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군에 간지 다섯 달 지났을 때 일병을 달고 휴가를 나왔다. 휴가를 나온 아들이 많이 변해서 좀 놀랬다. 성숙해졌다고 할까? 이제야 젖살(?)이 확 빠져서 뺨이 푹 파였다. 늘 딸랑딸랑 귀여운 강아지 이미지였는데, 얼굴이 홀쭉해지고 광대뼈가 드러나면서 강인한 진돗개 느낌이 났다. 동생을 ‘강쥐’라고 부르는 제 누나도 도베르만이나 셰퍼드 분위기가 난다고 하니 아들은 확실히 개상(?)인가 보다.그토록 원하던 특수임무반의 훈련도 할 만하다고 했다. 솔직히 시간 가기만 바라는 군대에서 제자리 서있는 업무가 주된 평범한 헌병보다 다양한
아들이 군대간 지 석 달이 넘었다. 아들은 기초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강원도 모 부대에 배치 후 보직도 받았다. 얼마 전에는 부대에서 ‘부모 초대의 날’ 행사를 해주어 다녀왔다.부모 초대의 날은 아들이 지내는 숙소도 돌아보고, 상관도 만나고, 아들과 함께 외박도 시켜주는 보너스 데이다. 부대에서 마련한 버스로 강당으로 이동했는데, 강당 앞에 많은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슬쩍 보았는데도 동료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아들 모습이 눈에 금방 띄었다. 역시 핏줄은 당긴다. 아들도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아들은 진주 훈련소 수료식을 마치고 2박 3일 휴가를 왔다. 수료식에 부모님이 참관해도 되는데 아들은 별 거 없는 거라고 굳이 오지 말라고 했다. 맛있는 것 해놓고 집에서 기다려 주는 게 더 좋다고 해서 그리했는데... 갔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5시에 온다는 아들이 6시가 넘어도 오지 않아 이리저리 왔다갔다 정신없이 굴었다. “옆길로 샜나” 말했다가, 딸에게 “집착하지 마세요”라는 구박을 받고는 시무룩해져있었는데 7시에 문이 철커덕 열리고 아들이 들어왔다. 군복을 입고 들어오니 정말 낯선 청년 같았다. 아들을 보자 이상하게
아들이 군대에 간 며칠 후, 아들이 입고 간 옷가지 등이 왔다. 상자 안에 편지도 있었다. 다른 엄마들은 편지 보면서 다 운다는데.. 나는 철없는 엄마인지 웃음이 났다. ‘ㅋㅋㅋ’가 들어간 먹보 아들 편지는 짧았지만 명랑 쾌활함이 묻어났다.“여기 훈련소 그래도 나쁘지 않아!! ㅋㅋ 조교들도 나름 잘해주고 ㅋㅋㅋ 때리지도 않고 벌도 안준다? 밥도 먹을 만해. 만날 짬밥 맛없다 하는데 나는 잘 먹어 ㅋㅋㅋ 밥 2공기 반은 먹는 듯...” 걱정할까봐 일부러 이리 썼을까?그 날 저녁, 전화로또에 당첨되었다고 아들이 전화를 했다. 웃으면서
4년 만에 아들 생일을 한국에서 맞았다.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사주려 했는데 의외로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외식 싫어. 엄마가 해주는 미역국하고 밥 먹을 거야.”나는 요리에 관심이 없는 주부다. 요리하는 시간이 아깝고, 요리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도 별로 없기 때문에 ‘오늘은 맛있는 뭘 먹을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뭘로 한 끼를 때울까?’ 생각한다.요리를 귀찮게 생각하니 당연히 요리 솜씨도 없어 가족들이 가끔 불평을 한다. 엄마는 ‘너는 미역국만 맛있게 끓일 줄 안다.’고 구박하고, 남
캐나다에서 12학년을 마치고 아들이 귀국하던 날, 공항에서 아들을 기다리는데 모자를 쓴 싱글싱글 웃는 아이가 카트에 짐을 가득 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쟤 욱이 같은데..." 하고 남편에게 말하면서 잠시 긴가민가 망설이는 순간, 아들은 내 옆을 휙 하고 지나갔다. 남편이 뒤돌아 지나가버린 아들에게 "욱아!" 하고 불러 세웠다. 아들은 웃으며 “엄마는 아들도 못 알아봐?” 라고 구박했다. 아들인 줄 알면서도 단번에 아는 척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달라진 아들을 본 뇌가 당황해서 인지기능이 엉켰기 때문이다. 아들은 소년에서 청
아들이 팔뚝근육을 보여주겠다고 Cyworld에 들어가 사진을 보라고 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사진은 '아바타'라는 사진인데 일부러 팔에 힘을 줬는지 팔뚝이 막 울끈불끈했다. 힘이 주체를 못하고 막 솟아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상하게 근육질 남자에 점수를 주는 형이 아니기 때문에 멋있기는커녕 징그럽게 보였다.오랜만에 들어간 싸이에서 아들의 사진과 그 밑에 달려있는 이런저런 댓글들을 훑어보았다. 그 댓글들을 보면서. 내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댓글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아래 사진에 중학교 때 아들이 다녔던 학원 영어선생님
2010년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에 4대강사업저지를 위한 시국기도회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길거리에서 열렸다. 4대강사업은 진짜 해서는 안 되는,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사업이라 생각했기에 추운 겨울에도 미사에 빠지지 않고 갔다. 성탄전야 미사도 밤 9시, 여의도 길거리에서 열렸다. 영하 19도의 날씨였다. 얼마나 추웠는지 미사를 보면서도 이가 딱딱 부딪치도록 떨었다.이전 글에도 쓴 적이 있지만 몸이 약한 나는 유난히 손발이 차서 추운 곳에 오래 있으면 몸이 꽁꽁 얼고 반드시 감기에 걸린다. 성탄
아들은 6살때 유아세례를 받았다. 내가 영세를 받으면서 함께 받았다. 예쁜 양복 입고, 사람들에게 선물도 받고, 꽃다발도 받고 신이 나서 받았지만 뭐가 뭔지 모르고 그냥 받은 거다. 그 나이에 종교가 뭔지 알겠는가? 아들은 가족과 일요 대미사에 가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다. 다만 주일학교는 피하려고 했다. 단체 활동을 싫어하는 아들의 성격을 알기에 강요하지 않았다. 5학년 때 성당 친구 ‘규’가 생기면서 주일학교에 가게 되었다. 초등부 미사가 끝나고 다 같이 몰려가는 분위기 때문에 ‘규’의 손에 이끌려 따라다녔다. 초등부 주일학교 선
아들은 어려서부터 신발을 좋아했다. 친척어른들이 옷 종류를 선물해주면 ‘고맙습니다.’ 하고는 옆으로 슬쩍 치워놓고 입어보라고 해도 입어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주면 신이 나서 신어보고 옆에 끼고 다녔다. 누가 뭐가 필요하냐고 물으면 항상 ‘신발이요!’라고 답했다.마음에 드는 신발은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그런 신발을 신고 나갔다 온 날이면 먼지를 털고 모양을 잡아서 신발장에 고이 모셔 놨다. 비에 젖은 신발도 제 때 손질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처박아놓아 곰팡이가 피어 버린 적이 있는 제 누나와는 딴판이다.재작년
남편하고 딸하고 나하고, 가끔 아들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곤 한다. 우리 세사람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세상을 처음 방문한 영혼’윤회가 있다면 딸은 여러 번 세상에 나온 고참 영혼 같다.딸은 이런 저런 이치를 알려주지 않아도 두리두리 알아서 잘 산다. 좋게 말하면 융통성이 뛰어나고 나쁘게 말하면 꾀가 많다. 가끔 말 안 듣고 지멋대로 하다가 지 꾀에 지가 넘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엄마 말 들을 걸. 내 꾀에 넘어졌네.” 라고 후회하지만 그 때뿐이다. 또 생글생글 웃으며 제 나름대로의 처세술로 척척 잘 헤쳐 나가기도 하고
학교 공부는 그렇게 적응을 했는데 친구관계는 어땠을까?뉴질랜드 학교에서는 군대식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학생들은 2명씩 큐브라는 작은 방에 배정된다. 큐브는 방문이 없이 복도가 바로 보이는 공간이다. 복도를 방 끝에 두고 나란히 있는 10개의 큐브에서 2명씩 생활하므로 최대 20명까지 지낼 수 있었지만 아들이 있는 기숙사는 13명이 지냈다. 아들은 비교적 친구들과 빨리 어울린 것 같다. 친구 사귀는데 준비기간이 많이 걸리는 아들이 어떻게 아이들과 빨리 어울렸을까? 아들은 자기 성격을 버렸다고 했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용기를 내어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노는 것 밖에 몰랐다. 숙제도 학교에서 대충 후딱 해놓고 방과 후엔 무조건 놀았다. 학교도 순전히 놀기 위해서 일찍 갔다. 일찍 가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줄이 긴 그네를 실컷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학교에 너무 일찍 가서 엄마가 좀 있다 학교에 뒤따라 가봤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에서 혼자 그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보았다고 하셨다. 이렇게 노는 것은 어린 시절 내 삶의 전부였다.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걱정이 되었던지 인천교대 남자 대학생을 과외선생님으로 붙여
나는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갑자기 너무 조그만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는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역시나 어려서부터 걸핏하면 체하고, 열나고, 피부병에, 병을 달고 살았다. 잘 먹지도 못하고 늘 아프다 보니 성장도 더뎌, 뼈만 남은 깡마른 체구에 키도 작아 별명이 '꼬맹이'였다. 6학년 때 6학년 중에서 가장 작은 순위로 2위를 했으니... 중학교 3학년 이후로 키가 크면서 좀 건강해졌지만 아직도 골골대는 것은 여전하다. 감기가 유행하면 식구 중에서 가장 먼저 걸리고 가장 늦게 낫는다. 지금도 감기와 투쟁 중이다.
아들은 어려서 느렸다. 누가 뭐라고 물어보면 대꾸도 잘 못하고 눈을 껌북거리며 ‘어.. 어..’ 하면서 첫 마디를 쉽게 열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이렇게 반응도 느렸지만 어휘 발달도 남들보다 늦어서 제 나이만큼 다양하게 말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느린 것이 걱정은 좀 되었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말 한마디 지지 않고 따박따박 따지며 날 꼼짝 못하게 하는 딸에게 시달려서 그랬을까?아들이 느려서 오랫동안 사랑스러웠다. 신체 성장속도도 느려서 여드름은 우리나이로 고1 나이인 17세 봄부터 나기 시작했고 보숭보숭 수염도 17세 가을부
아들은 2007년 7월,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뉴질랜드 남 섬의 시골 도시 ‘오마루’란 곳에 있는 공립학교에서 최초의 한국 학생으로 입학을 했다. 1년 학기를 마치고 2008년 7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왔다.아들보다 3개월 늦게 한국 학생이 또 공부를 하러 왔다. 그 학생은 4개월을 지내고 2월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3월에 있는 고교 입학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환불도 안되는 1년 과정 등록비까지 다 내고도, 중도 귀국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컸다고 한다. 그 친구가 한국으로 들어온 후 걱정이 되
아들이 왔다. 7월 중순에 뉴질랜드로 떠난 아들이 5개월을 마치고 방학을 맞아 드디어 왔다.처음엔 엄마 보고 싶지 않다고 하던 아들도 오기 전에는 하루가 너무 길다고 했다. 내 마음하고 똑 같나 보다. 이상하게 오기 바로 전이 안달이 날 정도로 더 보고 싶다. 누나도 동생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동생이 오면 뭐를 해줄까 고민하면서 동생과 놀러 다니려면 돈은 필요하고 엄마에게 이제 용돈 타기는 좀 미안하고 해서 아르바이트 자리도 알아봤다니 그저 찰떡같은 오누이 사이로 커준 것이 고마울 뿐이다.아들은 2학기를 어떻게 지냈을까?아들이
아들과 를 하는데 뉴질랜드 학교에서는 한글프로그램을 깔 수가 없어서 아들은 영어로 나는 한글로 의견을 교환했다.아들이 에 첫 번째 요구사항을 적었는데 King noodle을 보내달라고 썼다. 왕국수? 라면에 그런 이름이 있나? 잘 생각이 안나 제 누나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왕뚜껑사발면’일 거라고 했다. 아토피 때문에 라면을 질색하는 엄마 밑에서 살다보니 가끔 라면이 먹고 싶을 때면, 몰래몰래 편의점에 가서 즐겨먹는 라면이 바로 ‘왕뚜껑사발면’이었다는 것이다.그러고 보니 나도 참 너무했지 싶다. 아들이 출국할 때 한국
2007년 7월 중순, 출국을 하고나서 아들은 2주 동안 전화 한 통화 없었다. 잘 도착했고 별 탈 없이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 교환학생 담당선생님의 이메일을 받아서 알고 있었지만 아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내 책임일 수도 있었다. 아들이 떠날 때 나는 전화카드 한 장도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욱아,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나서 제일 처음 해야 할 일은 선생님께 여쭤봐서 전화카드 사는 거야. 그리고 사용방법을 배워서 엄마에게 ‘잘 도착했습니다.’라고 전화하는 거야.”이렇게 누차 일러주었는데도 전화카드를 못샀는지
약 한 달 간, 뉴질랜드로 보내달라는 아들의 날이면 날마다 볶는 성화에 못 이겨 수속을 밟은 지 한 달도 안 돼 아들은 뉴질랜드로 떠났다. 말 꺼낸 지 두 달도 안 돼 가버린 거다. 어떻게 수속과정이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더 신기한 것은 아들이었다.울 아들이 어떤 아들이냐?미국에서 지 누나를 1년간 교환학생으로 맡아주셨던 고마운 호스트 가정에서 아들이 교환학생으로 오기만 한다면 맡아주겠다고 하셨음에도 “내가 왜 거기에 고생하러 가냐? 왜 내가 남하고 사냐?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싫다
아들이 1학년 때였다. 추석 지나고 나서 담임선생님께서 학부모 상담을 요청하셨다. 국어수업에서 앞말을 주고 빈칸에 뒷말을 넣는 이런 과제가 있었는데,"내가 만일 새라면 ."위 글에 아들이 이렇게 뒷말을 달았기 때문이다.“내가 만일 새라면 하늘을 날다가 떨어져서 편안하게 죽고 싶다”국어선생님께서 심각하다 싶어서 담임선생님께 알렸고 담임선생님께서 먼저 아들을 상담하고는 부모님 호출을 했다.울 아들 어떤 아인가? 집안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 누가 물어보면 줄줄 다 부는 아이다. 엄마 체면 생각해서 감추고 그래주는 것이 없어서, 지인을
중학교에 들어가니 모든 것에서 급격한 변화가 왔다. 우선 6학년 교과서와 비교해보면 중학교 1학년 교과서는 갑자기 어려워졌다. 선택된 어휘가 완전히 달랐다. 나도 어려웠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중학교 1학년 들어가서 공부가 갑자기 어려워져서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났다. 고 1 때도 그랬다. 그렇지만 곧 적응했듯이 아들도 적응할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예전처럼 방과 후에 집에서 복습 위주로 차근차근 공부 해나갔다.그런 나에게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요새 누가 자식 공부를 엄마가 시키냐? 공부 가르치는데도 요령이 있는 거고
우리가 이사 오고 나서 '현이'네도 몇 달 뒤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현이'와 현이 동생과 셋이서 맨날 어울려 놀게 되었다. 그런데 6학년 올라가면서 소꿉친구 현이 외에 단짝 친구가 생겼다. 성당에서 만난 친구 ‘규’라는 아이였다. '규'는 우리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아이로 성격이 온순하고 느릿느릿하면서도 자기 의사 표현이 분명한 아이였다. 배려심도 많아 아들과 잘 맞았다. 체구도 비슷했다. '규'도 학원을 다니지 않아 방과 후에는 서로 만나 자주 놀았다. 아들은 '규'와 현이 외엔 친구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들이 10월 초순에 전학 간 4학년 시절부터 6학년까지를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다. 하루하루 조심스럽게 아들의 심경을 살피며 지냈던 시절이다.특히 5학년, 6학년 때는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선 선생님과 잘 지내지 못했다. 두 분 다 언성이 높으셔서 늘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셨다. 오죽하면 아들이 5학년 때 일기장에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왜 선생님께서는 엄마들이 오시면 순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다가 엄마들이 가시면 사자같이 소리를 지르실까?’라고 썼을까?서울에서 선생님들은 모두 여자선생님이셨는데 단체 기합과 단체 매를
나는 인간에게는 '노는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어려서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커서 놀려고 한다는 것을 굳세게 믿었기에, 공부는 학교에서 하고 방과 후에는 실컷 놀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큰 아이를 중학교까지 보습학원이란 곳에 보내본 적이 없고 방과 후에는 거의 대부분 자유를 주었다. 큰 아이 초등학교 때 일기를 6학년까지 모아두고 있는데 ‘놀았다.’는 내용이 많다. 가족하고 놀고, 친구들하고 놀고, 친척집 가서 놀고... 특히 방학 때 일기를 보면 ‘실컷 놀았다.’가 많다. 지금까지 공부하라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
이번엔 심각한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고 아들과 나의 닮은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아들과 나는 성격이 많이 닮았다. 지금은 아들이 나보다 훨 유한 성격으로 바뀌었지만, 사교성이 없는 것이나, 곧이곧대로 하는 것이나, 살짝 얼띤 것이 닮았다. 그런데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닮은꼴이 있다. 첫째로 치열 구조에서 나타난 유전의 힘이다.나는 양쪽으로 송곳니가 덧니 형태로 나있어 웃다가 살짝 입을 다물면 입술이 양쪽 송곳니를 채 가리지 못하고 뾰쪽하게 남게 된다. 그래 어려서 아이들이 ‘드라큘라’라고 놀리기도 했다. 지금도 웃다가 어쩌
4학년이 되면서 남자아이들은 더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아들은 아직도 마음이 여린 어린아이 모습 그대로인데 다른 아이들은 사춘기가 왔는지 마구 변해갔다. 이상한 성적인 멘트도 서슴없이 썼고 욕도 심하게 했다. 욕 한번 할 줄 모르고, 방어주먹 한번 날릴 줄 모르고, 말싸움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 아들은 그런 거친 아이들에게 점점 더 지쳐가는 것 같았다. 소원이 학교 가지 않는 것이고 방학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방학이 되면 하루하루 줄어들어가는 날짜를 셌다. 오죽하면 초등학교는 졸업하겠지만 중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했을까? 중학
2학년이 되기 전 미국에서 이웃으로 살다가 귀국한 현이네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왔다. 현이네는 그 후 6년 동안 우리와 이웃사촌으로 살았다. 아들은 거친 남자아이들보다 현이와 더 꿍짝이 맞는 것 같았다. 현이와 현이 동생과 아들 셋이 자주 놀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늘 하하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당연히 현이는 아들의 단짝친구가 되었다.옆길로 새서 현이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들과 점차 멀어졌다. 다른 중학교로 배정된 탓도 있지만 아들과 현이 둘 다 한국의 중학교 과정을 너무 힘
한국에 돌아와서 친척들을 만났을 때였다. 아이들 고모가 두 아이를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언니, 애들이 2년 만에 사람이 돼서 왔네요.” 그 때 나는 웃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기 전, 한 아동복지시설 원장님이 일에 몰두하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남의 아이들 챙기지 말고 내 아이 먼저 챙기세요.” 이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내 아이들? 잘 클 거야. 지금도 착하게 잘 크고 있는데.. 그 씨가 어디 가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 미국에 가서 두 아이들과
새로운 유치원아들의 적응과 함께 우리도 개똥과 함께 살던 집에서 3개월 살고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지역은 이전과 다른 학군이었다. 어렵게 적응한 유치원을 옮기나 마느냐로 고민을 했으나 훨씬 가까운 거리에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서 1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시켰다.그 학교에는 아들과 동갑내기 친구 현이가 다니고 있었다. 현이 아빠는 남편과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동료였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공항 픽업서부터 살림살이 구입, 음식물 사는 것 등 모든 것을 도와준 현이네와 평소에도 늘 왕래하
아들 유치원의 한 반 학생 수는 약 15-17명 정도이었고 담임선생님 한분과 보조선생님 한분이 계셨는데 보조선생님은 매번 수업에 들어오지는 않았다.아들 수업에 처음 들어간 날은 나에게는 첫날이었지만, 수업은 이미 보름 정도 지난 상태였다. 보름 정도 지났기에 초기 정착이 끝났을 거라고 예상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남자 아이 2명이 심각한 수준으로 수업을 방해해서 교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말았다 했다. 예전 한국 유치원에서 아들의 수업방해 행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두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며 날뛰기 시작하면 수업
1997년 8월 Bronx에 도착했다. 왜 하필 Bronx란 말인가? Bronx는 뉴욕의 5개 자치구 중 하나로 북부에 있는, 좋지 못한 평을 가진 지역이다. 미국행을 선뜻 결정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도 이 지역이 마피아가 꽉 잡고 있으면서 범죄가 들끓는 곳이라는 소문을 들어서도 그랬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일하기로 한 대학교 주변은 마피아가 보호하는 지역이라서 Bronx에서 제일 안전한 지역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가보니 진짜 그랬다. 주로 이태리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꽃을 가꾸는 예쁜 정원을 가진 개인주택이 즐비하고 군데군데