교회에 다니시던 무남독녀 손녀딸 도란이는 벌써 서른 살이 되어 멀리 타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오늘 이렇게 하늘나라 어머님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 이제 현직에서 은퇴하고 집에서 지내는 간간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머니와의 추억의 편린을 주워 모아 글로 남겨두기 위함입니다 .어머님 , 올해도 어김없이 5 월 8 일 어버이날에 충남 천안군 풍산공원묘지에 아버님과 합장해드린 묘소에 부부동
거기 여전히 버리지 못한 조국 , 버리지 못한 민족이 있다. 지난 2009년부터 2년 가까이 머물렀던 우크라이나의 고려인 동포들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운 기억들이 있다 . 어머니 아버지의 나라, 한반도에서 8천Km나 떨어진 머나먼 땅에서 태어나 68년 평생을 살다가 묻힌 강이리나 할머니와 짦은 인연은 그중에도 가장 애절하다 .그해 3월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우크라이나로 파견된 나는 초기 6개월간 니콜라예브와 연수과정을 마친 뒤 크림자치공화국의 작은 도시인 에파토리아에 도착했다. 크림반 도의 2500 년이 넘은 고대
가난 탓 초등학교만 다녔던 ‘한’이발사로 3남1녀 키우느라 고생자녀들 안정된 직장 다니길 ‘소원’장남으로 뜻 이뤄주지 못해 ‘죄송’별세 2년전 전화로 ‘사랑해요’ 인사“아버지 사랑해요.” 어느새 떠나신 지 9년이 지났지만 문득문득 아버지에게 혼잣말처럼 해드리곤 하는 말이다. 10여년 전 제주도에서 찻집을 하던 시절 처음 전화로 했던 고백이다. 그 시절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도 새삼 떠오른다.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돌로 쌓은 벽 위 지붕에 새를 얹은 초가. 작은 찻집에 손님 세 분이 들어옵니다. 찻집에 남자 손님 셋은 드문 일이지만 광
황해도 벽성군 대거면 출신 실향민한국전쟁때 홀로 내려와 대구 정착작은 시계방 하며 3남1녀 뒷바라지은퇴뒤 교회잡지에 시도 종종 발표평생 고향 그리워하다 30년 전 별세얼마 전 인감도장을 찾다가 장롱 깊숙이 넣어둔 예물시계를 발견했다. 결혼할 때 아내가 사 준 시계다. 그동안 찬 적이 없어 거의 새것인데 이제는 내 손목이 굵어져 시겟줄이 좀 짧았다. 대구 교동 귀금속거리에 가서 시곗줄을 늘렸다. 어린 시절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아버지는 이 근처 교동시장에서 강화도 교동 대룡시장 시계방보다 좀 작은 시계방을 하셨다. 겨울에는 연탄
어릴적 제목도 모른채 들었던 노래들나도 모르게 입과 몸에서 저절로 나와병든 남편·6남매 보살피며 시집살이고달픔·슬픔·아픔도 실어 보내신듯누님들 기억 따라 가사 적어보니 ‘먹먹’내 어머니, 정안업님께서 생전에 자주 부르시던 노래가 있었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노래로 어머니를 기억한다. 1991년(72살)에 작고하셨으니 노래의 음률은 아련하고 가사도 가물가물하다. 70대 후반이 되신 누님들께 전화로 여쭈었더니, 수화기를 통해 나지막한 노래와 가사가 들려왔다. 누님들이 부르시는 노래와 함께 어머니의 모습도 안개처럼 뿌옇게 다가왔다. 어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창 밖으로 기차가 지나갑니다. 결혼한 지 스물일곱 해를 맞은 오늘, 저는 아내와 여행 중입니다. 당신이 떠나간 지는 열아홉 해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제 아내를 몹시 귀하게 여기셨지요. 제 아이들조차 당신의 품을 찾았습니다. 평생 홀로 살아왔고, 가족과도 어느새 멀어져버린 당신에게는 꼭 살아야겠다는 열망이 없었을까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그 열망을 데우지 못했습니다. 위암 판정을 받은 후 몸도 마음도 급속히 쇠약해져가는 모습을 저는 끝까지 보아야 했습니다.2002년
전북 완주 ‘깡촌’에서 전주로 이주제재소·연탄배달·이삿짐 운송…일제 징용 이어 6·25때 상이군인40년뒤 국가유공자증 받고 ‘뿌듯’그리움의 시간. 한때는 그리도 간절했건만 바람 속의 먼지처럼, 불꽃처럼, 풀꽃처럼 소멸되어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고, 오직 퇴색한 기억으로만 남아 가끔 열어보는 꿈처럼, 그리움이란 단어도 똑같진 않겠지.전북 완주군 동상면이라는 깡촌에서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나는 7살 때 동네 형들을 따라 시오리 길을 걸어 동봉국민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채 배움을 나섰다. 이에 농사짓던 부모님은 초등학교만 졸업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새벽녘이었다. 새벽에 스마트폰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서울 삼성병원 중환자실에서 밤새도록 부친 건강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던 아내의 전화다. 촉각을 다투는 부친의 임종을 앞두고 목회자인 남편에게 마지막 기도를 부탁하는 아내의 전화였다.필자는 마지막 생을 앞둔 부친을 위해 전화상으로 임종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부친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엄중한 시간에 이보다 더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보다 더 간절한 기도, 심장이 타는 기도, 절실한 기도를 드린 적이 없었다.물론
충북 옥천의 큰 어른 이종학 선생이 한 세기의 삶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옥천신문과 손잡고 2018년부터 ‘은빛자서전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자체가 역사이고 작은 박물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80세가 넘은 어르신들의 구술(口述)을 풀어낸 자서전을 옥천신문 지면에 게재하고 자녀와 손주 등 후손들이 감사편지를 작성하여 화답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다섯 번째 은빛자서전의 주인공이 되어주셨던 선생의 백년 인생을 정리해보았다.이종학 선생은 1922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년시절 학
외할머니 생존 위해 네차례나 결혼아버지와 재혼…마흔에야 호적 생긴 어머니빚보증에 중풍 쓰러진 부친 7년간 수발억척 생활력으로 3남 2녀 뒷바라지나 대신 군불지피다 폭발사고로 얼굴 다쳐“함께 나들이 한번 못한 채 32년 전 홀연”외할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탓에 생존을 위해 4번이나 결혼했다고 한다. 1910~20년대 일제강점기 하루하루 입에 풀칠조차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던 가난한 농촌의 삶을 가늠해 볼 수조차 없다. 어머니(이간난)는 그런 할머니의 3번째 남편에게서 1922년 태어났다.경기도 안성의 일죽이 고향인 어머니는 동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또 이역만리 외국에 살고 있는 손자손녀들에게 ‘뿌리를 잊지 말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의 옛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내가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던 20대 시절, 어머니께서는 밤 11시 넘어서야 귀가하는 아들을 따뜻하게 반겨주셨고, 당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어머니와 한방에서 지내던 때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새벽 두세 시가 되기 일쑤였다.그러던 어느 날 밤, “이제 와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라고 얘기를 꺼내셨다. “예전에 나는 참 나쁜 엄마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전방삭 장군의 집안이순신 장군과 무예훈련 함께한 동갑내기왜적 총탄에 전사해 ‘충효사’ 지어 기려농기구 제작 판매로 가정 꾸리고 공덕을 실천하신 전명옥(1879~1963), 나의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어모장군’ 전방삭(1545~98)의 12대 손이다.전남 보성군 우산리에서 태어난 전방삭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부정 건공장군에 올랐다. 이순신 장군이 명궁으로 소문난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결혼해 장인에게 무예를 배울 때 그도 동갑내기여서 친구가 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창설하여 왜적을 물리쳤으며
나는 성이 하씨인 분을 만나면 작아진다. 왜 그런가? 할머니는 진주하씨 집안의 규수였다.‘할머니’, 생각만 스쳐도 나는 울컥한다. 1971년 3월부터 1987년 11월 29일 내가 장가가는 날 아침까지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밥을 먹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인 1968년 어느 추운 날 약 3km를 걸어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는 버선발로 달려오셔서 내 언 손을 볼에 갖다 대셨다. 그 부드러운 감촉을 어디서 다시 느끼랴.‘할아버지’, 어려서 가장 늦게 배운 말이다. 부를 기회가 없었다. 할머니는 1909년생으로 동갑인 할
봉오동 기지 만든 최운산 장군의 부인독립군의 딸로 14살때 결혼해 안살림‘재봉틀 부대’ 꾸려 수천명 군복 제작애국청년들 식자재 마련·공급 책임도“지금껏 유공자 서훈 못받아 부끄러워”머잖아 3·1절과 할머니 김성녀 여사의 기일이 돌아온다. 1975년 3월3일, 내가 고3 새학기를 시작하던 날, 평생 봉오동·청산리 무장독립전쟁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셨던 할머니께서 끝내 남편 최운산 장군의 서훈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던 날이다.최운산 장군은 그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장남인 아버지(최봉우)를 비롯해 우리
이글은 이영섭 주주통신원의 아내되시는 정민숙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그리운 엄마.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 가슴이 아려옵니다. 올해 3월 24일이면 엄마가 제 곁을 떠나신 지 벌써 1년이 되는데도 그 당시 멍하니 당했던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에서 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어요.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막연하게 부모님의 죽음과 이별을 스치듯 상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번개치듯 내리칠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엄마의 장례식을 정신없이 무감각하게 치르고 나서 지금까지 눈물, 한숨, 후회, 자책감 등 여러 감정을
아버지(김봉규·1927~2019)는 함평천지라 불리는, 전남 함평의 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 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소학교를 다녔다. 1940년께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할머니와 네 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어머니(김영금)는 방 한 칸과 부엌 하나만 달랑 있는 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나마 방이 좁아 새 신부는 어쩔 수 없이 밤이면 남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잠을 구걸해야 했다. 그때 아버지는 소사(小使)로 면사무소에 다니
1964년 어머니 일선(이남순·1922~2013)님이 우리 4남매를 데리고 부산항을 떠나 브라질행 이민선을 탔을 때 수중에 미화 400달러가 전부였다. 브라질 이민을 결정한 뒤 아버지(박성철·1926~84)가 기술부분을 담당하고, 어머니가 경영하던 대동펌프 회사를 팔아 이민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수금 담당 직원이 돈을 모두 가지고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부득이 아버지는 뒤처지셨고 어머니와 4남매만 먼저 그해 10월 네덜란드 화물선 편으로 무모한 이민 길을 떠났다. 배가 브라질 산투스항에 도착할 때까지 10곳의 항구에 들를 때마다
필명 김 자현60년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았던 언니가 대입시를 앞두고의 일이다. 서울 명문고를 다녔던 언니는 프라이드가 하늘을 찔렀다. 어린 꼬마인 나도 집 안 분위기에 의해 서울대 아닌 곳은 학교도 아닌 줄 알고 자라는 중이었다. 인간에게도 우생학을 적용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발설을 마구 하던 날들이었으니 지금도 간담이 서늘하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일억 환 정도의 예치금을 갖고 계시던 아버지는 아이디어가 속출하는 분이었다. 지금 환산하면 대체 얼마나 되는 돈일까. 가히 50억은 넘는 액수라던데 잘은 모르겠다. 자본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